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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녀 (8)

모놀로그 2010. 6. 6. 17:19

 

죽음의 선고는 어떤 의미에선
준호에겐 구원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는 더이상 갈 데도 없었고
할 수 있는 일도 없었으며
아무런 희망도 없었으니까..

진정한 복서는 죽어도 링 위에서도 죽는다. 도망칠 때는 없어~!!

라는 대사가 난 무척이나 인상적이고 폐부를 찢는다.

그렇다.
우리도 삶 속에서
어느 순간에
길이 막혀 버릴 때가 있다.

갈 곳이 없어지는 것~
심적인 노숙자가 되는 것은 한 순간이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지는 순간
그 인간의 삶은 잉여의 시간일 뿐이다.



죽음의 선고는
준호에겐 그동안 상실했던
혹은
가질 수 없었던 것들을 돌려준다.

첫째로

그는 마지막 숨을 다하여 다시 참피온에 도전하겠다는
목적 의식을 갖는다.

준호는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위해 땀을 흘리고
그리고 승패를 도외시한 채로
링 위에서의 승부에 자기 한 몸을 불사르는 것이
황준호의 삶을 그리고 생명과 존재감을 확인하는 방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준호는 역시 남자이다.
결코 사랑이 전부일 수가 없는..

아니 자아 정체성을 상실하고는
결코 사랑조차도 할 수 없는
전형적인 남자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아름다운 그녀와 결혼하는 대신에
포기했던 그 희열은
그를 얼마나 외롭고 비참하게 했던가~!

그는 제자리로 돌아간다.
진정한 복서로서 링 위에서 죽음을 맞기 위하여...

둘째로

비로소 그는 선영과 참다운 부부가 된다.



그것은
마지막으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그들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첫날밤을 치루었을 때
선영은 만족해서 깊고 달콤한 잠에 빠져서 그의 품을 파고 들었지만
그때
준호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그도 행복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인이 자기 품 안에서 잠들며
자기 품을 파고드는 순간이
사내로서 행복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때의 준호가 느끼는 행복감엔 충족감보단
불안감이 더 느껴진다.

그리고
그들이 완전한 일심동체의 경지에 이른 참된 부부관계를 맺지 못했다는 것을
첫날밤을 결혼 며칠 후에 겨우 치룬 그들의
잠자리에서의 모습으로 느낄 수가 있다.

즉,
그들은 첫날밤을 치룬 부부답지 않게
잠옷을 깍듯하게 차려 입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회에서
오랜 별거 끝에
준호의 죽음을 앞두고
다시 재결합을 한 후의 그들의 침대 위에서의 모습은
알몸이다.

그것은
비로소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갖가지 장애물이 제거되어
서로를 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한
참된 부부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다른 한편으로
그의 죽음을 앞두고서야 복서의 아내다운 자세가 되는
선영이 안타깝다.

그녀는 복서의 아내이길 거부함으로써
그를 잃었었다.

그녀는 그를 이해하려들지 않았고
그의 외로움과 아픔을 헤아리지 못했으며

그녀의 사랑은 이기적이고 소유욕으로 점철된 사랑이었기에
그를 잃었던 것이다.

마지막 숨을 권투에 쏟아붓는 것을 허락받은 순간부터
준호는 다시
예전의 그로 돌아간다.



천진하고 당당하고
더이상 주눅들지 않고 선영에게 뭐든지 말할 수 있었던
그 모습으로...

그러고보면
설사 죽음을 맞을지라도
그에게 있어서 권투의 의미라도 이해해줬다면

혹은
권투를 하지 못하게 된 그의 외로움과 상실감을 헤아려줬다면
하는 안타까움을 더더욱 느끼게 된다.





비로서 아집을 버리고
복서 남편을 내조하는 아내다운 모습을 보여주는 선영..

그러나
그것은 마치 죽은 남편에게 수의를 입히는 의식처럼
처연하게 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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