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숙빈 최씨'의 고자질이 '장씨'를 죽였다?? 본문
일설에 의하면,
영조를 일생 괴롭힌 최숙빈의 '무수리'썰과
'아버지가 숙종이 아니다'썰,
언제부터 시작된 썰인지 알 길은 없지만
최씨는
'희빈 장씨의 죽음 이후에 내쳐졌다'
이유는
'인현왕후의 죽음이 장씨의 저주 탓이라는 고자질을 하여 왕으로 하여금
장씨를 죽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가 요점이다.
이런 소문은 당대부터 있어 왔다.
각종 신빙성 없음에도 집요한 구설들은
연잉군과 숙빈 세력을 증오하던 소론이 의도적으로 퍼뜨린 소문이라고도 한다.
설마...라고 생각하긴 했다.
저런 소문이 당대에 퍼지다니,
왕가를 모욕하는 대역죄가 아닌가??
그런데 내버려뒀다고??
하지만 다시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 영향력 있는 사람이 대놓고 말했다면,
대역죄로 죽여버리면 그만이지만,
은은하게 대중 속으로 퍼뜨리면 여론의 힘으로 형성된다.
인현왕후를 위한 '사씨남정기'같은 것이 그러하다.
누가 뭐라고 하면
'소설인데 어쩌라구!'
라고 하면 그만이다.
아무튼 무려 수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최무수리'라고 불리고,
'숙종이 아들이 아니라며?'라고 갸우뚱하고,
숙종은
숙빈의 '고자질을 핑계로 희빈을 죽인 다음 숙빈까지 내쳤다'
라는 글들이 여러 블로그에 어엿한 사실인 듯, 써놓은 게 사실이며,
어디서나 영조는 '무수리'아들로 낙인찍혀있다.
가끔씩, 상식적으로 무수리가 왕의 승은을 입는 것이
무리라고 생각하며 갸우뚱하는 사람들,
말하자면 나같은 사람들,
조선조가 어떤 시대인지 대충 알기만 해도 무수리가 왕의 눈에 드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눈에 뜨일 수가 없다는 것,
꼬시고 싶어도 근처에 어른거리는 것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
왕이란 작자가 다니는 길에 꿇어앉을 수 조차 없는 신분이라는 것을
잘 알 것이다.
왕은 혼자 궐 내를 맘껏 돌아다닐 수 없는 신분이며
행여 자식이 생길 염려가 있기에
절대로 천한 여자에게 손을 대지 않으며
설사 댄다 해도,후궁 첩지는 내리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고 밖에는 볼 수가 없다.
일설대로,
최숙빈이 서인측의 '기획상품'이었다면,서인이 미치지 않고서야
많고 많은 여인 중에 일개 무수리를 내세울 리가??
장옥정에 맞서는 기획상품이 시작부터 그렇게 기울어서야
사대부 정신 투철한 오만한 서인들이 그런 신분의 여자를
왜 기획상품으로 숙종 앞에 보란 듯내놨을까?
이렇듯 여러가지 면에서난 무수리썰을 일축하는 편이다.
고종 시대에
실은 '침방 나인'출신이었다는 썰이 나온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럴 리가 없다고
재빨리 부인하는데,
영조가 어미의 출신 때문에 그토록 고통받았을 리가 없었다는 것이 이유이다.
그런데 대체 언제 영조가 그토록 어미의 출신 때문에 고통 받았다는 걸까?
그런 기록이 실록에 있던가?
혹은 '한중록'에 최씨가 무수리였다는 한 귀절이라도 있었던가?
솔직히 기억은 나지 않는다.
단지, 이런 가정을 세워볼 수 있다.
만에 하나,
정말 영조가 어미의 출신 때문에 열등감을 느꼈다면,
그는 역대 왕 중에서 유일하게 확실하게 '후궁' 출신의 아들이었으며,
그것만으로도 열등감을 느끼기엔 충분했다.
또한 왕이 임명한 당당한 '왕세제'가 아니라
노론 세력이 어거지로 경종을 협박하다시피 해서 만든 정통성이라곤 쥐뿔도 없는
명분 약한 '왕세제'였다는 점,
게다가 일생을 경종의 '독살자'라는 혐의를 벗지 못했으니
정신적 스트레스가 가히 어땠을지?
왕은 정통성이 전부이다.
숙종이 그토록 당당할 수 있었던 이유가 오로지 당당한 '정통성' 때문이었다는 점에서,
경종이 기죽어 지낸 이유가,
어미가 '죄인'으로 자진했다는 이유였고,
영조는 어거지 '왕세제'였다는 점에서
모두 명분이 매우 약했고, 정통성은 희박했다.
아무튼,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최숙빈에 대해선
모든 면에서 스물스물 온갖 종류의 불리하고도 악의적인 손길이 느껴진다.
거기에, 실록이나 1차 기록 따위는 완전히 무시된다.
'숙빈은 42세에 아들과 함께 창의궁으로 나가 병을 치유하도록 명 받았으나
그 와중에도, 병 중에 있던 왕을 시중들기 위해 가끔 입궁했으며,
49세에 별세했다.'
가 기록으로 남은 것이다.
또한 숙빈은 인원왕후를 극진히 모셨으며,
영빈 김씨와 친하게 지냈다는 기록도 있다.
인원왕후가 들어오기도 전에 쫓겨났다면 인원왕후를 극진히 모실 수 없었을 것이다.
또한 출신으로 따지면 역대 후궁 중 최고였다는 어마무시한 영빈 김씨가
무수리 출신에 세자의 생모도 아닌
숙빈과 친하게 지낼 리가??
조선은 엄격한 신분 사회이다.
같은 후궁이라도 신분에 따라 지위와 상관없이 개무시 때릴 수 있었고,
왕은 아무리 총애해도, 신분 낮은 여자에겐 함부로 손대지 않았다.
설사 대었다 한들, 그 어미를 언감생심 빈으로까지 만들 수가 없었다.
그럼 본격적으로 의문들을 얘기해보자.그리고 그 의문엔 답도 나와 있다.
다름 아닌 실록에 말이다.
실록의 기록 중에서 절대로 무시되지 않으면서 교묘하게
최씨를
악랄한 고자질생이로 만들어, 희빈을 죽게 만든 원흉으로, 그리하여
다음 왕비자리를 노린 여인으로 손가락질 하고,
그러나 그 결과.희빈이 죽기가 무섭게 궁에서 쫓겨난 여자로
아주 낙인이 찍히다 시피 한 귀절이 있다.
뭐 실록을 고대로 복사해서 붙이기 귀찮으니 대충 내 식으로 써보자.
'인현왕후가 죽고 난 후에, 숙빈은 통곡하는 심정으로 장씨가 후를 저주했다
고 왕에게 은밀하게 고했다고 한다.'
라는 식으로 적혀 있었다.
저 한 줄의 기록에서 파생된 사람들의 입방이는 꽤 요란하다.
첫째로,
인현왕후가 죽고나면 다시 중전이 될 위험이 다분한 희빈을 죽임으로써,
자신과 아들의 안전을 도모했다.
뭐 이건 당연한 일이다.장씨는 결코 최씨와 연잉군을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둘째로,
감히 최씨는 희빈을 죽게 함으로써
자신이 왕비가 될지도 모른다는 허황된 꿈을 꾸었기에
숙종은 그 꿈을 짓밟기 위해
' 후궁으로 하여금 중궁이 되는 것을 이후로 금하며, 이를 누구도 바꿀 수 없다!!'
라고 못박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최씨가 감히 자신이 왕비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 여자 생각은 알 수 없지만,
다른 사람들에겐 적용되지 않는 엉뚱한 상상력,
그것도 비웃음 담긴 상상력이 유독 최씨에겐 허용된다.
역사는 팩트에 기반을 두고, 그 진실은 누구도 알 수 없으며,
어떤 사건 이후의 모든 결과는 팩트를 기반으로
야사와 이런저런 입방아가 섞인 상상력의 영역이다.
하지만, 이 사건 만큼은 상상력이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이
참으로 명확하게 모든 것이 실록에,
그것도 왕의 옥음이 생생하게 들릴 정도로 자세하게 나와 있다.
왜 숙종이 세자의 생모이자, 한때 국모였던 여인을 죽였는가!!
첫째로,
숙종은 '인현왕후'를 사랑한 적은 없으되,
그녀를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있었다.
경솔하게 내치고 냉혹하게 돌보지 않아 깊이 병든 여인은
복위하였으되, 이미 중궁으로서의 위엄을 되찾을 길은 없었다.
아직도 남인의 세상이었고, 그녀는 극성스러운 여염집 여편네가 아니라
고상한 양반가의 여인이었고,
돌아오기가 무섭게 병마에 시달리다가 복위 7년 만에 승하하는데,
그녀가 앓은 병은 말로 듣기만 해도 끔찍스러워
그 고통을 가히 짐작조차 하기 힘들다.
그렇게 병석에 누워서 투병을 시작하는데,
좋아졌다 악화되었다를 반복하는 과정이
실록에 일일히 기록되어 있다.
장씨가 생각한 것은 무엇일까?
'저 여자가 죽으면 난 다시 콤백홈이다'였을 것이다.
그것은, 온 궁궐이 다 알고 있었으니,
당연히 숙종도 알고 있었으리라.
내심 은근히 쫄아 있었을지도??
둘째로,
이 역시 숙종이 직접 입으로 한 말이다.(혹은 비망기??)
'장씨는 방자하기 이를 데 없어,
후가 복위한 후에도 7년 동안
한 번도 문안하지 않았으며,
중궁전이라고 칭하지 않고. '민녀' 혹은 '민씨'라고 일컬는 대역을 저질렀다.'
이 문제는, 왕비는 내명부의 왕으로써,
감히 후궁 따위는 넘볼 수 없는 절대적 존재이며,
내명부 문제는 왕도 참견할 수 없는 내전의 절대 권력자였다.
그러나 복위한 왕후가 저렇게 병마에 시달리며 빌빌거리니
권력은 커녕, 온 궁궐이 오히려 후가 죽은 뒤를 생각하여
더더욱 장씨에게 충성을 다 하는, 최소한 눈 밖에 나지 않으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면서,
궁 안의 실세는 장씨로써
'대개 중궁전 근처에는 감히 아무나 드나들 수 없음에도
장씨의 궁녀들은 거리낌없이 드나들며,
심지어는 병세를 알기 위해 장지문에 구멍을 뚫고 들여다보기까지 하였다.
과인(그니까 숙종)도 이를 알고 있었고, 몇 번 보기도 했는데,몹시 분했지만 차마 모른 체 하고 있었다.
그 무례함은 절대 용서할 수 없다'
며, 일단 장씨의 중전 복귀에 찬물을 끼얹는다.
법도로 버티는 궁궐에서 저런 행각을 벌였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고,
그런 일을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장씨의 성정에 대한 두려움이 느껴진다.
그녀가 다시 왕비로서의 지위를 회복한 후의 후폭풍이 어떠할 지 걱정이 가득하다.
세째로,
실제로 장씨는 취선당에 신당을 차리고 무당을 불러 굿을 벌였다.
하지만 장씨는 그것을 아들의 건강 때문이었다고 변명했다.
그럴수도 있는 일이라 이건 팩트는 '굿을 했다' 이지만,
그 이유는, 즉 진실은 알 수가 없다.
숙종으로서는 '저주굿'은 좋은 명분이었을 뿐,그 내막이 중요한 것은 아닐 것이다.
물론 병환 중의 왕비를 저주하는 건 대역이다.
그러나, 그 굿이 왕비를 저주한 굿이라는 증거를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통명전이나 경춘전 언저리에서 요사스런 물건들이 나왔다고
실록은 적고 있으나, 대개 이 저주 사건을 두고 역사학자들은 근거가 부족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실록을 보면,
무당과,취선당 궁녀들과, 장희재의 첩과 그 일당들을
인정전에서 왕이 직접 문초하는 데그 과정은 정말 길고 지루하기 그지 없다.
그들은 대체적으로 혐의를 인정하고 있다.물론, 처참하게 죽음을 당하는 것으로 그 기나긴 문초는 막을 내린다.
하지만 장씨는 좀 다르다.
어쩔 수 없이 복위를 시키긴 해야하는데,(세자의 어미이니)
그러기 싫은 차에 빌미를 주었으니
그녀의 여러가지 방자한 언행과 실덕을 이유삼아
'자진 명령'을 내린 것이지
저주 사건으로 그런 명령을 내린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세자의 어미가 죽는다면, 세자의 앞 날은 매우 암담해지는고로,
서인들조차 반대했을 정도이다.
이 '세자'라는 자리는 참 골치 아픈 자리인지라
섣불리 책봉해버리면
바꿀수도 없고, 행여 바꿔도 문제, 죽여도 문제, 그냥 놔둬도 문제가 되는
정말 첨예한 정치적 환란의 근원이 되는 일이었다.
그런 세자자리를 기분내키는대로 정해놓고는,
그 어미의 인성과, 세자의 그릇이 맘에 안들어 맘고생하는
숙종의 경솔함이라니!!
어찌 되었든, 왕은 당장 정국을 뒤집어버린다.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남인은 초토화되고,
장씨 세력들은 모조리 아작난다.
그런데,
숙종이 장씨를 죽인 이유가 숙빈의 고변을 명분 삼았을 뿐,
애초에 제거할 생각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다.
앞서 내가 쓴 글과 같은 이유에서 그는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세자라는 어마어마한 뒷배를 업고 있는 장씨를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고자 했던 것이다.
'내가 그를 미워하여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가 심히 걱정되어
눈물을 머금고 자진을 명하는 것이다'
라는 식으로 숙종은, 세자의 어미를 죽이려는 어마어마한 사건에
경악한 신하들에게 우겨댄다.
후에 사람들은,숙종은 희빈을 죽인 후에 후회하여
숙빈을 내쳤고,그 증거가 명당 자리를 찾도록 하여
왕비에 준하는 거창한 장례를 치러줬으며,그 자리엔 세자가 참여하게 하였다는 증거를 드는데,
장차 왕이 될 세자의 면을 세워주기 위해서였을 뿐,
장씨에겐 전혀 미련이 없었다고 생각되며,(이건 내 생각)
그 일로 숙빈을 내치긴 커녕
곧바로 이현궁을 어마어마한 구조로 수리하여 하사하기까지 했다.(이건 실록)
이때가 1702년~1703년 사이였다.
쫓아낼 후궁에게 그토록 어마무시한 크기에 화려의 극치를 다한
궁을 하사할리가??
숙종이 평생 미워했다는 영빈 김씨에겐
너무나 초라한 집을 주는 바람에
후에 경종이 새로이 집을 구해주었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로
그는 미워하는 자에게 잘해줄 만큼 인심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이쁘지 않은 후궁에게 심혈을 기울인데다
유례없이 크고 화려한 '이현궁'을 하사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적어도 그녀에 대한 총애는 당시까지 전혀 변함이 없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총애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쫓는 법도 없다.
일단 입궁한 후궁은,
병이 나거나, 왕이 죽기 전까진 궐 안에 머무는 것이 관례였던 것 같다.
영빈 김씨처럼 미움받은 후궁조차 왕이 죽은 후에야 궁에서 나갔다.
결론적으로
장씨를 죽인 이유는, 숙빈의 고변 따위로 가벼이 움직인 것이 아니었으며,
숙종 나름으로 인현왕후 사후의 장씨 처분에 잽싸게 이용한
고도의 정치적 판단이었을 뿐이다.
자진명령을 내리긴 했으되,
그 이유를 자기 입으로 직접 떠들어
실록에 어엿하게 실려 있음에도
숙빈은 그 날 이후로 지금까지도 의도적으로 희빈을 참언하여 죽게한
'앙큼한 고자질쟁이'로 낙인이 찍혀 있다.
내가 숙빈이라면 억울해서 무덤에서 벌떡 일어날 것 같다.
그녀에 관한 것이라면 모든 것이
억측이요,부정적이며, 뭔지 모르게 악의에 차 있는 이유가
난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떻든, 숙종은 죽음이 가까와오자, 인현왕후와의 합장을 원했는데,
이건 내 상상이지만,
아마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자신이 모질게 대한 인현왕후에 대한 회환이 컸던 것 같다.
명문대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명색이 한 나라의 왕후였음에도,
자신의 판단 미쓰와 변덕으로 이리저리 끌려다니면서 개고생하다가
한 점 혈육 없이 비명횡사와 다를 바 없이 비참하게 죽었으니
얼마나 불쌍한가?
그 여자는, 착한 여자니 생각보다 나쁜 여자였다느니
하는 식으로 단순하게 평가할 것이 아니라,
역대 어느 왕비보다 불쌍하고 비참한 여인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숙종도 그녀와의 합장을 원했을 것이다.
이건 여담이지만,여전히 숙빈을 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인경왕후를 비롯한 인형왕후, 그리고 장희빈까지 서오릉에 함께 묻혔지만,
숙빈만 멀리 떨어진 서삼릉에 묻혔다고 비웃는다.
그런데,그 사람들은
희빈의 첫 묘소가 서오능이 아니었다는 것도 모르는가?
오히려 서삼능은 서오능과 거리상으로 그리 멀지 않다.당시만 해도 그러했다.
오히려 희빈은 명당이랍시고 광주쪽 어딘가에 묻혔다가
이장을 거듭했고, 마침내는 마땅한 자리를 찾지 못해
서오능 한 귀퉁이로 이장하여, 왕의 생모로서의 위용을 전혀 갖추지 못한
허름한 '대빈묘'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모놀로그 > 작품과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드라마 '사랑과 야망,그리고 사랑과 진실'캐릭터들 (2) | 2023.06.02 |
---|---|
'헤어질 결심' (1) | 2023.05.22 |
숙종조의 여인들의 운명의 실타래 주범은 '숙종' (14) | 2023.04.26 |
'숙빈 최씨'에 대한 의문(1) (6) | 2023.04.25 |
더 글로리-결핍과 구원,동은오적과 여정,그 서사詩 (0) | 2023.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