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모놀로그/작품과 인물 (187)
모놀로그
가끔 소장 영화 목록을 죽 훑어보자니, 한때 즐겨 보던 영화들에게서 하나 같이 피와 폭력의 냄새가 진동을 한다. 그래서 내 기억 속에 사랑스럽고 귀여운, 그러나 다소 엉뚱한 영화로 남아 있는 '아는 여자'를 건드려본다. '장진'영화 특유의 썰렁한 듯 하지만, 폐부를 찌르는 독특한 유머 감각 속의 깊이 있는 대사와 캐릭터 때문에 난 그의 영화를 좋아한다. 그것은 오로지 장진 만의 세계관에서 비롯된다. '킬러들의 수다'가 그랬듯 아무도 흉내낼 수 없는 장진 감독만의 순수함이다. 사랑 영화지만, 그 흔한 키스씬 하나 없고, 스킨쉽마저 없음에도 사랑에 대한 특별한 고찰을 천진하다시피 풀어가는 서사엔 그저 감탄할 따름이다. 아는 여자는 그 중에서도 독창적이고 새롭고, 그럼에도 사랑스럽다.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
청나라 역사 속에서 가장 미스테리한 인물인 계황후의 스토리엔 마치 조선조의 장희빈과 인현왕후, 그리고 숙빈처럼 반드시 당시 영귀비였던 위가씨가 등장한다. 계황후가 중심인물이 되면, 필연적으로 영귀비는 악역이 될 수 밖에 없고, 그 반대일 경우엔 계황후가 악역이 되는, 그야말로 악연임에 틀림없는 두 사람이다. 실제 역사 속엔 거기에 향비까지 가세하는 모양이지만, 드라마 속에선 그 당시엔 향비는 제거된 이후이다. '홍대용'이라는 사람이 쓴 당시의 상황을 보면, 귀비 때문에 벌어진 일일 수도 있다는 식인데, 사실, 당시 귀비는 영귀비뿐이었고, 향비는 귀비가 된 적이 없다. 그럼에도 홍대용은 갑자기 황후가 자포자기하며 머리를 자르는 극단적인 행동을 함으로써 스스로 황후자리를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 것을 굳이 향비..
이 드라마는 완결나기를 은근히 기다리고 있었다. 요즘 본 드라마는 대개 중간에서 시청을 포기하기가 일쑤였기에 큰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드라마에서 풍기는 느낌과 제목의 언발란스, 멜로인가 싶은 제목과, 느와르풍의 미스테리극이라는 장르의 엇박자가 살짝 호기심을 끌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나인우'배우가 주인공이라 보고 싶었다는 것이 가장 정답일 것이다. 내 기준, 가장 매력적인 피지컬에 비주얼이 빛나는 요즘 젊은 배우중 내 취향이기 때문. 눈이 즐거운 것이 어디인가? 게다가 그로테스크한 걸로 따지면 빠지지 않는 이규한배우, 더불어 '권율'이라면 기대할 만 하다. 참고로 내가 권율배우를 처음 본 것은 '브레인'에서이다. 그때 참으로 청초하게 생긴 배우였다. 이제 나이가 들었지만, 연기력은 그에 ..
요즘 후궁견환과 연희공략을 번갈아 보고 있다보니 오늘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극이라는 장르의 한계 탓인지 아니면 정말 그 시대 후궁들을 비롯한 궁중 사람들의 삶이 그러했던 것인지, 그들의 삶에는 알맹이가 없다. 황후를 비롯한 후궁들의 삶은 대개 비슷하다. 황제의 사랑을 갈구하던, 권세를 탐하던, 아니면 그 둘 다를 탐하던 욕망을 추구하거나, 목숨의 유지를 추구하거나 둘 중 하나이다. 하지만 뭘 원하던 그들의 말로는 비슷하다. 허공을 움켜지며 덧없이 사라지는 것...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권세에 목을 매던 사람치고 곱게 죽은 사람이 없다. 대개는 역사에 그 이름을 추하게 남기는 것으로 막을 내린다. 사랑을 추구하고, 사랑에 목을 맨 후궁들도 역시 불행한 종말을 맞지 않은 여인도 없다. 후궁견환전의..
사극이라는 장르가 가능한 것은, 실존 인물을 다루지만,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건 오로지 '결말'이기 때문이 아닐지. 과정에 대해선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인간사라는 게 역사속 인물이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나 그렇게 단순하진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인과 관계로 인하여 그러한 결과가 나오는지 역사속 인물의 경우엔 실제로는 알 길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단순하게 기록된 몇 줄의 사실, 그리고 입으로 전해지는 몇 가지 야사들, 그것만으로 복잡한 인간사, 그것도 궁중사를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연희공략을 이번에 다시 정주행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극중 인물들은 모두 실존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드라마와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즉, 실존 인물을 가지고 만든 픽션인 것이다. 그렇..
여름만 되면 내가 목에서 손가락이 튀어나올 정도로 기다리는 것이 바로 '태풍'이다. 물론, 나야 태풍 안전지대에 살고 있으니 이런 몰매맞을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한반도를 관통하는 그런 태풍은 사절이지만, 어떻든 일본이던, 중국이던, 해안이던 태풍 한 귀퉁이에 걸쳐만 있어도 엄청난 비가 쏟아진다. 94년의 그 기록적인 더위도 태풍이 오면서 사흘 동안 비가 퍼부으면서 전국민을 괴롭히던 찜찔방에서 해방시켜주었었다. 대개의 여름 더위는 태풍이나 큰 비와 함께 사라지고, 가을 비스무리한 분위기를 바람 속에 풍기에 된다. 여름 햇볕은 따사롭고, 그 안에는 서늘한 바람에 불어서 여름의 피로를 달래주는 것이다. 이번 태풍은 워낙에 겁을 주길래 별볼일 없겠다 싶긴 했었다. 나라에서 호들갑떠는 일치고 실제로 그렇..
목요일이다. 목요일은 내게 중요한 날이다. 어느 순간부터 갑자기 중요해졌다. 주말이 시작될 거라는 걸 알려주는 요일이기 때문이다. 주말이 나와 뭔 상관이 있어서가 아니고, 주말을 기다리기 때문도 아니고, 그저 한 주가 끝났음을 알려준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어제가 월요일이었는데 오늘이 목요일이라고 누군가 뒤뜸해주는 기분이라 목요일은 늘 묘한 느낌을 준다. 세월의 빠름을 느끼게 해주는 바로미터가 목요일이다. 그리하여 언젠가부터 난 목요일만 되면 이렇게 생각한다. '어제 월요일이었는데, 오늘 목요일이라고?' 그렇게 언젠가부터 내게 요일은 월요일과 목요일만 존재한다. 나머지는 그냥 스쳐가는 시간이다. 월요일이나 목요일에 특별한 일을 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난 매일 매일 하던 짓을 반복할 뿐이다. 새로운 건 ..
오늘 난 일찍 일어난 편이다. 그리고 오늘은 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했다. 아니, 실망하는 한편 안심도 했다. 실망한 이유는, 어차피 습도가 높을 바엔 비가 오는 편이 낫고, 비가 오면 오늘 소피 산책을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고, 엄마는 침을 맞고 싶어하니까. 비가 오면 침을 오늘도 맞을 수 없으니까. 피아노 치는 시간이 전처럼 즐겁지 않은 것은, 내 몸이 늘 피곤하기 때문이고, 피아노방이 너무 더워서이다.에어컨을 틀어도 거기는 여전히 덥다. 하지만 난 그 방이 좋다.내 방으로 바꾸고 싶다. 조용하고,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방이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나무로 된 방이고, 큰방과 주방 사이에 끼어 있는 방임에도 크기는 만만치 않기 때문에 충분히 내 살림들이 들어갈 것이다. 침대와 티비와 컴퓨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