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숙빈 최씨'에 대한 의문(1) 본문
조선조의 왕가엔 여러가지 미스테리가 숨어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뭔가 앞 뒤가 맞지 않거나, 어두컴컴한 구석이 있거나, 음흉한 검은 손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사건들이 은근히 많지만,
가장 상상력을 자극하는 건 역시 숙종조의 여러 사건들이다.
그리고 가장 내 관심을 끌어내고 상상력과 사실, 그리고 그 사실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이 무얼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인물이
내겐 '숙빈 최씨'라는 인물이다.
그녀를 에워싼 온갖 서사는 앞뒤가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그녀에 대한 평가는 전혀 상반되는 두 가지가 동시에 회자된다.
첫째론, 그녀는 매우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했으며,
인현왕후는 물론, 후비로 들어온 인원왕후까지 극진하게 모셨다고 한다.
둘째론,
숙종이 농담삼아 왕비로 삼겠다고 했더니
눈 속에서 석고대죄를 했다는 것이다.
세째론,
전반적으로 전혀 정치적인 배경이 있을리가 없음에도,이상하게도 가장 정치적인 내음이 물씬 풍기는 여인이다.
그건, 그녀가 다른 사람 아닌,인현왕후와 가장 밀접한 여인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하다못해 전설적인 숙종과의 첫만남이
인현왕후 생일상 운운, 눈물 운운, 그리고 이어지는 승은 운운이다.
그런데, 난 그것을 믿을 수 없다.
네쩨론
아무런 증거도 없는 데 그녀를 따라다니는 두 가지 불명예,
'무수리'출신이라고 아주 확신하는 사람들의 편견과,
장씨가 죽자마자 곧바로 궁에서 내쳐졌다는 실록에도, 그 어떤 기록에도 없는 것이
완전히 정설로 굳어져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웬지 사람들은 그 두 가지 사건을
아무런 증거도 근거도 기록도 없는 가운데 굳게 믿고 있으며,그걸 아주 당당하게 피력한다.
그럴 때마다, 난 최씨에 대한 멸시와 악의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구나, 하는 점과,
그런데 왜??라는 의문도 느낀다.
그리하여, 숙종이 그녀를 위해 해준 일들은 모조리 무시된다.
즉, 잉태도 하기 전에 대뜸 첩지부터 받은 점,
여기서 덧붙이자면, 후궁 첩지를 아무 공도 세우지 않고 받은 인물은
희빈 장씨 뿐이다.승은을 입었다고해서 무조건 후궁첩지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키포인트!!
처소는 선정전 근처의 '보경당'이라는 유서깊은 전각이었다는 것,
아들을 내리 '셋'을 낳았을 정도의 총애를 받았으며,
장씨가 자진한 후에는
장장 3년에 걸쳐 '이현궁'이라는 어마어마한 저택을 공사하여
숙빈에게 하사했다는 점이다.
하사했다고 했지,
그곳으로 쫓겨났다는 기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영조가 사랑하는 화평옹주나 화완옹주 역시 출가한 후에 '궁'을 하사하고도
허구헌 날 궁에 불러서 자기 곁에 두려고 한 예도 있다.
후궁은 어차피 언젠간 궁을 나가야 하는데 ,숙빈에게 하사한 이현궁은 당시에도 유명한 궁이었지만
숙종은 그 크기를 넓히기 위해 주변의 집들을 모조리 허물었으며,그 공사의 크기 또한 대단해서 신하들이 항의할 정도였다.
후에 도로 빼앗고, 대신 연잉군에게 내어준 '창의궁'에서 아들과 말년을 함께 하도록 하였다.물론 그땐 총애는 잃었을 것이나, 숙빈 나이는 물론, 숙종도 죽을 나이가 가까왔으니총애는 개뿔이었을 시절이다.
결론적으로, 장씨가 죽은 후에 총애가 식긴 커녕, 오히려 5년 정도는 계속된 흔적은 기록에 남아 있을 정도라는 점이다.
만일 그녀가 미움받아 쫓겨났다면,연잉군이 19세까지 궁에 머물수도 없었을 것이며,인원왕후를 극진하게 모시거나,영빈 김씨와 가까이 지낼 겨를도 없었으리라.
그녀는 마지막까지 기댈 곳 없는 '연잉군'을 위해 여기저기 굽신거리며 비위 맞추다가 죽었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돈에 환장한 여자였다는 점이다.
그것 역시, 가진 건 아무것도 없는 후궁 출신의 아들, 그러나
왕이 될 가능성이 상당히 높았던 영조의 뒷배를 위해
기를 쓰고 재물을 모았을 가능성이 크다.
뭐 별별 짓을 다해서 재물을 아득바득 모았다고 한다.
그런데 숙종은 그것을 오히려 뒤에서 도왔다는...
조선조의 궁중 법도를 안다면,왕이 무수리와 마주칠 확률,
게다가 승은까지 입을 확율은
마이너스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또한
그녀가 그토록 미천한 태생이었다면,
왜 굳이 서인들이 장씨와 대적할 인물로 그녀를 밀었을까 하는 점이다.
조선조의 사대부들은 천민 출신의 후궁 따위는 인정조차 하지 않을 정도였다.
후궁의 아들이 왕이 되도 뒤로는 천한 후궁의 아들이라고 손가락질 할 정도였다.
(하지만 적어도 경종까진 후궁 출신 왕은 없었다.
경종 역시 어떻든 중전 장씨 소생이었다.)
나라의 주인이 왕이 아니라 '사대부'라고 굳게 믿을 정도로 건방진 작자들이었다.
그토록 콧대 높고, 잘난 체하는 서인 꼴통 꼰대들이 왜,
최씨가 낳은 연잉군을 옹호하며,장씨의 아들인 경종을 배쳑했을까 하는 점이다.
물론, 경종은 그들의 철천지 웬수인 남인 세력을 뒤에 업고 있었고,
이후엔 소론의 지지를 받았다.
하지만 서인이 그토록 경멸하는 천민 출신 어미를 가진 '연잉군'과 '숙빈'을 밀어준 이유가
정말이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다.
뭐 천한 건 연잉군이나 경종이나 도낀개낀이니 기왕이면
인현왕후와 가까운 최씨를 밀어보자 싶었던 건가??
그럼 다른 얘길 좀 해보자.
첫째로,
그녀는 대체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뭐 조선조의 승은 후궁들은 그 기록이 남아 있는 경우는 사실 별로 없다고 본다.
왜냐면 간택 후궁들은 대개가 명문 대가의 규수들이었지만,
그래서 양반가의 내노라하는 족보를 자랑하지만,
승은후궁들은 궁녀 출신이며,
조선조의 궁녀들은 천민 출신이 대부분이었다고 들었다.
출신과는 무관하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밀 나인이 아니라면, 승은 후궁이 될 가망성은 제로였다는 점이다.
중궁전이나, 대비전, 등등 적어도 왕이 거둥을 할 만한 장소, 그것도
궁중 깊숙한 곳에서 자주 마주칠 수 있는 나인이 아니라면,
승은을 입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지밀나인이 되는 것이 궁녀들의 꿈이었다는 전설이...
왕이 움직임이야 뻔하다.
편전, 아니면 내전이다.
가끔 산책을 해도 온갖 궁녀와 상궁과 내시에 들러싸여
웬만한 사람은 접근도 못한다.
감히 용안을 바라볼 수조차 없는 게 당시의 왕이었다.
수많은 조선조의 승은 후궁 중에
이름을 남긴 후궁이랬자,
연산군의 후궁인 '장녹수'라는 여인과
정조의 '의빈 성씨' 와
영조의 '영빈 이씨' , 숙의 '문씨'
인조의 '소용 조씨'
기타 파란만장하게 살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몇몇 여인이 전부이다.
대개가 못되게 굴다가 비참하게 죽은 권력욕 강한 여인네들이다.
성종의 후궁 몇 명은 연산군의 횡포 속에 비명으로 가버린 바람에 알려졌을 뿐이다.
왕의 후궁이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지
나도 뒤늦게 알고 놀랐을 정도이다.
그들은 왕이 죽거나 하면 궁에 머물 수가 없었고,
궁에서 죽을 수도 없었고,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도 존대를 하였다.
말이 후궁이지,실제로의 지위는 여전히 밑바닥이었던 것이다.
정1품 '빈'의 지위라해도 자신의 자식은 왕비의 아이였을 뿐이고,
설사 자신의 아이가 왕의 지위에 올라도
감히 어미 행세를 하지 못했다.
왕이 승하하면 쫓겨났고, 대비는 물론, 적모인 중전이 되었다.
그렇게 역사 속으로 이름없이 사라지고 잊혀지고, 무덤조차 별볼일 없이 관리되는
수많은 후궁들 속에서 실록에 이름을 올리고, 이후로도 내내 언급되는 숙빈 최씨.
지금까지도 '천한 무수리'출신의 왕의 모친이라고 손가락질 받는가 하면,
그녀에 관해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기록은 모조리 거짓이라고 무시하며 깍아내림을
당하는 숙빈 최씨,
하지만 실록에 기록된 바로는 숙종에게 유난스런 대접을 받았던 숙빈,
대체 그녀는 누구일까?
'모놀로그 > 작품과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숙빈 최씨'의 고자질이 '장씨'를 죽였다?? (3) | 2023.05.03 |
---|---|
숙종조의 여인들의 운명의 실타래 주범은 '숙종' (14) | 2023.04.26 |
더 글로리-결핍과 구원,동은오적과 여정,그 서사詩 (0) | 2023.03.14 |
소현세자 죽음 관련 승정원일기의 새로운 사실들 (0) | 2023.03.08 |
영화 '올빼미'를 보고 주절주절 (0) | 2023.02.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