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고도 [古都] 본문
아주아주 오래 전....
우린 충정로라는 곳에 살고 있었다.
지금이야 그 당시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흔해빠진 이른바 현대화된 동네로 변모한지 오래지만,
내가 살았던 당시만해도
그곳은 그 전에도 그 이후로도 본 적이 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다신 볼 수 없을
그런 곳이었다.
그 이유는...
그곳이 시내 한 복판이면서도,
광화문에서 불과 한 정거장 밖엔 안되는 곳임에도
옛 정취가 조금도 훼손되지 않고
고스란히 보존된 곳이었기 때문이다.
충정로라는 곳은
시내와 변두리를 연결하는 지점이었다.
그래서 그때도
온갖 버스 노선이 집결하고 교차하는 복잡하기 그지 없는
곳이었다.
그러나
조금만 걸어들어가면
갑자기 별천지가 펼쳐진다.
난 그곳에서 본 노을을 이전에도 이후에도 본 적이 없다.
그 노을은 매일같이
하늘을 불태웠다.
지금은 볼 수 없는 우주의 신비이다.
난 그곳에서 본 어둠을 다신 보지 못했다.
그것은 문명이라는 혹은
진화라는 이름으로 혹사당하다가 지쳐버린 현대의 어둠과는
질이 달랐다.
그건 원시적이고 야성적이었고,
인간이나 문명의 냄새가 전혀 풍기지 않는,
자연의 본성을 숨김 없이
내보이는,
그래서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무섭기도 한 그런 빛깔이었다.
난 그곳에서 본 빗줄기를 다신 보지 못했다.
그 원시적인 어둠 속을
후려갈기듯 내리꽂는 빗줄기 또한
생래의 자연이 가진 무시무시한 생명력을 과시하며
거침 없고 잔인하며 무심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름답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그 동네의 주택가는 주로 일본식 저택들이 즐비했는데,
일제 시대의 잔재가 그렇게 온전하게 보존된 곳은
당시엔 그곳이 최고였지 싶다.
아직 개발되기 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만 해도
한 때는 일본식 저택들이 널려 있던 곳이다.
높은 담 위로 언뜻 보이는 정원은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듯
엉망이었고,
낡은 저택들의 벽은 당쟁이 넝쿨이 제멋대로 뻗쳐서
창을 가렸다.
물론 이제 모두 헐리고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아파트와 빌라 따위가 들어서서
이전의 고적함은 찾아볼 수도 없다.
아...난 정말 아파트가 싫다...ㅠㅠ
충정로의 그곳은 일제시대의 고관들이 살고 있었던 듯한
저택과
차츰 들어서기 시작한 현대식 저택들이 어깨를 겨루고 있었다.
새로운 저택들은
외국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모델이었고
실제로도 외국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간혹 주말이면
간호사가 이끄는 휠체어에 탄 노인이
정원에 모습을 보이고,
훤칠한 키의 하늘색 수트를 입은 외국인이
그 노인과 더불어 정원을 산책하는 광경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내 관심을 끈 것은
그런 현대적이고 전혀 한국적이지 않은
영화의 한 장면 같은 광경이 아니라,
무너진 일본식 건물들,
그 황량함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보다 깊숙한 곳에 숨겨져 있던 풍경들이다.
주택가를 구비구비 지나다보면
불쑥 인적이 끊기고,
사람 냄새도 인가도 끊기며
언덕이 나타난다.
그곳의 흙은 거무스름하고
나무조차 그 흙에 물들어 검었다.
나무는 죽어가고, 꽃은 피지 않았다.
마치 사라진 한 시대를 상징하듯
죽어버린 곳이었다.
거기선 생명을 느낄 수가 없었다.
신학대학 기숙사로 쓰이는 고딕풍의 낡은 건물도,
바로 곁의 야트막한 담 너머로 보이는
두 채의 일본 저택들도
잊혀지고 버려진 채로
왜 아작까지 자신들이
거기에 있는지 모르겠다는 듯,
서글프고 휑한 정적 속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기숙사 옆의 야트막한 담 너머로 보이는 건물은
폭격을 맞아 반쯤 무너져내려진 채 방치되어 있었다.
아마 굉장히 오랫동안 그러고 있었을 것이다.
건물의 깨진 창들은
빛을 잃은 눈빛처럼 나를 마주본다.
아무도 돌보지 않아 거칠고 무성해진 정원은
황량하고 쓸쓸했다.
난 주말 저녁이면
매일 같이 그곳까지 산책을 가곤 했다.
그래도 주말에는
기숙사에서 나온 신학생들이
드문드문 앉아서 도란거리고 있었기에
그나마 사람 냄새가 나곤 했다.
야트막한 담너머로 보이는 무너진 일본 저택 아레쪽에도
또 한 채의 저택이 있었다.
내 생각엔
그 무너진 건물은
사저는 아니었던 것 같다.
공관으로 쓰이던 건물이 아니었나 싶다.
그 맞은 편의 역시 낡아빠진 3층짜리 집이
사저였을 것이다.
그 낡아빠진 3층 건물엔 아무도 살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난 그 3층 건물보다
무너진 건물에 늘 눈길이 갔다.
난 그 산산조각난 시꺼먼 창 속을 한참씩 들여다보곤 했다.
저 속엔 어떤 사연들이 있을까?
그 어둠은 무슨 말을 내게 들려주고 싶은걸까?
그러다
섹스폰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면
신학생 한명이
하늘을 향해 구슬프게 연주하고 있다.
어느덧 어둠이 깊어가던 그 언덕 위의
검은 실루엣은
그때 무슨 곡을 연주했더라?
그곳을 떠난 이후로
난 단 한번도
그곳에 가본 적이 없다.
왜냐면
이제
그곳은 그때완 전혀 다를 테니까.
난 그 노을빛과 어둠, 빗줄기,
그리고 창백한 달빛 속의 처량맞은 기찻길
따위를 언제까지나
기억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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