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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남는 드라마 -줄리엣의 남자

모놀로그 2010. 6. 6. 01:31

줄리엣의 남자란 드라마는
2000년도 쯤에 한 것 같다.

 

난 어렸을 땐 오히려

드라마에 홀딱 빠진다던가

그로 인해 캐릭터에 몰입해서 그 배우를 좋아한다던가

하물며 아이돌 가수를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한 마디로 연예계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아,

물론 장국영을 좋아했고, 로버트 드 니로를 좋아했다.

 

그러나

한국 남자 배우나 가수에 빠져본 적은 한번도 없다.

 

난 드라마를 보는 시각이 좀 남다른데,

그 드라마의 구성이나 작품의 완성도도 물론 중요하지만,

 

작품 전체가 완벽하게 발란스가 맞아서

뛰어난 완성도를 자랑하면,

난 그저 드라마를 인정하지만

거기에 빠지진 않는다.

 

오히려 내겐 어떤 장면이 문득 내 감성을 자극할 때

일단 꽂히는 스타일이다.

 

예를 들자면

백야 3.98 같은 작품이 그렇다.

 

그 작품은 사실 매우 지루하고 좀 잘못 만들어진 작품이지만,

그러나

 

매우 심금을 울리는 몇개의 장면과,

너무나 아름다운 음악들이

전편에 깔린다.

 

그러면

난 그 작품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줄리엣의 남자도 그런 경로를 거쳤다.

 

겉으로 드러난 스토리나 소재도 신선했지만

 

무엇보다

 

그 드라마엔 너무나 아름다운 장면,

매우 내 감성을 자극해서

 

속이 울렁거리며

나도 모르게

몰입하게 되고,

 

거기서

나만의 시선으로

연출자가 말하고자 하는 것 이상의

아름다움을 끌어내서

내 안에서 극대화시킨 작품일 것이다.

 

 

그 드라마에서 난 당시 유명한 스타였던 차태현을 첨 봤다.
그 전엔 광고에서나 얼핏 보았을 뿐,
그 바로 전해인 99년도에 방송된 해피투게더에서만 해도
초짜 신인으로
단역보다 조금 나은 조연 정도였던 그가
어쩐 일인지
바로 일 년 후엔 유명 스타가 되어 있었다.

물론,
난 차태현 따위에겐 전혀 관심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틀어놓은 그 드라마에 점점 꽂힌 것은
배우보단
캐릭터의 매력과, 독특한 소재, 그리고
극본과 연출이었다.

우연히도 그 작품의 연출가는 오종록 피디였다.

오종록 피디는
해피투게더며, 피아노등
제법 히트작을 낸 연출가인데,

줄리엣의 남자는
연출도 연출이지만 극본이 좀 색달라서
건성으로 소리만 들으면서도 톡톡 튀는 대사들과 거의 정상적이라고 하기 힘든
보기 드문 캐릭터들로 가득하구나라고
막연하게 생각하였다.

틀어놓고도 소리만 대충 듣던 내가
점점 화면으로 눈길이 가게 되고,
이어서 빠져든 작품이다.

후에
그 드라마를 차태현의, 차태현을 위한, 차태현에 의한
드라마라고 일컬었고,
시청률도 30프로 대로 제법 나왔음에도
이상하게 드라마 사상 그다지 대접받는 분위기는 아니다.

대다수의 드라마가 그렇지만
줄리엣의 남자도 상당히 만화적이다.

특히 주인공 장기풍이 그렇다.
그는 전형적으로 만화적인 인물인데,

거기에 또한 리얼리티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건
역시 차태현이 제법 연기를 잘해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불행히도 내가 보기에 그가 연기를 잘한 것은
그 작품이 처음이자 마지막 같아서
그게 좀 안타깝지만..

줄리엣의 남자가 내 맘을 끈 것은,

적대적 m&a니
그것을 위한 치열한 주식과 위임장 대결,
주총 등등,

나와는 상당히 거리가 먼 모티브들이 우선 신선했다.
물론 절반 가량은 당췌 뭔 소린지 이해를 못했지만.
(난 그런 쪽에 매우 취약하다)

 

17부작인데 10부 정도까진 타이트한 흐름에

구성이 뛰어나고

빈틈없이 꽉 들어찬 느낌을 준다.

 

군더더기가 전혀 없고,

게다가 약간의 스릴과, 유머와, 정통 멜로와, 미스테리가

뒤섞이고,

 

거기에 제각각 개성있는 캐릭터와

색다른 작품 세계,

센스 있는 연출,

굉장히 특이한 극본 등등이

조화를 이루었고,

 

무엇보다

내게 가장 중요한 것,

 

즉 신선하다는 것이다.

 

이 신선함에 대한 나의 끝없는 갈구는

싫증나는 이 세상에

청량 음료 한 잔처럼

늘 내 등을 떠민다.

 

줄리엣의 남자의 구성은 매우 특이하다.

즉,

백화점 사장의 자살로 촉발된

갖가지 사건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인연을 엮어간다.

 

그 백화점 사장의 딸과

그 사장에게 준 어음을 유산으로 받은

사채업자의 손자, 날라리에 초망나니

거의 손댈 수 없는 악동인 백수 장기풍이 얽히면서

 

두 사람은 백화점을 살리는 것에

동상이몽격으로 힘을 합칠 수 밖에 없지만,

겉으론 으르렁대는 사이이다.

 

여기까진 흔히 볼 수 있는 구도이다.

 

그보다 더 특이한 건,

 

백화점 사장딸인 여주가 속해 있는

정통 멜로의 무거운 세계,

즉 여주와 남조가 주축이 되는

 

음모와 눈물과 사랑과 배신이 얼룩진

구태의연한 세계와,

 

장기풍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정신 사나운,당시만해도 신세대적인 세계,

 

만화적이고, 일회적이며,발랄유쾌명랑하면서

산만하고,가볍고 유머러스하다못해

거의 장난스럽기까지 한

엉망진창인 세계,

 

이 두 개의 양립할 수 없는 세계가

번갈아 펼쳐지며,

 

그러나

필연적으로 두 세계는

만날 수밖에 없고

 

물과 기름처럼

절대로 섞일 수 없을 듯한

 

그 두 세계가

어느 순간부터

 

점점 융합하기 시작하는

과정이 매혹적이다.

 

만일

그 부분이 구태의연하였다면

 

이 드라마의 매력은 완전히 제로였을 것이다.

 

다행히

 

중심 인물인 장기풍역의 차태현은

자신의 몸을 내던지는 열연으로

 

유례없는 캐릭터인

장기풍을 그럴싸하게 만들어낸다.

 

 

드라마의 주축을 이루는 세계가 두개이듯,
멜로도 두 가지로 진행된다.

여주와 남조의 사랑,
그리고 남주인 장기풍과 그를 사랑하는 여조와의 관계이다.

여주의 사랑이 정통 멜로틱하게 무겁고 침통하고 느릿하게 진행된다면,
장기풍 쪽은 신세대풍으로 가볍고 경쾌하며 경박하다.


여주는 남조와 오랫동안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러나
줄리엣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결국 자신이 사랑하는 남조의 부친이
자기 아버지 죽음의 배후 인물이라는 걸 알게 되고,
믿었던 약혼자마저 자신의 백화점을 빼앗기 위해
기를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에
그와 헤어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남자를 사랑한다.

원래 사랑이란 죽이려들면

갑자기 싱싱해지면서

기를 쓰고 살겠다고 악을 쓰며 바락바락 대드는

골치 아픈 물건인 것이다.


여주와 남주인 장기풍과는 앙숙이며 여주가 남주의 채무자이기에
관계가 성립되었을 뿐이고,
둘 사이에 그 어떤 연애 관계 내지 인간 관계가 생길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는다.

공주병인 여주는 당연히 자기가 속한

고상한 세계완 너무나 거리가 먼 장기풍을 매우 혐오하고,

그렇다고 장기풍 쪽에서 그럴 기미도 없다.

아니 당췌 그가 누군가를 진지하게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내가 이 드라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이
공주님과 거리의 양아치 같은 장기풍이 서로 다른 꿍꿍이로
동거를 시작하면서 앙숙처럼 지내는 것까진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지만,

그리고 그럴 경우
차츰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싹튼다던지
뭐 그런 식으로 얘기가 진행되기 마련이지만

이 드라마에서만은 도통 그럴 거라곤 짐작도 하지 못했다가,
뜻밖에도 장기풍이 냉혹하게만 대하던 그녀를
내심으론
처음부터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것을
은연중에 보여주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즉 도저히 불가능하게만 보이던

그 두 사람의 관계가

점차로 거리를 좁혀가는 과정이

참으로 매력적이다.

 

그러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우린 장기풍이란 인물의 외면에서 차츰 내면으로

힘겹게 들어가야한다.

 

그에게 내면이란 것이 있다면 말이다.

그런데

그에게 내면이란 것이

희미하게나마 보이기 시작하고

미로를 헤매듯

그 안으로 들어가서

어둠 속을 더듬듯이

그의 내면 세계 깊숙히 숨겨진

진실들과 만날 때,

 

그건 경이롭다.



장기풍이란 인물 자체가 흔히 말하는 껄렁껄렁한 백수에,날라리에
방탕하고 손댈 수 없는 망나니이고,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기막힌 두뇌의 소유자이며
잔머리의 귀재이고
지네밭에 내던져도 그 지네들을 부하로 만들어서
세상에 나타날만큼의 끈질긴 승부근성으로 뭉친 사내다.

그런데 장기풍은 악동에서

성숙한 남자로 점점 변신해가는데,

그 과정이 자연스럽고

우리는 그의 변신에 동참하게 된다.

 

남성성을 느끼기엔 매우 부족한 배우 차태현은

연기력으로 그 약점을 커버하는데,

 

실제로 그는 후반으로 치달으면서

점차로 남자로 변모해가는 것이다.

 

그것은 

매우 깊고, 헌신적이지만

결코 질척이진 않는,

 

자기 자신을 내던지면서도 아무 댓가로 바라지 않음에도

아주 담백한,

 

너무나 처연하고 가슴 시린 사랑이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마음에 품고도

어느 경우에도 절대로 나약해지거나 흔들리지 않는

장기풍식 사랑법이다.

 

그의 내면과 그 외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더더욱 매혹적이다.

 

 

그래서
비록 악동으로 시작하지만
극 후반부 쯤엔
그의 절절한 사랑에 우린 휘말릴 수밖에 없으며,
그 사랑이 그를 성장시킨만큼,
우리도 그를 보는 시각이 성장해 있게끔 한다.


장기풍의 사랑은

애인의 사랑, 남자의 사랑이라기보단
부성애적 사랑을 느끼게 한다.
그러면서도 그 안에 절절하고 먹먹함을
교묘하게 담아낸다.

그녀를 감히 원하진 않지만, 아예 그럴 꿈도 꾸지 못하지만
그녀가 원하면 별을 따서라도 가져다 줄 수 있는 사랑,
그러나 직접 별을 따다 주기보단
하늘에 사다리를 놓아주고 그녀가 직접 올라가서 따게 하는 식이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것을 남김없이 내어주고
돌아설 때서야
비로소 여주는 자기가 어느덧 장기풍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만
그는 떠나는 것으로 드라마는 끝난다.

당시에
네티즌들은 둘을 맺어주지 않았다고 해서
시청자 게시판이 뒤집어질 정도로 들썩였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장기풍식 사랑법엔 그게 더 어울린다.

그녀와 결국은 맺어졌다면 구태의연하였을 것이다.

내가 줄리엣의 남자를 좋아하는 건
정말이지 너무나 새롭고, 구태의연하지 않고,
기발하다는 것이었기 때문에,
난 물론 힘겹게 그녀에게서 돌아서는 장기풍이 가슴 아파서,
그녀를 떠나며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것을 절대로 내색하지 못하는 그가 아파서
펑펑 울긴 했지만
그 결말엔 별 유감이 없었다.

 

덧붙이자면

지금은 이름이 제법 나있는 지진희씨의 데뷔작이며,

그는 줄리엣의 남자에서

여주의 약혼자이며,

스스로 원치 않는 악역 아닌 악역이 되버린

비운의 남조역을 맡았고,

 

여주는

예지원이다.

 

그녀는 매우 서투른 연기를 했다는 비난을 듣지만,

 

그러나

그 역에 어울린다.

 

매우 아름답기도 하다.

 

연기는 뭐...

난 그닥 거슬리진 않았다.

 

썩 잘했다고 볼 순 없지만

신선한 마스크가

줄리엣 역에 잘 어울렷던 것 같다.

 

마치 올리비아 핫세가 그랬듯이..ㅋㅋ

 

또한 김민희가

천방지축 여조 역을 맡았는데

 

그녀의 연기는 심히 곤욕스럽다.

뿐만 아니라 캐릭터가 변질된 유일한 케이스이다.

 

앞부분에선 전형적인 젊고 경박하고

장기풍 못지 않게 손댈 수 없이 제멋대로인,

그러나 역시 장기풍처럼 절대로 나약하거나 만만하지 않은

당찬 캐릭터였었는데

갑자기 후반으로 가면서

순정적으로 장기풍을 사랑하는 것 까진 좋은데

웬 눈물의 여왕이 되어

연약하게 장기풍의 발목을 잡질 않나,

돈으로 사랑을 사겠다고 생난리부르스를 치질 않나.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걸 뻔히 알면서

그 남자를 기어이 자기 것으로 하려는 미련을

못버리질 않나..

 

 

따라서

그녀와 그녀의 캐릭터가

이 드라마의 옥의 티라면 티겠다.

 

그 외엔

거의 모든 연기자들이

 

명연기를 보여주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김성령씨의 악역과 콤비를 이루는

조재현씨의 기막히는 코믹 연기,

 

사채업계의 거두로 나오는

강부자와 신구씨의 대결도 볼만하다.

 

특이하고

신선하고

아름다운 장면들이 가득한

줄리엣의 남자,

 

거기에

젊은이들이 펼치는

자유분방하고 무한하게 열려 있는 세계와

 

구태의연한 기득권 세력과의

손에 땀을 쥐게하는

대결 등등이

 

가슴 저리는 장기풍의 사랑과 더불어

 

날 사로잡았던 드라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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