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아름다운 그녀 (5) 본문
경비 일마저 그만둔 준호가 할 일은 이제 아이들의 보디가드이다. 한참 나이의 젊은 그가 그것도 세계 챔피온인 그가 두 아이들을 조직의 협박성 폭력에서 지키기 위해 아침엔 학교에 데려다주고 종일 기다렸다가 집에 데려오는 것이 주된 일과가 되버렸다. 아이들을 기다리는 무료한 시간.. 거리에 나붙은 권투 시합 포스터에 다시금 술렁이는 복서의 피... 설레는 듯 포스터를 바라보는 준호의 눈빛에 모처럼 생기가 돈다. 선영은 준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경찰에 신고하는 우를 범한다. 그렇게 하면 준호를 그들에게서 지킬 수 있다고 믿는 온실의 꽃다운 순진하다 못해 어리석은 생각을 한 것이다. 그 바람에 기어이 아이들은 조직에 의해 납치되는 사태가 발생하고 그 굴레는 고스란히 준호의 몫이 되버린다. 선영은 준호를 닥달하고 준호는 조직에 달려갔다가 집단 린치를 당한다.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질 때까지 준호가 되뇌이는 말은 오직 "아이들을 돌려주세요..."뿐.. 그는 어떻든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같은 인간이 끼어듦으로서 평화로운 가정에 피바람이 일었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피투성이가 된 모습으로 지하철 바닥에 주저 앉아 있는 준호.. 모든 것을 놓아버린 자세이다. "사람들이 그러더라구요 우린 어울리지 않는다고.. 정말 그런가봐요..." 그렇다..선영과 함께 있을 때 그에게선 늘 피 냄새가 난다. 링 위에서나 링 밖에서나 그는 피를 몰고 다니고 피에 젖어 있다. 하지만 살이 저미도록 맹목적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어울리지 않는 남자라는 결론을 내린 준호의 마음은 얼마나 갈기갈기 찢어졌을까.. 그는 억지로 끌고 온 연극이 막바지에 이르렀음을 느끼는 듯 하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고 어울리지 않는 역을 우스꽝스럽고 서투르게 연기하던 자기의 모습을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는.. 그가 너무나 사랑하는 아름다운 그녀이다. 그에겐 너무나 아름다운... 마지막을 각오한 듯 선영을 바라보는 준호의 시선은 서글프고 애잔하다. 꽃처럼 귀한 자기 아내를 귀하게 보고 또 보며 눈에 새겨두려는 듯... 아이들에게 나쁜 기억을 남기게 될까봐 두렵다는 준호.. 그처럼 그에겐 너무나 소중한 아내와 아이들에게 조금이라도 상처를 주고 험한 세계에 발끝이라도 들여놓게 했다는 것만으로 준호는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직과 손을 끊게 하려던 선영의 행동으로 인해 준호는 다시금 조직의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난 준호를 점점 궁지에 몰고간 것이 다름 아닌 선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녀가 준호를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면.. 그의 세계를 무조건 하루 아침에 뒤바꾸려고 강요하지만 않았다면.. 그의 아픔을 조금만 헤아려주었다면... 준호의 자기를 버린 사랑에 단지 소유욕이 아닌 아내로서 남편을 다독이는 노력만으로 보답했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 점에서 역시 내겐 선영은 자기가 준호라는 남자를 택해서 남편으로 삼았다는 것만으로 자기 할 일은 충분히 한 듯한 자기 만족감에 차서 사태를 직시하지 못하는 우월감을 본다.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녀 말대로 이젠 외롭지 않아도 되잖아요..라는 말은 허공 속으로 사라지는 무의미한 말이다. 준호는 혼자 거리를 헤맬 무렵과 조금도 다를 바 없이 외로웠으니까.. 하지만 그는 꿈에도 아내를 원망하거나 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잘못이라고만 여긴다. 그것이 그의 자격지심이고 열등감이다. 선영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참된 아내가 아니었다. 마침내 그를 잃게 될 때까지 그녀는 그걸 알지 못한다.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로 이리저리 뛰어다닌 결과 아이들을 무사히 찾아 주고 준호는 선영 곁을 떠난다. 그들을 떠나서 그들이 다시금 예전처럼 조화롭고 평화롭게 사는 것, 아무것도 망가지지 않고 아무것도 부숴지지 않는 단정함과 고고함을 유지하게 해주는 것 그것이 그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사랑이었다. 그러나 준호 역시 더이상 자기랑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랑 어울리지 않는 생활을 어거지로 영위하는 것을 더이상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는 단지 외로울 뿐 아니라 무섭게 불행했었으니 말이다. 행복에 겨워 시작했던 그의 짧은 결혼 생활은 그렇게 끝이 난다. |
'이병헌 > 그의작품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그녀 (7) (0) | 2010.06.06 |
---|---|
아름다운 그녀 (6) (0) | 2010.06.06 |
아름다운 그녀 (4) (0) | 2010.06.06 |
아름다운 그녀 (3) (0) | 2010.06.06 |
아름다운 그녀 (2) (0) | 2010.06.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