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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공략-그들의 이별

모놀로그 2023. 8. 13. 19:44

사극이라는 장르가 가능한 것은,

실존 인물을 다루지만,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알 수 있는 건

오로지 '결말'이기 때문이 아닐지.

 

과정에 대해선 확실하게 알 수가 없다.

인간사라는 게

역사속 인물이나,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나

그렇게 단순하진 않기 때문이다.

어떤 인과 관계로 인하여 그러한 결과가 나오는지

역사속 인물의 경우엔 

실제로는 알 길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단순하게 기록된 몇 줄의 사실, 그리고 입으로 전해지는

몇 가지 야사들,

그것만으로 복잡한 인간사, 그것도 궁중사를 어떻게 알 수가 있겠는가?

 

연희공략을 이번에 다시 정주행하면서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극중 인물들은 모두 실존한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드라마와는 다른 삶을 살았을 것이다.

즉, 실존 인물을 가지고 만든 픽션인 것이다.

 

그렇다면 그 드라마를 보는 나는

드라마속 인물을 역사속 팩트와 어떤 식으로 연관지어야 할까?

우리는 사극이라는 장르에서 늘 같은 딜렘마에 빠지게 된다.

그래서 역사왜곡이니 뭐니 떠들게 된다.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기 때문인다.

실존 인물을 드라마 속으로 끌어들여서

그들에게 캐릭터를 부여하고, 팩트가 아닌 과정을 보여준다.

 

 

모든 것은 상상의 영역이다.

 

예를 들어, 철인왕후라는 드라마의 경우,

난 왜 하필 우리에게 생소할 뿐 아니라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철인왕후라는 인물을 가지고 드라마를 만들었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었는데,

그게 오히려 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행적을 가늠하기 힘든 인물이라

상상력의 영역으로 끌어들일 수가 있는 것이다.

 

숙종조의 여인들이야 워낙에 유명하니 테두리가 좁지만,

철인왕후는 이름조차 남겨진 바가 없는 것이다.

그저 안동 김씨의 인물이고, 아들 하나를 낳았지만

그 아들이 죽는 바람에 적통이 완전히 끊겨 버렸다는 

결과만 알 뿐이다.

 

이번에 연희공략을 보면서

난 갑자기 극중의 '위영락'

즉 건륭제의 세번째 황후였던 위가씨의 삶과

위영락의 극중 행적을 어떤 식으로 연관시켜야할지 살짝 고민(?)했다.

 

왜냐면 극중의 위영락은 사실 꽤 비극적인 여인이기 때문이다.

워낙에 강인하고, 막힘이 없는 걸 크러쉬한 캐릭터에

만능 슈퍼 우먼으로 나오기에

그 경쾌함이 극에 생동감을 주는 바람에 그녀의 비극이 부각되진 않지만,

따지고 보면 그렇게 불행한 여주도 드물 것이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들은 모조리 처참하게, 짧은 생을 마친다.

또한 그녀의 젊은 시절은 사랑이고, 개뿔이고

그저 복수하는 것으로 모조리 소모된다.

언니의 복수, 황후의 복수

 

이것들이 그녀 삶의 전부가 된 셈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복수를 위해

접근한 남자들은 모두 그녀를 사랑하게 되고,

이용하려던 남자들을 그녀 또한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자신을 키워준 언니는 살해 당하고,

자신을 인정해주고 신뢰하고 사랑해준 황후는 자살하고 만다.

(실제론 타살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

 

뿐이랴.

사랑했던 남자, 부항도 역시 젊은 나이에 전사해 버리고

유일한 친구라고 해도 좋을 '명옥'마저

비참한 죽음과 함께 그녀 곁을 떠난다.

힘든 시절을 함께 하며 굳게 믿었던 '원충망'은 

괴물이 되서 자신을 몰락시키려고 혈안이 되었다.

 

자신의 친아들을 경비에게 맡기고

정성껏 키운 '영기'마저 20대에 죽게 된다.

 

여기서 역사적 팩트는,

실제로 건륭제의 첫번째 황후

(도대체가 청나라 황후들은 그 시호를 기억하기 힘들어서리...)

는 갑자기 죽었고,

영기 황자 역시  불과 26세에 죽는다.

그가 다음 대의 황제 제목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한 팩트를 가지고 드라마틱하게

서사를 부여했지만

그것은 드라마적 장치일 뿐이다.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우린 알 길이 없다.

 

그녀에게 남은 건 자식들과 남편 건륭제 뿐이다.

그 자식마저 남은 건 두 딸과 하나의 아들이다.

그녀는 자그마치 4남 2녀를 낳았음에도 말이다.

 

극중에선 위의 인물들의 죽음과 그로 인한 이별이

그 어떤 그늘도 위영락에게 드리우지 않고,

여전히 명랑하고 거칠 것 없이 살아가지만

실제 한 여인이 저런 풍파를 겪었다면

그 상처가 얼마나 심장을 할퀴었을까?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위영락'이라는 독보적인

캐릭터성을 지키기 위해서

슬픔에 질척대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지만

저렇게 파란만장한 이별을 거듭해서 경험하고,

사랑하는 사람,믿었던 사람을 모조리 상실한다면

그것도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이별을 한다면

견디기 힘들 것 같다.

 

내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극 중 위영락과 건륭제의 대화 때문이다.

 

건륭제는 아이를 낳아 몸이 약해진 영락에게

이렇게 말한다.

 

'날 놔두고 먼저 가면 용서치 않겠다'

라고...

 

그 때 영락은 절대로 먼저 가지 않고

오래오래 살아남아서 황상의 곁에 있겠노라고 다짐하지만

역사 속의 위가씨는 그렇게 오래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연희공략의 외전이라고 볼 수 있는

'금지옥엽' 어쩌구 하는 드라마는

영락과 건륭제의 첫 아이였던

'소화공주'와

정혼자인 몽골의 초용 친왕이 우여곡절 끝에 혼인하는 것으로

막을 내리지만,

 

그 소화공주는 역사 속에선 그 난리를 치고 혼인한 드라마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면 허망할 정도로

혼인한 뒤

불과 1년 여 만에 죽어버리고,

그 어미인 위가씨는 그로부터 3일만에 죽었다고 하니

그때 나이가 49세였다고 한다.

 

그러니까 금지옥엽이라는 드라마를

혼인하는 것만이 아니고,

이후까지 조금 더 보여줬다면

이 또한 봐주기 힘든 비극으로 끝나는 셈이다.

 

건륭제는 자그마치 89세까지 살았다고 한다.

30년을 사랑했던 위가씨를 보내고,

수많은 자식들과, 사랑했던 여인들을 먼저 보내고

홀로 남은

(물론 '그'혼자의 의미는 아니겠지만)

건륭제를

드라마 속 건륭으로 대체하면

이 또한 가슴이 미어질 지경이다.

 

그토록 영락과의 이별을 두려워했던 건륭이

사랑했던 딸과, 영락을 동시에 잃었다면?

이라고 상상만 해도 가슴이 아프기 때문이다.

 

연희공략 속의 인물을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알 길이 없다.

 

'건륭제'는 그저 이름만을 빌어온 픽션 속 인물로 봐야겠지?

싶지만 그에게 '위'씨 성의 지극히 사랑했던 후궁이

분명 있었으니 헷갈린다.

그녀는 한족이었기에 황후가 될 수 없었음에도

죽은 뒤에 황후로 추존할 정도로 사랑했다.

 

그 '위'씨가

'위영락'같은 드라마틱하고 강인하고 걸 크러쉬한 인물은 

아니었을 것이다.

 

난 그 '위'씨에겐 관심이 없지만,

위영락이 딸이 죽자마자 따라 죽어다는 것을 생각하면

역시 기분이 썩 좋지가 않다.

 

왜냐면 

드라마상으로 보자면,

건륭은 일편단심 영락만을 사랑하니까.

그녀가 없는 건륭을 상상하기 힘드니까.

 

그저 드라마 속에서의 그들을

역사 속의 그들과 분리시켜서

 

'드라마 속의 그들은 

그렇게 밀당과 신경전을 벌이면서 재밌게 같이 늙어가다가

사이좋게 비스무리하게 죽었다.'

고 믿어볼란다.

 

설사 이별했다해도,

건륭이 먼저 죽었음 한다.

원래 혼자 남겨지는 건

여자가 덜 불쌍해 보이니까.

 

왜냐면 영락이 원친 않았지만

다음 황제는 영락의 아들이고,

영락이 고된 삶에 비해 너무 일찍 죽는 건

생각하기 싫으니까.

 

참 엉뚱한 생각들이지만

요즘 가슴이 메마른 듯

아무 감정도 느낌도 없이 살아가는

내게

어떤 식으로든 물결이라는 것을 일으켰기에

굳이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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