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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시계

모놀로그 2010. 7. 1. 20:06

 

 

 

때는

1995년...

 

내가 한참 바쁠 때였다.

그러면서도

지금처럼 티비와는 담을 쌓고 살던 시절은 아니다.

 

오히려

방에만 들어오면

습관처럼 티비를 틀던 시절이다.

 

드라마를 즐겨보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담을 쌓고 살진 않았다.

 

연초부터 모래시계 열풍이 불었다.

열나게 홍보 때리더니 드디어 방영한다고

생난리가 났다.

이후론 시청률이 어마어마하고

장안의 화제가 되는 드라마였다.

그래서 안봤다.

 

우선

난 고현정을 싫어한다.

그래서 안봤다.

 

게다가

나에게 어떤 종류의 파장을 일으킬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을 주는,

골치아파질 것 같은 드라마를

꺼린다.

 

당시엔

스트레스가 심할 때라

더욱 그랬다.

 

지금도 여전히 스트레스 받기 싫은데다

여러가지 이유로

아예 티비나 연예계와는

담을 쌓고 살지만..ㅋ

 

그땐

배우나 캐릭터엔 관심도 없으면서

드라마는 비교적 챙겨보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래시계는

외면했다.

 

그러던 어느날..

 

아마도

21회쯤 되었을 것이다.

 

일이 끝난 후에

침대 위에 누워

리모콘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문득

모래시계인 듯한

드라마를 하길래

 

그냥 돌리려다

잠시 멈추었다.

드라마의 전체적인 분위기가 생각보다

훨씬 세련되었고 비범했기도 했지만,

내가 무심코 지나치려던 

그 장면이 웬지

매우 맘에 들었기 때문이다.

 

태수와 혜린이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었다.

장소는 호텔의 레스토랑의 VIP를 위한

고급스런 방인듯 했다.

 

물론

당시엔

태수인지 혜린인지 몰랐다.

 

그냥

최민수와 고현정이었다.

 

최민수는

척 보기만해도

범상치 않은 세계에 몸담고 있는 사람 같았고,

(난 모래시계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고현정은

콧대를 잔뜩 세우고

내가 무지하게 싫어하는,

그 억양 없고

매우 단정하며  딴엔 차갑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듯한

말투로,

그리고

내가 무지하게 역겹게 생각하는

표정으로

즉,

나름대로 자연스러운 연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나

나 연기해..라는

자의식이 가득찬

그런 연기를 하고 있었다.

 

하튼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고 있었는데,

 

도무지가 뭔 소린지..

 

분명한 건

두 사람은

뭔가

마음 속에 잔뜩 쌓인 게 있는 상태로

매우 의미심장하고 우회적인

그러나

절대로 본심을 말하지 않는

그런

피상적인 대화를 하고 있었다.

 

물론

그런 대화를 하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대개는 진실을 말하고 싶어도

그게 잘 안되는 법이다.

 

실은 그런 말을 하려는 게 아닌데,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빙빙 돌리며

겉도는 대화를 하면서

 

그로 인해

더더욱 거리감을 느끼고,

 

실은 대화를 하고자 하는 이유가

그 거리를 좁히고 싶어서인데

 

오히려 거리가 더더욱 멀어지는 것과

두 사람 사이의 벽이 확고해짐을 느끼며

 

서로가 상처받고 답답해하면서도

끝내 누구도 양보하지 않는..

 

그런 묘한 느낌을 주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 자체는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단지

 

쟤들은 대체

뭔 사이래?

 

왜 저렇게 잘난 체만 하고 있대?

 

둘 다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 모양인데

왜 겉폼만 잡고 자빠졌대?

 

남자는 여자를 좋아하는 것 같은데,

여자는 저 남자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걸까?

 

척 보기엔

여자쪽에서 무지하게 잘난 체 하고 있는데,

그 여자의 진심은 뭘까..

 

두 사람은 대체 어떤 사이일까..

하지만 어떻든 상당히 세련되고

멋진 장면이구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대충 보았고

잠시 채널을 돌렸다.

 

몇 분 후에

다시 리모콘이 모래시계로 돌아갔다.

 

그냥 스쳐지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내 시선을 강하게 붙잡는 어떤 장면이 있었다.

 

 

공항이었다.

 

최민수는

공항에 있었다.

 

그는 떠나려는 것 같았다.

 

뭔가 심상치 않았다.

왜냐면

 

카메라는 공항을 계속 여기저기 비춰주고 있었는데,

 

그건

바로 태수의 시선이었던 것이다.

 

그는

본능적으로

위험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조여오는 그 위험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찾고 있었던 것이다.

 

2층 난간에 서서

그는 미친 듯이

공항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카메라는 눈부시게

긴박하게

공항 여기저기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난 그가 왜 그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체념하고 돌아서서

멀어져갔다.

 

바로 그때였다.

 

기둥 사이로

조용히 나타나는 여인..

 

혜린이었다.

 

 

 

 

 

 

 그때

눈부시게 쏟아지는 피아노 소리로 시작하는

음악..

 

내가 지금까지도 좋아하는

모래시계의

메인 타이틀이다.

 

난 그 장면에서

그냥 뒤로 넘어간 것이다.

 

난 지금도

최고의 연출이었다고 생각하고,

 

수많은 명장면이 넘쳐서

뭘 골라야할지 모를

모래시계 중에서,

 

그 장면을 베스트5 안에 꼽는다.

 

왜냐면

 

그 장면 하나로,

 

마지막 대면에서 그토록

싸늘하고 냉소적이었던

여자의 본심을

드러낼 수 있는

연출이 놀라왔던 것이다.

 

거만한 껍질을 벗고,

오로지 혼자 있을 때만 지을 수 있는

허식을 버린 인간의 표정,

바로 말할 수 없이 애잔한 표정으로,

숨어서

그를 배웅하는

혜린의 모습..

 

그 모습만으로

그들의 관계가 대충 어떠한 것인지

알 수가 있었다.

 

그게

죄책감이던, 연민이던, 미안함이던

중요하지 않다.

 

어떻든

그 배웅은

혜린이

태수에게 바치는 진심이었으니까.

 

내 심금을 울리는

어떤 장면 하나로

그 드라마에 꽂히는 스타일이라고

늘 말한다.

 

그 장면에 감탄한 나머지

갑자기 모래시계의 극예찬자로

불과 5분만에 돌변했지만,

불행히도

 

그땐 이미

모래시계는

거의 막방을 향하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마지막 몇 회야 말로

모래시계의

엑기스가 모두 담긴

명장면의 연속이다.

 

숨을 죽이며

마지막까지 다 본 후에

 

난 모래시계를 처음부터 다시 보고 싶어서

몸이 달 지경이었다.

당시만해도

다시보기니 어둠의 경로니

그런 건 없었으니까.ㅋㅋ

 

마침

지인이 그걸 모두 녹화해서 가지고 있다가 빌려주었다.

 

그 사람은

광주 사람이었는데,

그 녹화테잎을 본 후에야

왜 그 사람이

그걸 녹화했는지 이해할 수가 있었다.

 

주말에

꼬박 밤을 새워서

그것을 다 보았고,

 

다시

처음부터 다시 보았으며,

보고 또 보고

그 긴 드라마를

수없이 보았던 것 같다.

 

이정재역엔 별 느낌이 없었다.

난 최민수의 박태수역에 빠졌다.

특히

아역 시절의 태수역이 매력적이었다.

 

그는 지금도 활동하는

김정현이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박태수란 인물의

청소년 시절을 잘 표현한다.

 

사실,

 

아역은 매우 중요하다.

 

성인역과 매그럽게 연결되어야

완성도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내가 본 최고의

아역은

 

다모에서

황보윤의 아역이었다.

어쩌면 내가 그냥 대충 보던 다모에

뭔가 삘을 받았다면

바로 그 성현군이

대나무 숲에서 비를 맞으며

스승을 조롱한 소위 양반층 자제들에게

각목(?)을 휘두르며

포호하던 장면일 것이다.

어린 나이에

그런 분위기를 풍길 수 있다는 게 놀라왔고,

단숨에

황보윤이라는 인물의 내면에

숨겨진 격정과 울분을 너무나 잘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후의 그를

본능적으로 이해하게 하는데

일조한다.

 

마찬가지로

김정현도 참 잘했다.

 

그가

그 짧은 몇 장면으로

스타가 된 건 당연하다.

 

홍경민역은

연기는 잘했지만

 

박상원역과의 연결이 매끄럽지 않았다.

하기야

 

박상원역 자체가

워낙

애매했고,

 

박태수란 인물의 강렬함에

가리워져서

 

아역도 큰 빛을 발하기 힘들었지만..

 

이정재...그를 좋아하는 여인네들이

꽤 많았던 걸로 아는데

말없는 보디가드의

절절한 사랑은

내겐 그저 그랬다.

 

후에

이정재가

그 역으로 큰 인기를 끌고,

 

모래시계의

최대 수혜자가 되었음을

알았다.

 

난 이정재를 워낙 좋아하지 않는데다

 

그런 보디가드의

말없는 해바라기 사랑은..

내 취향이 아니었던 것 같다.

 

박태수란 인물을 좋아했다.

대개 어떤 캐릭터를 좋아하게 될 땐

현실적인 인간관계를 맺는 것처럼

그 캐릭터를 속속들이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남모르게 그 캐릭터와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게 된다.

그게 없이는

어떤 캐릭터를 좋아하게 되는 일은 없다.

뭐 겉모습에 빠지거나 그럴 순 있지만

적어도 난 외모로 인해

캐릭터에 빠져본 적은 없으니 말이다.

 

박태수는 최민수 최고의 명연기였다.

 

제일 감동먹은 연기는

삼청대 교육에 끌려간 그가

 

처음 면회온

친구 앞에서

허겁지겁

삶은 계란이며

카스테라 따위를 먹는 장면이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큰 야심은 없이 대충 살아가는,

그러나 말끔하고 폼나던 건달 박태수가 

 

하루 아침에

망가진 모습으로

친구 앞에서

개폼잡을 여유도 없이

적나라하게

바닥까지 떨어진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스스로 그런 자신에게 수치심을 느끼지만,

그러나 그 수치심조차 사치스러운

개돼지 취급에 익숙해져가는

그 무서운 환경을

그는 바로 그 장면으로 모두 보여준다.

그런 연출도 참으로 압권이었다.

뛰어난 연출이란

긴 설명 없이

단 한 장면만으로

모든 걸

압축해서 이해시킬 수 있는 능력이라고 난 믿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그곳에서 풀려난 후,

혜린을 기다리는 장면이란..ㅠㅠ

 

스마트한 건달이었던 그가

거지나 다름없는 꼬라지로

 

우두커니 여자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그 모습은..

아흑;;;내가 고현정이 아닌게 다행이었다.

 

특히 좋아하는 장면은

마침내,

헤린과 태수가

 

마지막 밤을 보내는 장면..

 

별장 밖은 깊은 어둠이다.

소리 없이 눈이 내리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벽난로 앞에 앉아 있다.

불꽃이 환하게 피어오르고

이따금 튀어오른다.

 

그렇게

그들을 조여오는

이별,

위험,

 

그러나

 

잠시 동안 찾아든

평화로움..

 

 

 

소리없이 내리는 눈을 바라보는

창에 비치는 혜린의 표정은

다가올 이별과,

현재의 아득한 따사로움 사이에서

 

불안하게,

애잔하게

그러나

충만하게

 

그 순간에 충실하고자 한다.

 

긴 시간 돌고 돌아

겨우 함께 있게 된 그들은

이미 모든 허식을 벗고 있다.

 

왜냐면 

마지막이기 때문이다.

 

왜 인간들은 마지막 순간이 되어야만

진심을 드러낼 수가 있을까..

 

수많은 시간을

허비한 후에

다다른 막다른 길에서

비로소 드러내는

진실..

그러나

 

그 진실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간은

얼마나 짧은가.

 

하지만

 

그토록 많은 허위가 있었기에

 

짧은 진실이

더욱 찬연히 빛난다.

 

아픈 일이다.

 태수의 목에 매달리는 혜린의 절망적인 몸짓..



그토록 사랑하고 원했던 여자를

포옹하는

태수의 얼굴은

벽난로의 불빛이 주는 음영에 가리워져서

더더욱

그 깊이를 더한다.



너무나 아픈 장면이어서

볼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



 

 

 

 

그 외에도

 

명장면은 수없이 많다.

 

감옥에서

자기가

광주시민을 살해한 군인이었음을 고백하는

박상원..

 

그걸 어느새 잊고

심판하는 자리에 서서

청렴하다고 믿고 오만하게 살았던 자신을

돌아보며

 

바로 자신이 그리고

병든 사회가 만들어낸 산물이라고 할 수 있는

태수를 심판하고 짓누르고 있는 그 제도권이라는 이름의

우스꽝스러운 핍박의 선두자가 되버린 

이른바 법의 수호자,

그러나 과연 자신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고민하며 태수 앞에서 고해성사하는 장면도

멋있었다.

썰렁한 감옥 안에 나란히 앉은

오랜 두 친구..

침묵이 오랫동안 흐르고..

음악도 흐른다.

 

광주에서

항쟁에 휘말려

어느덧 그들의 선두에 서서 전투를 벌이고

그들과 아픔을 함께 하며,

죽어가는

부하를 부여안고 울부짖던 태수의 모습도

눈시울에 선하다.

 

아..그런 시절이 우리나라에 있었다.

창피스러운 과거이지만

분명히 존재했다.

격동의 세월이었다.

난 그 세월에 뭘 했던가?

 

난 얼마나

무지하고 안전하게 살았던가

새삼 돌아보게하고

부끄럽게 만들었던..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나이였다고 자위하며

아픔 마음을 다스렸던

 

모래시계..

 

잊을 수 없는 드라마이다.

최민수에겐

독이 되었던 박태수역이었지만,
일생일대의 명연기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단지
그 역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계속 그 컨셉을 고집하다
끝내는
더이상 발전하지 못한 게
참 아쉽다.

최민수..
그는
사랑이 뭐길래에서
참 밝고 귀여운 역을 잘했었다.

후에
그의 아버지인
최 뭐시기..
라는 원로배우가 말하길

박태수보다
대발이역이야말로
최민수 최고의 연기였다고 했다는데

역시
원로배우의 눈은 날카롭다.
대발이 역은 그를 배우로 만들었지만

태수역은
그에게 잔뜩 힘이 들어가게 만들었으니까.

어떻든
모래시계는 정말 멋지고
가슴 뭉클한 장면들이 넘쳐흐른다.
놀라울 정도이다.

김종학 송지나 콤비가
그 이상의 작품을
이후론 만들지 못한 것도
이해가 간다.

그들은 거기에 자기들의 모든 역량을
모조리 쏟아부은 것이다.

아마
그 이후론
에너지가 소비된 모양이다.


게다가
김종학 피디는
마치 박태수처럼
그때 들어간 힘을 빼지 못하고
계속 겉멋을 부리다가

결국
모래시계를 능가할 작품을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백야 3.98도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거기도 아름다운 장면들이 넘쳐흐른다.

그러나
역시 힘이 들어간 작품임에 틀림없다.

배우와 감독의 자의식이 너무 팽배해서
좀 불편하다.

어쨌든
모래시계는
내가 홀딱 반해서
정신을 잃었던
최초의 드라마가 되겠다.

 

모래시계의 후유증은 꽤 오래갔지만,

역시 무거운 작품이라 그럴까..

 

그 열광이 식은 이후론

다시 보는 게 쉽지가 않다.



오랜만에

소장하고 있는 동영상이나 첨부터 봐볼까?

싶다가도

 

아..

그러나 지금의 난

그 어떤 자극이나

감성도

 

감당하기엔

너무 힘들다.

라는 결론과 함께

포기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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