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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결혼'

모놀로그 2023. 7. 12. 12:58

90년 대에 대한 향수에 불타는 요즈음,

한꺼번에 90년 대 드라마를 왕창 정주행 중이다.

 

그 중,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던 드라마 중 하나였던

'결혼'의 정주행을 마쳤다.

 

감상 결과는 한 마디로 고구마 몇 천 개를 한꺼번에

목구멍에 쑤셔박힌 기분이다.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그런 드라마가 아니었다.

혹은 내가 그만큼 변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때의 나는 결혼이라는 드라마의 처절한 비극성을

감당할 수도, 수용할 수도 있는 상태였나보다.

 

이 드라마를 한 마디로 평하라고 한다면, 

'질척임'의 진수라고 말하고 싶다.

 

첫째 딸은 수재였으나 고아인 가난한 고학생에게

빠져서 고생길을 자처하고

헌신하던 끝에

버림받고 몸부림치는 것으로 드라마 내내

보는 사람을 피곤하게 한다.

나라도 버리고 싶겠다 싶을 정도라,

남편이 돈많고, 활동적이고, 당당한 여자에게 빠지는 것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그 남편이란 놈도 마찬가지이다.

침울한 표정에,지저분한 옷차림,말 수 적고 생기도 없고

늘 졸리는 표정으로 구석에 처박혀 잠만 자는 드라마 피디이다.

후줄그레하고 답답해서 몇 대 갈겨주고 싶은 남자이다.

 

한쌍의 바퀴벌레 같은 이 부부는,

처음부터 끝까지 질척질척댄다.

 

특히 지영이라는 여자역을 맡은 최명길은

이 드라마로 상을 탔다는데,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왜냐면 이 여자가

드라마 50부작 내내 하는 일이라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뭐라뭐라 중얼거리거나,

축 늘어진 인물만으로 미칠 지경인데,

에 못지 않은 칙칙한 표정은 그야말로 남편과 쌍벽을 이루며,

손가락 몇 개만 보일 정도로 늘어진 소매와,

발목까지 덮는 기다란 스커트,

빨리 좀 걸으라고 등을 떠밀고 싶어지는 걸음걸이로 일관한다.

 

왕년에 대단한 수재였다는 지영이 원하는 건,

사랑받고 싶다는 것 뿐이다.

하기야 십년을 헌신한 남편에게 버림받고,

실은 남편이 자기를 사랑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게다가 외도하는 남자를 붙잡겠다고 별별 짓 다하며

진을 빼고 난 결과가 파탄이니 그럴 만도 하겠지만,

그 사랑이라는 게 과연 목숨을 걸 가치가 있는걸까?

 

그 여자는 남편과의 기나긴 싸움 끝에

인간은 혼자이며, 사랑은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긴 커녕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려던 희망마저 사라지자

목숨을 내던지는 것이다.

 

이 드라마 보는 내내

내 숨통을 막히게 한 보기드문 캐릭터임엔 틀림없다.

혹시 보는 사람마저 우울증에 걸리게 한 공으로

상을 탄 건가?의심이 가는 인물이다.

 

둘째 딸은 그나마 저 미친 집안의 상식에선 벗어난 인물이긴 한데,

그 역을 맡은 배우가 문제이다.

 

조민수가 맡았는데,

젊은 시절의 조민수는 엄청난 미인이다는 사실을

난 기억하고 있다.

미모로 따지면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정도이다.

하지만 듣는 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목소리가 문제인데,

이 배우는 어느 작품에서나 그 목소리를 한 톤 더 높여서

악을 쓰는 대사법으로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시비를 걸고, 악을 쓰고, 비웃고, 비꼬고, 화를 낸다.

뭐 그래도 고구마를 처먹게 만들진 않는다는 점에서

작가가 그나마 보는 사람을 완전히 죽일 작정은 아니었나보다.

 

하지만 그 여자가 작정하고 떠들기 시작하면

통쾌하다기보단, 좀 조용히 말하라고 부탁하고 싶다.

 

유일하게 자신의 엄마에게서 독립되어 있고,

자기 소신에 따라 자기랑 비슷하지만,

실은 정반대인 조용한 남자와 결혼한다.

이 남자는, 사려깊고 맑은 영혼이긴 한데

대신에 타협의 왕이다.

모든 것에 '타협'을 원하는 인물이라 역시 중요한 순간엔 고구마를 먹인다.

 

세째 딸은

내가 정말 이쁘다고 생각하는 배우 중 하나인,유호정이다.

 

예전 보았을 때 가장 기억에 남아 있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내가 생각하고 있던 그런 캐릭터가 아니다.

혐오감을 느끼게 하기론 남부럽지 않고, 얄밉기까지 한 인물이다.

 

이 여자의 특기는,

 

축 늘어져서 하염없이 유령처럼 떠도는 큰 언니나,

걸핏하면 시비 걸면서 악을 쓰는 둘째와는 다르게

자기 합리화를 하다가 갑자기 침대나 소파 위에 쓰러져서 우는 것이다.

 

'나 어떡해?'

 

엄마의 강권에 못이겨 등떠밀리는 듯 하지만,

실은 엄마가 원하는 것이 또한 그 여자가 원하는 것이다.

 

고급차와, 큰 저택,쓰고도 남을 돈다발, 명품, 그리고 보석 등등

그래서 가난한 애인을 버리고 그런 남자를 찾아간다.

 

물론 그 결과는 끔찍하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침대 위에 엎어져서 울고,

그러면서 선택은 항상 편의주의적인, 자기가 원하는 '돈'이다.

 

엄마라는 여자는 둘째 딸과 비슷하게 오로지 악만 쓰고,

세째 딸처럼 돈이라면 환장하는 이른바 '복부인'이다.

 

남편이라는 교수는

아내 덕분에 풍요로움을 누리면서도 돈에 환장하는 딸이나 아내를 내심 멸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 인간은 철저한 방관자, 그리고 역시나 '타협'의 화신이다.

 

대체 왜 이 드라마가 내 기억 속에 강렬하게 남아 있고,

그래서 90 년 대의 향수 속에 내내 자리잡고 있었는지 의아하다.

 

밥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걷는 것도, 놀라는 것도, 화내는 것도

느려터져서 쥐어박고 등을 떠밀고 싶은 큰 딸,

 

듣기 싫은 음성으로 걸핏하면 소리를 질러대서 귀를 막고 싶은 이쁜 둘째 딸,

그리고 역시 이쁘긴 하지만

지가 원하는 선택을 해놓고는 침대 위에 엎어져서 눈물 질질 짜는 세째

 

마지막으로때려주고 싶은 두 남자가 있는데,

 

외도한 남편과 새로운 애인인 치과의사이다.

 

둘 다 우유부단하고 매력이라곤 없음에도,

뭔가 있어보이는 고뇌에 찬 얼굴을 하고 있는데,

남편은 딱 지 여편네 스타일의 남성 버전이라

역시 등떠밀고 싶은 인물이고,

 

치과의사 역시 지영의 남자답게 답답하고 권태롭고 생동감 없는인물이다.

막내의 연인 역의 남자는,

고지식하고 순진한 고시생이다.

순정적인 남자들이 그러하듯, 답답하기론 넘부럽지 않다.

뿐이랴, 학생 운동까지 했다는 인물이

부르조아의 전형인 여자에게 죽도록 집착하여 몸부림친다.

 

여자를 잘 모르는 인물이라하는 짓이 촌스럽다.

배우는 솔직히 내가 보기엔 그 배역에 딱 어울리는느낌이다.

별로 좋지 않는 의미에서 말이다.

 

마음 붙이고 볼 만한 구석이 전혀 없는역겨움으로 일관된 결혼,

 

드라마 내내 귀가 아프게 틀어주는 '비창'

 

이 노래도 그땐 좋아했었고, 

다시 들으니 새삼 좋지만,

너무 지나치게 틀어주니 노래가 아까와서

드라마에서 따로 떼어내고 싶어진다.

 

'결혼'이 '김수현 작가'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었다는 걸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는데

역시나 그 여자의 소설을 드라마화한 것이라고 한다.

 

설마 이 지저분하고 답답한 드라마가 김수현 소설이라고?

하기야 그 작가가 쓴 소설을 드라마화한 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너무 칙칙하고 답답하고 처연해서 김수현답지 않다.

 

마지막으로,검색해보면

세째가 결국엔 남편에게로 돌아갈 것처럼 이해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보기엔 그 반대이다.

 

전 연인과의 눈물의 포옹,

그러나 이별의 포옹이 아니라

새출발을 기약하는 포옹이라

예전의 생활로 되돌아갈 것 같진 않다.

 

왜 전남편과, 부유한 생활을 택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다시 본 '결혼'은

내가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던

그런 드라마가 전혀 아니었으며,

본방 당시 숨죽이며 봤던 

90년 대 몇 편 안 본몇 몇 드라마 중 하나였음에도

왜 그렇게 열심히 봤었는지,

왜 기억 속에 남아서 다시 보고 싶어 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 그런 드라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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