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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놀로그
조선조의 왕가엔 여러가지 미스테리가 숨어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다. 뭔가 앞 뒤가 맞지 않거나, 어두컴컴한 구석이 있거나, 음흉한 검은 손의 움직임이 느껴지는 사건들이 은근히 많지만, 가장 상상력을 자극하는 건 역시 숙종조의 여러 사건들이다. 그리고 가장 내 관심을 끌어내고 상상력과 사실, 그리고 그 사실 속에 숨어 있는 진실이 무얼까 궁금증을 자아내는 인물이 내겐 '숙빈 최씨'라는 인물이다. 그녀를 에워싼 온갖 서사는 앞뒤가 맞는 것이 하나도 없다. 예를 들어, 그녀에 대한 평가는 전혀 상반되는 두 가지가 동시에 회자된다. 첫째론, 그녀는 매우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처신했으며, 인현왕후는 물론, 후비로 들어온 인원왕후까지 극진하게 모셨다고 한다. 둘째론, 숙종이 농담삼아 왕비로 삼겠다고 했더니 눈 ..
더글로리 part 2를 눈 빠지게 기다렸던 대다수의 사람처럼, 나도 금요일 5시가 되기만을 고대했다. 복수극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파트 2는, 상대적으로 시적이고 단정한 느낌의 파트 1보단 난잡하다. 왜냐면, 겉만 번지르르하고 속은 썩어 문드러졌던 5인이, 자신이 살아오던 방식의 편의주의적 추악함을 최대치로 그 힘이 발현하면서 스스로 무너지고, 무너질 땐 상대방의 멱살을 쥐고 같이 나락으로 떨어지기 때문이다. 젊고, 아름답고, 부유하고 남보기엔 부러울 것이 없지만, 그들의 그런 점이 그들의 맹점이었다. 그들은 노력하지 않고, 그들은 사랑을 모르는 황폐한 영혼들이며, 욕망과 그것을 채우는 것에 아무런 장애가 없는, 이렇듯 사는 것이 고달픈 이 시대에, 쓸데없는 경제적 풍요함에 동떨어져서 갈 곳을 잃다 보..
역사학도도 아니고, 지극히 무식하지만, 다소는 그런 쪽으로 관심이 있어 이것 저것 들추어 집적거리며 뭔가 진실인가를 나름 알아보려던 나의 지극히 개인적 견해에 의하면, 실록이나 승정원일기가 역사적으로 미묘한 사건의 진상을 밝혀줄 거란 생각은 순진한 것이다. 그 시절의 기록이란 왕과 그의 대신들 위주의 공식적 자리에서 벌어진 사건이나 발언, 떠들썩한 세간의 사건을 문초하는 지루한 과정과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사람들의 변명, 혹은 자신의 변호, 날씨, 천재지변, 기타 등등 앞서 말했듯이 '팩트'라고 할 만한 것들이 단조롭게 기록되어 있다. 그것도 그저 공간과 시간의 배경이 궁으로 한정되어 있을 뿐이라 시대의 흐름과는 동떨어진 느낌이다. 소현세자 사건이 재조명될 만한 사실들이 승정원일기에서 발견되었다고 호들갑을..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을 다룬 영화이다. 그동안의 정설대로 이형익이라는 침의에게 독침을 맞고 죽었으며, 그 배후는 인조라는 '썰'이 그동안 가장 유력했다면, 바로 그 '썰'이 썰이 아니라 그 죽음의 실체라고 목격자까지 내세워 아주 대못을 박는 영화이다. 주인공은 장님이라는 이유로 이형익에게 발탁되는데 실력은 있지만 요즘 말로 하면 일개 동네 의원을 대통령 주치의가 자기 조수로 발탁하는 것이니, 그 의도가 심히 의심스럽다. 왜냐면 주인공은 침술은 뛰어나지만 장님이기 때문이다. 이미 설계가 끝난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굳이 선발한 조수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마침내, 거사를 치루는 날, 이형익은 독침을 놓다가 어둠 속에서 그 침을 떨어뜨리고, 그 독침을 줍는 것이 바로 장님이라고 믿었던 주인공이다. 그는 실은..
요즘 '드라마 철인왕후'를 보고 있다. 이 드라마를 처음 보는 건 아니다 몇 년 만인가, 별 부담 없으면서 재밌고 유쾌한 드라마가 보고 싶어서 내 방대한 드라마 목록 중에서 골랐는데, 전에 보았을 땐 발견하지 못한 여러 가지 매력이 새삼 눈에 띄는 바람에 유독 꽂혀서 정주행 뺑뺑이를 무한정 돌고 있다. 난 동영상을 틀어놓고는 대개는 다른 짓거리를 많이 하는 편이라 화면에 집중하지 않는다. 특히 재탕 드라마들일수록 그런 식의 시청법이 심하다. 드라마는, 그러나 영상이 중요하다. 대사보다, 아니 대사는 없지만 극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장면이 때때로 삽입된다. 처음 정주행할 때는 비교적 집중하지만 처음이라 놓치는 작은 장면이나, 그 장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은 두 번째 정주행이..
'뜨겁고 순수했던, 그래서 시리도록 그리운 그 시절, 들리는가! 들린다면 응답하라, 나의 90년 대여!' 나처럼 90년 대를 치열하게, 그리고 사랑과 젊음이 주는 참으로 행복한 고통과 고뇌 속에서 방황하면서 그게 얼마나 대단한 축복이자 행복인지 깨달으면서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이라면, 아마도 응사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저 담담한 나레이션에 눈시울을 붉히며 가슴을 부여잡은 사람들이 없지 않을 것이라고 본다. 나도 그랬다. 난 드라마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저 대사를 곱씹으며 가슴에 차오르는 그리움과,뭔지 모를 아픔에 시달렸다. 그것은 상실감이다. 두번 다시 오지 않을 아름다운 시절, 20세기의 마지막 해! 인간들이 아직은 그렇게까지 망가지지도 않고, 그렇게 냉소적이거나 그렇게 속물적이거나 그렇게 매몰차..
드라마 `더글로리'에서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어떤 카페에서였다. 그때 두 사람은 서로를 등지고 있다. 친구와 함께 떠드는 대화는 동은에겐 소음이었다. 피곤해서 눈을 감는다. 과도한 일상의 힘겨움과 각박한 영혼의 피폐함으로 지쳐있지만, 아무리 지겨워도 힘을 내야 하는 동은에게 다른 우주의 생명체 같은 일상적이고 해맑은 젊은이들의 장난기 어린 대화는 외계어이다. 그들은 서로 등지고 서 있었지만, 등이 닿을 정도로 거리는 가깝다. 그들은 곧 비슷한 처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응급실에서의 만남에서 드디어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동은과, 온통 피에 젖은 여정은 나란히 누워 마주 본다. 메마르고 지친 눈빛과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본다. 거기엔 자기와 똑같은 눈빛과 표정을 한 사람이 거울 속을 비춘 듯이 자기를 ..
1부 도입부는 동은이 드디어 세명시로 입성, 그건 모든 준비가 끝났음을 의미. 동은은 임용고시에 합격한 이후, 공립학교에서 경력을 쌓으며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그녀의 복수의 향방은 연진이 키를 쥐고 있다. 애초에 초등교사가 된 이유가 먹고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미래를 내다 보고 치밀하게 놓은 포석이다. 언젠가 연진이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그리하여 초등교에 입학하게 되기를 기다렸다. 그 기간은 거의 6년 이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연진의 결혼 소식을 들으면서 본격적으로 연진이 살고 있는 세명시의 초등교에 입성하기 위해 여러 가지 준비를 한다. 단지 세명초의 교사가 되기 위한 포석이 아니다. 이사장을 팠다는 것은 연진이 어떤 수단을 써도 자신을 쫓아낼 수 없는 단단한 백그라운드를 얻기 위해서였을 것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