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어느 날의 일기 본문
오늘 난 일찍 일어난 편이다.
그리고 오늘은 비가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 실망했다.
아니, 실망하는 한편 안심도 했다.
실망한 이유는, 어차피 습도가 높을 바엔 비가 오는 편이 낫고,
비가 오면 오늘 소피 산책을 시킬 수가 없기 때문이고,
엄마는 침을 맞고 싶어하니까.
비가 오면 침을 오늘도 맞을 수 없으니까.
피아노 치는 시간이 전처럼 즐겁지 않은 것은,
내 몸이 늘 피곤하기 때문이고,
피아노방이 너무 더워서이다.에어컨을 틀어도 거기는 여전히 덥다.
하지만 난 그 방이 좋다.내 방으로 바꾸고 싶다.
조용하고, 외부에 노출되지 않은 방이다.
천장부터 바닥까지, 나무로 된 방이고,
큰방과 주방 사이에 끼어 있는 방임에도
크기는 만만치 않기 때문에
충분히 내 살림들이 들어갈 것이다.
침대와 티비와 컴퓨터 그리고 오디오까지
몽땅 그 방으로 옮기고 싶다.
에어컨만 옮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른 건 내 힘으로 할 수 있지만,
에어컨은 돈이 든다. 젠장!!
예전 같으면 생각하자마자 실천에 옮겼을지도 모를
그 큰 공사를 그저 생각만 한다.
지금 난 예전처럼 충동적으로 생각난 일을 당장 실천하는 에너지가 없다.
피아노를 오래 칠 순 없었다.
쇼팽의 4번 코다만 죽어라고 연습하고 있는데,
통 좋아지지 않는다.당연한 일이다.
웬만큼 손에 익으면 그 다음엔 연습 방법을 바꿔야하는데,
솔직히 집중력이 떨어진 상태이다.
모두 이 습도 탓이다.비가 그치고 장마가 끝나도
이 습도는 광적인 더위와 함께 지속될 것이다.
가을은 늦게까지 오지 않을 것이고,계속 더울 것이다.
예전의 그 여름은 이제 사라진 것이다.
장마가 끝나고, 잠시 덥다가
태풍이 지나가고,그때의 비는 차고 거세다.
더위를 걷어가는 태풍이다.
8월 중순이면,남아 있는 더위 속에 가을 내음이 풍겼었다.
난 그 가을 내음이 얼마나 좋아했던가!
그러나 그런 모든 것이 지난 날의 내 자신과 함께 사라졌다.
그립다.
그 여름의 끝자락과 그것에 행복해하던 나를 찾고 싶다.
아니 보고 싶다.
그때의 내가 보고 싶다.
이렇게 난 병적으로 90년 대에 미친 듯,
더욱 더 집착한다.
날 버리고 간 연인에게 집착하듯,못잊어서
머리 풀어헤치고 밤마다 몸부림친다.
소피를 데리고 산책하는 길은
벌써 이 십년도 넘게 다녔던 길이다.
분명 변하고 있을 것이다.그런데 난 그것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거기엔 오랫동안 내가 좋아하고 수영을 배우고
수영을 열심히 했던,
그리하여 운동 신경이 둔한 내가
수영만큼은 완전히 마스터한 것을
스스로 대견해하던,
내가 다녔던 수영장이 있었다.
그것이 사라졌다.
그래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한다.
가끔 인지하는 순간, 미칠 듯 외롭다.
또 뭔가가 조금씩 변해가지만
역시 인지하지 못한다.그저 산책로에 불과하다. 나도 변했기 때문이다.
오늘 그곳을 다니면서 난 수많은 것을 사들였다.
덕분에 난 허리가 작살났다.
소피는 힘들고 더워서 비틀거리고,난 소피와 무거운 짐을 잔뜩 지고 허덕인다.
시계를 보니,집에서 나온 지 2시간이 넘어가고 있다.
엄마가 걱정하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힘든 채로,
난 집에 가자마자 소피를 씻겨야 하고,또 나를 씻겨야 한다.
그러고 나면 내 방에서 머리를 말리며
게임을 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무척 행복했고, 불행하기도 했다.
왜냐면 그 행복한 순간까지 아직도 험난한 길을 가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은 일어났다.
지금은 새벽 한 시,난 내가 원했던 일을 모두 했다.
쌀떡볶이를 해먹었고,소피도 씻겼고,나도 샤워를 했다.
마사지를 하려 했으나, 피곤해서 포기했다.약을 먹고 잠이 들었다.
두어 시간 자고 일어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렇게 앉아 있다.
난 티비를 보고 있다.
아주 오랜 만에 엊그제 끝난 드라마를 보고 있다.
제목은
'마당이 있는 집'
소재는 좋지만 임팩트가 없다.
여주인공들이 매력이 없다.
김성오는 오랜 만에 보는데, 엄청 늙었다.
요즘 유행하는 피가 튀고,괴물들이 날뛰는 드라마보단
사람 냄새가 나는 드라마이다.
다시 한번 제대로 복습해야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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