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영화 '올빼미'를 보고 주절주절 본문
소현세자의 의문의 죽음을 다룬 영화이다.
그동안의 정설대로 이형익이라는 침의에게 독침을 맞고 죽었으며,
그 배후는 인조라는 '썰'이 그동안 가장 유력했다면,
바로 그 '썰'이 썰이 아니라 그 죽음의 실체라고 목격자까지 내세워 아주 대못을 박는 영화이다.
주인공은 장님이라는 이유로 이형익에게 발탁되는데
실력은 있지만 요즘 말로 하면
일개 동네 의원을 대통령 주치의가 자기 조수로 발탁하는 것이니,
그 의도가 심히 의심스럽다.
왜냐면 주인공은 침술은 뛰어나지만 장님이기 때문이다.
이미 설계가 끝난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굳이 선발한 조수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마침내, 거사를 치루는 날, 이형익은 독침을 놓다가
어둠 속에서 그 침을 떨어뜨리고,
그 독침을 줍는 것이 바로 장님이라고 믿었던 주인공이다.
그는 실은 완전 맹인은 아니었고,
뭐라 뭐라 하는 병인으로 낮엔 빛이 망막을 가리거나 뭐 그런 이유로 제대로 보지 못하지만,
오히려 어둠 속에선 어느 정도는 볼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소현세자 독살설은
유독 독살설 내지는 의문의 급사가 많았던 조선조의 몇몇 왕이나 세자의 독살설 중에서 유독 신빙성이 강하다.
직접 증거가 없기에 심증만 있을지라도,
여러 가지 정황으로 아버지에 의한 독살로 거의 굳어져 있다시피 한 특이한 예이다.
신기한 일이지만,인조는 워낙 한심한 왕이라 그런 건지,
암군이라고 공인된 왕이라 그런 건지,
영조처럼 대놓고 죽인 게 아니라 그런 건지,
소현세자 죽음으로 욕을 먹는 것은 별로 보지 못했다.
영조처럼
공공연하게 만인들 앞에서 죽이는 것과,
비공식적으로 은밀하게 죽이는 건 의미가 좀 다르다.
은밀하게 죽이면
백주 대낮에 의심할 여지없이 죽이는 것과 달라서
명확하게
'아버지가 아들을 죽였다!!' 고 떠들어댈 수가 없다.
또한, 사도세자 죽음 이후의 혼란이나
오랫동안 계속된 그 후유증과 그로 인한 분란이나 인명의 희생은 오히려 적었다.
소현세자의 직계 가족들 중,
주요 인물 빼고는 그 파장은 적은 편이다.
뒷말도 그렇게 나온 게 없다.
적어도 그로 인한 분란과 후유증으로 두고두고 말이 많았던
사도세자에 비하면 조용히 묻힌 감이 있다.
의심스러운 인물이 다름 아닌 '왕'이니 어쩌겠는가?
사도세자도 은밀하게 죽였으면 차라리 어땠을까 싶다.
그랬다면 정조는 효장세자의 양자가 아닌,
사도세자의 아들로 대를 이을 수 있었고,
'죄인의아들'이라는 트라우마와 손가락질도 받지 않았을 것이며,
그로 인해 족보가 심하게 꼬이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혜빈도 '한중록'에서 그렇게 직접적으로 통탄하며 외치고 있다.
사도세자는 죽기 직전에 학질을 심하게 앓았었다.
말년에 워낙 험한 생활을 하며 몸을 마구 굴리다가 병을 얻은 모양인데,
사경을 헤매다가 겨우 살아난 것이다.
그러자마자 곧바로 비참하기 그지없게 죽어버렸으니 대체 뭣 때문에 살아난 건지...??
더 비참하게, 더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죽음의 동반자로 삼으려고 살아난 건지??
그때 병으로 죽었다면 오히려 명예롭게 죽을 수 있었을 것이고,
그의 기행들은 슬쩍 묻힐 수 있었다.
다름 아닌, 생모가 아들을 대처분 하라고 직접 남편에게 권하는 비참한 일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고,
처자식들 또한 두고두고 그의 죽음으로 인한 갖가지 풍파를 평생 겪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혜빈은
'차라리 그때 그 병으로 돌아가셨다면 처자들과 일족의 지극망통 한 일은 없었을 것을!!'
이라고 외치는 것이리라.
병석에서 세자로서 죽는 것이, 죄인이 되어 만인의 눈앞에서,
폐서인 당한 꼴로 비참하게 열흘 가까이나 폭염 속에 갇힌 채로 서서히 죽어가는 것보단 나으니까.
그렇게 따지면 사도세자는 유례가 없이 불운한 인물임이 확실하다.
혜빈 또한, 정통성 있는 세자빈으로 지위를 유지하다가,
왕의 모친으로 당당히 대비가 되어
순조가 등극했을 때
'수렴청정`의 권리를 엉뚱하게도
정순왕후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혜빈으로서는
남편이 비참하게 죽었다는 사실보다,
아들이 효장세자의 양자가 돼버리는 바람에,
그 무렵엔 적장자가 좀처럼 태어나지 않아 정통성 문제로 시시비비가 끊이지 않던 시기에,
자신은 명문대가의 규수로 왕실로 시집와서 당당히 적장자를 낳기까지 한 세자빈이었음에도,
왕비는 고사하고, 아들을 앞서 보낸 것도 미칠 노릇인데,
대비도 못돼보고, 오히려 정순왕후에게 갖가지 수모를 당하며
뒷방에서 울고불고해야 했던 일과,
정순왕후와 앙숙이었던 친정이 도륙난 사실이 더욱더 통한스러운 일이었다.
한중록도 실은 '친정의 신원'을 위한 글이었으니...
아무튼,
영화 '올빼미'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그러나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던
소현세자 독살설에
어둠 속에서만 눈이 보이는 목격자를 내세워
인조의 명을 받은 이형익의 살해 현장을 목격하고 그 증거까지 획득하는 것으로,
상상의 영역을 넓힌다.
문제는 어디까지나 상상의 영역임에도 자칫하면 그것이 기정사실이라고 세뇌하는 우리나라 특유의 역사적 주요 사건의 진실을 왜곡하는 우를 범할 염려가 있다는 점이다.
그럴 수도 있다! 가 아니라,
그렇다!!라고 자신 있게 단정 짓는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사실, 나도 문득생각나서 소현세자 관련 기록을 좀 찾아보았다.
그 결과는 이러하다.
그동안은 인조에 의한 독살설이 매우 유력했었지만, 그것은 실록의 짧은 묘사 때문이었고,
(참고로 그 묘사를 보면 소현세자 임종 당시의 상황인데, 얼굴이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검은색으로 변했으며,
구멍이란 구멍으론 온통 피가 뿜어져 나왔다나 어쨌다나!!)
승정원일기가 번역된 오늘날엔 그 승정원일기에 실린 보다 자세한 당시의 정황을 볼 때
그 사실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되었다나 뭐라나!
하지만 '승정원일기'에 실렸다는 이른바 새로 밝혀진 '팩트'가 얼마나 신빙성 있는 '팩트'인지 의심스럽다.
내가 늘 주장하듯이,
팩트와 진실은 다르기 때문이다.
실록도, 승정원일기도 팩트의 기록일 뿐, 절대로 진실이라고 확언할 순 없기 때문이다.
진실은 기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속에,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 승정원일기에 의해 밝혀졌다는 새로운 사실이라는 것들은 그저 새로운 사실일 뿐, 내 의견으론
그로 인해 소현세자 죽음의 비밀이 완전히 풀렸다고 주장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사관들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만 기록할 뿐, 인간의 마음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인가?
기껏 승정원일기로 인해 인조의 결백이 밝혀졌다는 둥 헛소리로 시작한 그 글은 엉뚱한 결론을 내린다.
이런저런 허망한 소리들을 길게 늘어놓고나서는 기껏 내린 결론이
결국엔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딴 소리를 할 바엔 승정원일기가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다는 둥, 떠들어댈 건 뭔가?
역사는, 그리고 현실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진실은 인간의 마음속에, 혹은 그 마음속에조차 없는 경우가 즐비하다. 하물며 세자의 죽음이 의심스럽다면
그 얼마나 수많은 정치적 역학관계가 인간의 복잡한 심리와 뒤얽혀 깊숙이 숨어 있겠는가!!
얼마나 교활하고 딴에는 공들인 치밀함이 숨어 있을 것인가!실록이나 승정원일기가 그런 인간 마음 속의 어두운 욕망과 복잡한 계산을어떻게 기록할 수 있다는 건가?
진실이라는 것은 매우 단순하지만,동시에 복잡하기 그지없는 인간 심리의 산물이기에,역사적 사건을 영상화할 땐어디까지나 사실이라고 단언할 순 없다는 한 줄의 멘트를 남겨야하지 않을까?역사 속에서 일어난 사건은 현재와는 좀 다르기 때문이다.
드넓은 궁 안에서 발생한 사건은,그것도 아주 깊숙한 최상위층에서 일어난 사건은, 당사자가 아니고는바라보는 시선에 의해 그 해석 자체가 제각각 달라질 수 밖엔 없을 정도로갇혀진 공간임에도 오히려 그런 이유로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제 3의 냉철한 시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록은 그러한 것들을 담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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