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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놀로그
90년 대에 대한 향수에 불타는 요즈음, 한꺼번에 90년 대 드라마를 왕창 정주행 중이다. 그 중,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던 드라마 중 하나였던 '결혼'의 정주행을 마쳤다. 감상 결과는 한 마디로 고구마 몇 천 개를 한꺼번에 목구멍에 쑤셔박힌 기분이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런 드라마가 아니었다. 혹은 내가 그만큼 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결혼이라는 드라마의 처절한 비극성을 감당할 수도, 수용할 수도 있는 상태였나보다. 이 드라마를 한 마디로 평하라고 한다면, '질척임'의 진수라고 말하고 싶다. 첫째 딸은 수재였으나 고아인 가난한 고학생에게 빠져서 고생길을 자처하고 헌신하던 끝에 버림받고 몸부림치는 것으로 드라마 내내 보는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나라도 버리고 싶겠다 싶을 정도라, 남편..
뇌막염이라는 병이 지금도 존재할까? 19살 무렵, 난 뇌막염으로 두 달이나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아직까진 처음 경험한 입원 생활이다. 하지만 어렸고, 심한 열병이었기에 기억나는 것은 별로 없고, 그야말로 아무 생각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이라면, 그렇게 오래 입원하느니 차라리 죽기를 바랄 것 같다. 아예 병원에 가는 것조차 거부할 것이다. 그땐 내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부모가 시키는대로 할 나이였던 것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입원한 이유는, '결핵성 뇌막염'이었기 때문이라고 의사는 말했다. 사실, 뇌막염은 그저 머리에 염증이 생기는 것이라 심할 경우에도 1주일 정도면 치료가 되는 병이다. 그러나 난 입원한 이래 보름이나 의식을 잃고 있었다. 아니, 의식을 잃었다기 보다 의식은 있으되, 고열이..
난 대체로 김수현 작가의 작품을 즐겨 본다. 후기의 작품들은 본 게 별로 없지만, 한창 전성기의 작품들은 일단은 재밌기 때문에, 그리고 일종의 프로 의식이 짱짱하게 느껴지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에게 골고루 분량을 할애해서 적어도 중간에 흐지부지되는 캐릭터는 없도록 서사를 주는 성의가 좋기 때문이다. 유명 작품들, 시청률 좋은 드라마들이 많지만, 의외로 내가 정말 좋아하는 김작가 작품은 누구나 제목만 대면 아는 그런 작품들이 아니라, 거의 흥행적으로 실패하거나, 평도 별로 좋지 않은 작품들이다. 김작가의 작품 중에서 유명 작품들은 대개가 소장하고 있다. '사랑과 진실, 사랑과 야망, 사랑이 뭐길래, 작별, 목욕탕집 남자들,불꽃, 청춘의 덫 심은하버전, 내사랑누굴까' 등등 그런데 나의 리스트에서 빠진 몇 개가..
'사랑과 진실'과' 사랑과 야망'을 21세기에 볼 수 있다면, 그건 대단한 행운이다. 그런데 내가 그걸 받았다. 몇 년 전, 케이블에서 해주는 이 두 전설의 드라마를 우연히 첫회부터 녹화할 수 있었던 것이다. 84, 87년이 각각 제작년도였다. 대략 저렇게 오래 전 작품들을 보면, 생경하고 촌스러...울 것 같지만 의외로 그렇지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배경은 남루하고, 서울 시내마저 지금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여배우들의 얼굴이 정말 아름답다. 물론, 그들은 모두 20대의 젊음과 미모를 자랑하지만, 성형은 커녕 그 비슷한 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어찌나 싱싱하고 이쁘던지... '정애리' '원미경' '차화연' 등등의 여배우들이 주인공인데, 원미경은 물론 미모로 유명하지만, 난 오히려 정애리에게 놀랐다...
영화 '헤어질 결심'은 작년에 마지막으로 본 영화이고, 그 이후론 영화는 전혀 보지 않고 있다. 헤어질 결심이라... 난 이 영화가 정말 보고 싶었는데, 그러나 극장엔 개인적 사정상, 더 정확히 '건강상의 이유'로 갈 수 없는 고로 인터넷에 올라오기 만을 고대하다가 올라오자마자 잽싸게 보았고, 그 가장 큰 이유는 아주 단순하게도, 제목이 참 맘에 들었다는 것, 박찬욱 감독의 영화라는 점,탕웨이라는 여배우가 보고 싶었다는 점, 단지 꺼림직한 것은 다들 좋아하는 '박해일'이라는 배우가 내겐 다소 비호감이라는 것 정도. '헤어질 결심'이라니 참 멋진 제목 아닌가? 난데없는 제목이기도 하다. '난 그 사람과 헤어질 결심을 하고 있어. 난 그 인간과 헤어질 결심을 오래 전부터 해왔어. 넌 나와 헤어질 결심을 한 ..
일설에 의하면, 영조를 일생 괴롭힌 최숙빈의 '무수리'썰과 '아버지가 숙종이 아니다'썰, 언제부터 시작된 썰인지 알 길은 없지만 최씨는 '희빈 장씨의 죽음 이후에 내쳐졌다' 이유는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씨의 저주 탓이라는 고자질을 하여 왕으로 하여금 장씨를 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 요점이다. 이런 소문은 당대부터 있어 왔다. 각종 신빙성 없음에도 집요한 구설들은 연잉군과 숙빈 세력을 증오하던 소론이 의도적으로 퍼뜨린 소문이라고도 한다. 설마...라고 생각하긴 했다. 저런 소문이 당대에 퍼지다니, 왕가를 모욕하는 대역죄가 아닌가?? 그런데 내버려뒀다고??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 대놓고 말했다면, 대역죄로 죽여버리면 그만이지만, 은은하게 대중 속으로 퍼뜨리..
'새로운 시각, 해석'이 유행하는 시대이다. 지금까지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서 '희빈 장씨는 사악하긴 커녕, 불쌍한 정치적 희생양,(??) 인현왕후는 알려진 바와 달리, 성깔있는 못된 여인네, 그리고 존재감 약하던 숙빈은 알고보니 앙큼하고 야심찬 고자질쟁이 무엇보다 숙종은 저 세 여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은 교활한 왕으로, 저 여인네들의 얼키고 설킨 운명의 실타래를 움켜진 숨겨진 흑막, 등등으로 관점을 바꾸고, 그 새로운 시각에 그 시절의 사건들을 두드려 맞추려다보니 오히려 그 전보다 훨씬 심각한 왜곡이 생겨버렸다. 마치 세뇌라도 하듯,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글을 읽다보면, 저 위의 세 여인네의 새로운 평가를 떠들어대고 있다.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닌데 말이다. 왕조 안의 사건들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아닌 ..
조선조의 왕가엔 여러가지 미스테리가 숨어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뭔가 앞 뒤가 맞지 않거나, 어두컴컴한 구석이 있거나, 음흉한 검은 손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사건들이 은근히 많지만, 가장 상상력을 자극하는 건 역시 숙종조의 여러 사건들이다. 그리고 가장 내 관심을 끌어내고 상상력과 사실, 그리고 그 사실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이 무얼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인물이 내겐 '숙빈 최씨'라는 인물이다. 그녀를 에워싼 온갖 서사는 앞뒤가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그녀에 대한 평가는 전혀 상반되는 두 가지가 동시에 회자된다. 첫째론, 그녀는 매우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했으며, 인현왕후는 물론, 후비로 들어온 인원왕후까지 극진하게 모셨다고 한다. 둘째론, 숙종이 농담삼아 왕비로 삼겠다고 했더니 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