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숙종조의 여인들의 운명의 실타래 주범은 '숙종' 본문
'새로운 시각, 해석'이 유행하는 시대이다.
지금까지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서
'희빈 장씨는 사악하긴 커녕, 불쌍한 정치적 희생양,(??)
인현왕후는 알려진 바와 달리, 성깔있는 못된 여인네,
그리고 존재감 약하던 숙빈은 알고보니 앙큼하고 야심찬 고자질쟁이
무엇보다 숙종은 저 세 여인을 정치적으로 이용해먹은 교활한 왕으로,
저 여인네들의 얼키고 설킨 운명의 실타래를 움켜진 숨겨진 흑막,
등등으로 관점을 바꾸고, 그 새로운 시각에 그 시절의 사건들을 두드려 맞추려다보니
오히려 그 전보다 훨씬 심각한 왜곡이 생겨버렸다.
마치 세뇌라도 하듯,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글을 읽다보면,
저 위의 세 여인네의 새로운 평가를 떠들어대고 있다.
내가 보기엔 전혀 아닌데 말이다.
왕조 안의 사건들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아닌 것이다.
어떤 블로그에서 숙종에 대해서 한 마디로 결론을 내린 것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는데,
'변덕스러운' 사람이라고 평가했다. 매우 동감한다. 그는 정말 변덕스러운 사람이다.
그런데 그 변덕은 그때 상황에선 늘 진심이었다는 게 문제!!
난 거기에 덧붙여 매우 '기분파'라고 생각한다.
냉철하면서도 감성적인 정말 이상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오죽하면 그 어미인 극성맘 명성왕후도 어렸을 때부터 손발 다 들었다고 외쳤을까?
내가 실록을 보면서 그의 행적과 언행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나름 내린 결론도 비슷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저 여자들을 이용한 게 아니라,
그때 그때의 자신의 판단과 기분과 감정에 따라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기는
타입의 사람이었으며, 그런 성정과 급한 성격,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두뇌가 시키는대로
닥치는대로 행동에 옮기다보니,
세 여인이 모두 정치적 희생양이 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예컨대, 굳이 장옥정을 중전으로 만들지 않았다면,
그 여자를 죽일 필요까진 없었고, 인현왕후의 일생도 그토록 처참하게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세자 책봉을 그토록 서두르지만 않았어도
후에 낳은 아들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왕재를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니,
경종과 연잉군의 인생이 그토록 엉망이 되진 않았을 것이다.
그는 늘 서둘러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고, 그것을 후회하고, 뒤집기를 반복하며여러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여인들을 박복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는 한 번 미워하면, 잔인할 정도로, 죽도록 미워하고,
한 번 사랑하면 물불 안가리고 사랑하지만,
대신에 변덕스럽고 명석한 사람답게 자신이 저지른 실수나
그 결과에 대해선 또 곧바로 후회하기도 하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숙종은 후궁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인경 왕후 시절에는 나이가 어리기도 했지만, 20살에 왕후가 사망할 때까지 후궁은 없었다.
희빈에게 빠진 이후에도 후궁은 없었다.
적어도 양다리를 걸치거나, 사랑을 골고루 배분하는 성격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종의 외곩수 타입??
인현왕후와 간택 후궁인 '영빈 김씨'라는 어마무시한 서인의 핵심 집안에서
두 여인을 들이긴 했지만,
평생 두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다. 특히 영빈 김씨는 평생을 거들떠보지도 않을만큼
미워했다고 한다.
무엇보다 겨우 14세에 즉위한 숙종은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평생 못살게 굴다가 일찌감치 죽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서인 세력을 증오했다.
그가 가장 증오한 사람은 송시열,
당대의 거물이자, 노회한 학자이며 정치가인 그를
트집잡아 사사해버린 어린 왕이었다.
그는 감히 왕을 자기들보다 아래로 내려다보며 으시대는 '사대부'라는 족속을 혐오했다.
그는 서인을 쳐내는 데 사력을 다했지만,
인경왕후가 죽자, 또다시 서인의 거물 집안에서 왕후와 간택 후궁을
조선조 최고의 극성맘인 명성왕후 때문에 들여야했다.
그는 서인 집안 여자에게서 아들을 낳고 싶어하지 않았기에,
장옥정이 회임하여 아들을 낳자마자
생트집을 잡아서 인현왕후를 세상에 없는 악녀로 만들어서
내치고, 그것을 방해하려는 송시열도 죽여버림과 동시에
환국을 통해 남인 세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장옥정의 아들을 세자로 재빨리 삼았을 뿐 아니라,
그 세자의 어미를 중전으로 승격시켰는데,
난 그것이 단지 장옥정에 대한 애정 때문이었다고 보진 않는다.
첫째로,
후궁이라곤 장옥정뿐이었는데, 그녀 나이가 30이 넘어 있었고,
왕 자신도 30이 가까와서 처음 본 아들이었다.
다시 말해서, 다른 후궁에게서 아들을 본다는 보장을 할 수도 없는 처지에다가
상대는 총애하는 여인이고, 게다가 서인과 무관했고, 거부의 조카라는 점에서
당시의 숙종에게는 최고의 왕비감이었다.
단지 양반 출신이 아니라는 것이 문제였기에, 아예 중궁전으로 승격시켜버림으로써,
아들인 세자가 장차 천출이라는 손가락질을 받을 싹도 잘라버렸다.
후궁의 자식이 왕이 되었을 때,
잘난 체 하는 '사대부'들이 그 왕을 만만하게 보리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때까진 적어도 광해군을 제외하곤 후궁의 자식이 왕이 된 적도 없었다.
광해군의 경우엔, 비록 후궁의 자식이었다지만,
어미인 '공빈 김씨'가 그렇게 하찮은 집안 여식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정궁도 없었던 터에 왜란이 일어나 나라가 뒤집어진 상태에서
왜란에서 큰 공을 세운 터라 반대하고 자시고, 유일한 대안이었기에 신하들도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이런 경솔한 행동들이 후에 한꺼번에 숙종을 딜렘마에 빠트린다.
첫째로,
세자는 총명하긴 했으나, 병약하고 유약했다.
중전이 된 장씨의 세력은 권력욕이 만만치 않았는데,
자기처럼 그것을 누를 만큼의 패기가 카리스마 같은 건 없어보였기에
슬슬 나라 걱정이 되기 시작했을 것이다.
자기가 죽고 난 후에 과연 세자가 외척을 누르고 사대부들을 휘어잡으며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까?
또한 줄줄이 아들이 태어나면서 경종을 세자로 일찌감치 책봉해버린 것을
은근히 후회하기까지 한다.
둘째로,
세월이 흘러 나이가 40이 되어가면서 미색이 시들기 시작한 장씨는,
소시쩍, 일개 궁녀 시절에 왕과 희롱하다가
중궁전으로 뛰어들어가서 감히!!소란을 피우던 패기가
중년 여인의 욕심과 합세하여 극성스럽고 총애받던 기억을 믿고 기세등등한
여편네가 되어 있었을 것이니
이 역시 걱정이었을 것이다.
내가 죽고나면, 세자가 저 극성맞은 어미를 감당할 수 있을까?
세째로
한 마디로 변덕스럽고, 충동적인 남자답게 그의 사랑은 당연히 세월과 함께 식어갔을 것이다.
그러면서 숙빈 최씨가 갑작스레 등장하는데,
그 타이밍은 이해가 간다쳐도
대뜸 숙원 첩지를 내린 것은
총애의 표현일까? 장씨에 대한 경계일까?
정치적 모션일까? 그만큼 애정이 깊어서였을까?
뿐이랴,그 숙원이라는 최씨는 아들만 내리 셋이나 낳으면서
눈부신 승진을 거듭한다.
일년에 한번씩 승급하여 귀인까지 단숨에 올라가는 아주 특별한 케이스였다.
하지만 실록엔 여전히 그녀가 왜 그토록 눈부시게 빠른 승진을 했는지?
그녀가 어떤 인물이며, 배경이 무엇이며, 어디서 불쑥 나타났는지 언급이 없다.
아들을 셋이나 낳았고, 그 중 두명을 잃었으되,
장씨가 총애를 잃은 상태에서 유일하게 왕의 곁에 있던 여인치곤
여전히, 출생이나 그 정치적 배경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것이다.
굳이 인현왕후와의 인연도 전혀 언급되는 바가 없다.
그런 것들은 주로 야사나 소설, 특히 '수문록'이라는 책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별로 신빙성이 없는 것이
주인공이 최씨가 아니라 인현왕후인 것이다.
하지만 굳이 말하자고 하면,
그녀의 출생의 비밀 중 하나가 인현왕후 본가에서 길에서 주운 아이로 왕후가 입궁할 때
몸종으로 따라왔다는 썰이 있는 것이그나마 신빙성이 있어 보이는고로
7살 짜리 애기나인이 무수리로 입궁했다는 썰보단
이쪽이 훨씬 말이되고, 인현왕후와의 특별한 인연도 설명이 되긴 하다.
인현왕후와의 인연이 설명되면,천민 출신이라는 그녀가
서인세력을 뒷배로 거느린 것도 설명이 되며,노론이 '경종'의 폐위를 거론하며 '연잉군'을 적극 밀어준 것도 말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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