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추억(4) 본문
그가 나에게 말한 적이 있다.
'내 꿈은 이태리로 유학가는거야..'
우린 작은 카페에 앉아 있었던 것 같다.
학교에서 우연히(?)만나서
함께 시내로 나가서 여기저기 돌아다녔다.
난 그를 교보문고로 데려갔었다.
그는 거기서 내게 장난감처럼 생긴
샤프 연필을 선물했다.
그 연필은 그러나..
어느날 방안에서 사라졌다.
분명히 어느 순간까지 내 앞에 있었는데
갑자기 사라진 것이다.
그걸 찾아서
장롱까지 끄집어냈던 기억이 난다.
하긴
그런 일이 종종 있다.
어느날 어느 물건이 감쪽같이 사라진다.
최근에도 그런 적이 있다.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바지를 벗어
옷방에 던져두었다.
대개는 옷을 챙기는 게 귀찮아서
벗어서 옷방에 내던져두었다가
나중에 엉망진창인 그 방에 들어가서
하나씩 정리하곤 한다.
그 바지는 결코 펜처럼 작은 물건이 아니다.
두꺼운 겨울 바지이다.
방바닥에 내팽개친 것을 분명히 내눈으로 보았다.
그 주머니엔 매우 중요한 물건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조금 있다가 정리해서 걸어두려고
들어가보니
바지가 사라졌다.
옷장을 다 뒤집고,
이불장도 뒤집고,
별별 데를 다 뒤집어도 사라져버렸다.
엄마와 난 가끔
그런 일을 당할 때마다
이렇게 말한다.
'4차원의 세계로 빨려 들어갔나봐..'
아니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진다.
내가 이 모든 기억을 떠올린 건
작년인가?
우연히 그의 노래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 전까진
난 그의 소식을 누군가 전해줄 때마다
건성으로 들었던 것이다.
한꺼번에 모든 기억들이 되살아난 후에
난 깜짝 놀랐다.
그와 함께 나눈 얼마 안되는 시간들이
얼마나 신선하고
아름다운 것들이었는지
잊고 살았다는 것이 놀라왔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순간들을
산산조각낸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그라고 난 늘 생각해왔다.
그러나
정말 그럴까..
아니다.
그런 순간들을 망가뜨리는 건
아주 작은 순간의 실수..
아주 섬세한 실수 하나이다.
그리고
우린 그걸 모른다.
아니
난 그걸 모른다.
난
그토록 이기적이고 무심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와 밤새워 걸으며
온갖 얘길 나누었던 그 날 이후
난 그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만나려면 만날 수도 있었지만
난 일부러 학교에 가지 않고 있었다.
난 그가 매일같이 학교에 나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따라서 그를 만나고 싶으면
학교에 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는 서울로 유학온 후에 누나 집에서 기거하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집에 있는 게 불편했을 것이고,
연습하기 위해서인지 뭔지 모르지만
늘
학교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었다.
아니 대개의 남자애들은
방학 때도
학교에서 살다시피한다.
하지만 난 방학한 후론
학교에 잘 가지 않았다.
난 학교를 좋아하지 않았던 것이다.
난 냉기가 감도는 그 넓직하고 썰렁한 로비며,
어쩐지 마음이 심란해지는 연습실에 감도는 스산함..
매우 아름답지만
동시에 마음이 가지 않는
음악관과 주변의 숲길이
싫었다.
그토록 아름다운 정경을
왜 싫어했는지 모르겠다.
사실 난 졸업할 때까지
그 건물을 싫어했고
가능한
그 건물에서
도망치기 바빠던 것이다.
시설이 잘 되어 있고,
강당마다
최고의 피아노가 놓여진
최고급 음악관을
왜 그토록 싫어했는지?
그렇다고
내가 학교에 전혀 가지 않은 건 아니다.
가끔 갔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를 만날 수가 없었다.
우린 계속 어긋났다.
난 그가 날 찾으러 피아노과 연습실로 내려오곤 했다는 소릴 들었다.
그러기를 수차례,
계속 어긋나서 만날 수 없었던 우리가 만난 건
바로 그날이었다.
지금도
피아노과가 있는 층으로 내려오다가
막 계단을 올라와
로비로 들어선 나를 발견하자마자
다짜고짜로
달려와서
껴안던 그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내가 그를 발견하고
반가움을 느끼기도 전에
난 그에게 안겨 있었다.
깜짝 놀라서 밀어냈다.
그날 우린 소위 말하는 데이트란 것을 했던 것 같다.
정식 데이트는 아니고,
함께 대책없이 걸었던 그 밤 이후
처음 만나는 거라
그냥 반가움에
무작정 다시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보다 체계적인 만남의 단계에 들어섰다고나 할까?ㅋㅋ
우린 소개팅으로 만나거나
다른데서 만난게 아니라
학교 친구였으니까.
우린 함께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내가 그를 시내로 데려간 것이다.
그는 교보문고엔 처음 온 듯 했다.
그가 서울에 처음 온 것인지
그건 잘 모르겠다.
들은 것 같기도 하지만
기억에 없다.
시내를 싸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하고
놀다가
잠시 카페에 마주 앉아서
커피를 마실 때
그가 그런 말을 한 것이다.
난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
점심 먹을 돈도 없이(누나란 여자는 꽤 부자인 것 같은데 왜 그에게 용돈도 제대로 주지 않았을까?)
겨우 알몸만 면할 정도의 옷차림에
부랑아같은 느낌을 주는 그가
이태리로 유학을?
아무리 생각해봐도
현실성이 떨어진다.
게다가
난 그가 비록 수석을 차지하곤 하지만
그렇게까지 노래를 잘한다곤 생각지 않았다.
지금 생각하면
성악하는 사람치곤
너무 말라서
그랬다는 걸 몰랐던 것 같다.
대개 성악과 애들은
그 어린 나이에도
다들 뚱뚱하고 한체격하는데
그는 키는 컸지만
너무 말라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매우 아름다운 음성인건
확실하지만
더 발전할 수 있을진
갸우뚱이었고,
무엇보다
유학이라니?
내 마음 속엔
니가 무슨 재주로 유학을 가니?
이런 맘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난
'글쎄...그건 매우 힘들다고 봐'
라고 대답했던 것이다.
그는 그 말에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곤 머리를 세차게 흔들더니
'못가도 상관없어~!
난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어~!'
라고 외쳤다.
난 그때
그에게 그렇게 말한 걸 두고두고 후회한다.
왜냐면
후에 난 우연히
그가 이태리로 유학가서 각종 콩쿨을 휩쓸고
오페라 가수로 성공했다는 소릴 들었으니까.
난 그때
진심으로 그를 위해
기뻐했고,
내가 그 순간에
왜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거야
라고 말해주지 않았을까
새삼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아주 잠깐..
난 그를 잊고 있었고,
그 말을 들어도 아무 느낌이 없었던 것이다.
그저
그가 꿈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그의 힘든 상황을 극복하고
꿈을 이루었다는 사실에
그저
박수를 쳐주고 싶었을 뿐이다.
난 꿈을 이룬 사람을 대단하게 생각하니까.
내 꿈은 뭐였더라?
난 이런 말을 하곤 했다.
난 프랑스에 가서
가난한 피아니스트가 되고 싶어..
왜 하필 가난한 피아니스트야?
그러게..
난 아마도
슈베르트니, 하는
고전적인 천재들의 전기를 너무 읽었나봐~ㅋㅋㅋ
그래..
그는 꿈을 이루었다.
그는 성공했다.
난
그 소식을 듣고도
잠시 다행이라고 생각했을 뿐
이내 잊었다.
어느날
그의 노래를
인터넷에서 발견하고
들을 때까지...
그 노래를 듣는 순간
난 영혼을 뒤흔드는
충격을 받았다.
그는 정말 대단한 성악가가 되어 있었다.
얼마나 노력했기에
저렇게 달라졌을까..
타고난 미성이
이젠 힘을 얻고
테크닉까지 생겼으며,,
그러나
그의 기교는
단지 기교가 아니라
영혼을 울리는
진정성을 담고 있었다.
아마도
그가 살아온
인생역경이
그의 노래에 담겨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