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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사도'-한중록을 정독했다면 매우 부족한 작품(1)

모놀로그 2016. 1. 27. 15:10

영화 '사도'에 관한 리뷰...의 제목이나 평가및 기사를 보면

조금 놀라게 된다.


한 마디로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는 '사도세자'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사도'는 참으로 새롭다나 뭐라나.


하지만 나처럼 한중록을 수십번 읽은 사람이라면,

영화 '사도'는 전혀 새롭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너무 허술하고 산만하기까지 하다.



아주 오래 전,

그러니까 내가 어렸을 때 봤던 사도세자 관련 드라마는

오히려 한중록을 완벽하게 텍스트로 삼아

고대로 재현했다 싶을 정도였다.


상대가 왕이요, 세자이니만큼

정치적 요소가 전혀 배제될 수 없었음에도

순수하게 가정비극으로만 다루고 있었다.


하지만 이덕일의 '노론음모설'이 상당히 매력적이었던지

아니면

더는 가정 비극으로만 사도세자 관련 극을 만드는 데

한계를 느꼈음인지,


'새로운 해석'을 좋아하는 21세기적 사고방식 때문인지

이후에 만들어진 영조네 집구석 이야기는


차라리 더 심각하게 왜곡되고 만다.

이를테면


드라마 '이산'같은 경우가 그러한데

보고 있기가 민망할 정도였다.


그 외에도 '정조암살 미스테리 8일'인가 뭔가 하는

케이블 드라마는 도저히 봐줄 수가 없을 지경으로

아예 한중록까지 왜곡해버리고 있다.


한중록이 단행본으로 출시된 것이 언제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그 책을 구입한 것은

90년 대 초반??


물론, 난 그것이 완역본이 아니라는 건 몰랐다.


정병설 교수가 한중록을 완역하여 새롭게 출판했다는 사실도

나처럼 무지하고 게으른 인간은 작년에야 처음 알았을 정도이다.


하지만

완역본이던 아니던

임오화변에 대해선 그 기본 뼈대가 뭐 그리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고 본다.



난 적어도 이덕일의 '노론음모설'보단

혜경궁의 '한중록'을 더 신뢰하는 편이기 때문이다.

이유는 단순해서

'한중록'이 그마나 더 말이 된다.


한중록에 관해선 이 블로그에 이미 포스팅한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그 기록을 맹신하기보다

그냥 객관적으로 적당히 걸러 읽으면서

인물들의 성향과 당시의 궁궐 분위기만 감안해도

그림이 그려지는데,

그건 이덕일의 괴상한 주장보단

훨씬 신빙성이 있다.


(그래서 난 정병설 교수가 그러하듯 혜경궁에 대해 참 놀라운 여자라고 생각한다.)


암튼

영화 '사도'는 한중록과, 거기에 '권력과 인간'

을 주요 텍스트로 삼고 만든 듯 하다만


과연,


영조의 성장 과정이 빚어낸 특이한 정신 세계와, 그로 인한 아들에 대한 불신이

점차 심한 증오로 변해가는 과정,

그리고 부왕에게 인정받지도 사랑받지도 못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기본적 인권을 짓밝히면서 점차 망가지는

세자의 비극을

과연 영화 '사도'가

밀도 있게 그려내고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아니오'

라고 답할 것이다.


내가 본 영화 '사도'는

영조의 실망도, 자수성가형 아버지의 기대치에 미치지 못하여

점차 엇나가는 아들의 비참함도

그것을 지켜보며 타들어가는 혜경궁의 애타는 마음도

제대로 그려낸 것이 하나도 없다.


또한 배우들의 연기도

너무 어정쩡해서

몰입하기가 쉽지 않다.

본질에 깊숙하게 닿기 전에

그냥 튕겨져 나오듯

겉돌고 있달까?


그나마 영조에 대한 묘사는 뛰어나지만

사도 세자는 영 부족하여

그의 갖가지 기행이나 황폐해져 가는 정신세계가 마침내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는 과정은

도무지가 영화에서 제대로 그려낸 것이 없어서

만일 한중록을 전혀 읽지 않았다면

공감하기 힘들었을 것 같단 말이다.


아니면

내가 한중록에 생생하게 그려진

세자 이선의 황폐함에 너무 익숙해졌고, 그 비참함을 견디지 못한

세자의 광폭함에 넌더리를 낸 탓인지도 모르겠다.


만일

영화 '사도'를 보고

새로운 시각 어쩌구 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중록을 읽지 않았거나,

이덕일의 노론음모설을 별 의심없이 받아들인 사람들이 아닐까

갸우뚱하게 된다.


한중록이 임오화변 내막의 바이블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안엔 상당한 진실이 내포되어 있고,

굳이 권력과 인간을 읽지 않았다 해도


실록이나 기타 영조 관련한 지식을 토대로

조금만 깊이 생각하면


사도세자 비극의 근원 정도는

누구나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거라고 난 생각하기에


대체 영화 '사도'가 어찌하여

새로운 시각의 영화라는 것인지

납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그나마 내가 다소는 흥미를 느끼고, 때론 웃음이 치밀기까지 하였으며,

혹은 봐줄 만하다고 생각한 부분은

영조에 관한 묘사이다.




일국의 왕의 내면의 옹색함과 궁상맞음과 편협함이 그대로

일상 속으로 배어나오게끔 연출한 기법은


이준익 감독의 걸작 '황산벌'을 연상시킨다.

그게 새로운 시각이라면 그건 나도 동의한다.


한중록에 답이 있다고 내가 주장한다면,

거기에 이미

영조의 저러한 궁색함이 혜경궁이 의도하지 않았을지라도

참으로 적나라하게 기록으로 남아 있다.


혜경궁이 영조를 보면서

참으로 일국의 군왕치곤 쪼잔하고 옹색한 인물이로다


라고 생각했을 리는 없지만,

그냥 있는 그대로, 혹은 자기가 본 그대로

기록만해도

절로 그려지는 영조의 모습이 바로 그러하다.


흔히 사극에서

왕이란 존재는

어떻든

범접하기 힘든 위엄이 있다.


그것을 감독들은

조명과 색채감만으로도 리얼리티를 살려준다.

오히려 그러는 것이 훨씬 쉬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도 속의 영조는 다르다.


우선

감독은 전혀 왕이라는 자리의 무거움과 존엄을 위해

무엇 하나 배려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덕분에

왕실은 참으로 꾀죄죄하다.


영조는 물론이고

왕실의 여인들이 그러하다.


드라마에서처럼 현란한 의상과 갖가지 치장으로

번쩍거리는 여인들은 고사하고


스산하기 짝이 없는 초라한 여인네들이

중전이요, 대비이고, 후궁들이다.


영조는 매우 검박한 인물이었음을 감안한 연출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궁궐의 아름다움을 한껏 살려주던

기존 사극 영화에 비해


사도 속의 전각과, 그 안에 살고 있는 후줄근한 중늙은 여인네들은,

양파껍질같이 겹겹이 들어앉은 비좁고도 옹색한 전각의 방들과 더불어,

쫓기는 듯 초조하고 여유가 없이 각박한 영조의 정신세계와 참으로 어울린다.


또한 그러한 영조의 정신세계가

영화 '사도'의 비극의 원천이라는 걸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송강호가 연기하는 영조는

촌스럽고, 교활하며, 위엄은 커녕 곤룡포를 입어도

옹색하게 보일 정도로

피폐하기만 하다.


이병헌의 '광해, 왕이 된 남자'와 비교해보면


감독이 영조가 입은 곤룡포조차 그를 돋보이게 하지 않게끔 의도적인 연출을 했음을

알 수가 있다.


굳이 송강호를 영조 역에 캐스팅한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광해의 이병헌은  어딘가 멋스러운 꾸밈새가 있지만,

(물론 그러한 겉치례가 이병헌이라는 배우에겐 잘 어울린다)

송강호를 캐스팅했을 때는

그런 겉치레는 아예 기대하지 말라는 관객에게 보내는 메시지일 것이다.

아니 애초에 송강호에게 겉치레 따위는 어울리지 않는다.


극단적인 이유이긴 하겠지만

송강호는

영조의 여러가지 얼굴 중에서

바로 그 각박함과 옹색함과 쫓기는 듯한 초조함을 매우 극대화할 경우

있는 그대로 연기할 수 있는 유일한 배우일지도 모른다.


송강호의 영조 대사 중,

인상적인 것이


세자를 데리고 종묘를 배알하며


'내 아버지는 부인에게 사약을 내리셨다'

'왕가에서 자식을 원수처럼 기른다는 뜻을 이제 알겠느냐'

'난 여기 종묘에 올 때마다 조상들의 피울음 소리를 듣는다'

는 부분이다.


아마,

이것이

영화 '사도'의 핵심 대사가 아닐까 싶다.


아비이기 전에

그리고 지아비이기 전에

'군왕'일 수 밖에 없었을,

조선조 중기 이후의 매우 취약한 '왕권'과


그것을 숙종조에 이르러

겨우 강화시켜고

영조는 황형인 경종대에 다시금 무너질 뻔한 왕권을

지켜내었다.


'너는 과연 내가 강화시킨 왕권을 지켜낼 수 있는 왕재인가?'

라는 질문을

영조는 그마나 멀쩡했던 시절의 세자에게 묻고 있다.


만일

세자가 그럴 만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었다면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따듯한 말 한 마디'

따위의 영조가 듣기에 참으로 한가하기 그지 없는

푸념을 하면서 엇나가진 않았을 것이고,


세자의 그러한 감성적인 면이

영조가 조선조의 각박한 왕권을 세자에게 물려줄 수 없다고

생각한 근원일 것이며,


내가 생각해도

세자 이선은 그러하다.


너무나 단절된 부자간의 소통이 안쓰러우며


영화 '사도' 중에선


'종묘의 대화'

장면이 가장 인상적이고 가슴 시리다.


고도의 정치성이 없이는

감당할 수 없었던

조선 중기에서 말기로 이어지는 아슬아슬한 왕조의 맥을 이어가는

막중한 임무를

영조는 자각하고 있었고,


그 임무를 물려주기엔

세자 이선은 부족한 인물이었다.


한 마디로


영화 '사도'는


한때 총애했던 희빈 장씨에게 사약을 내리면서까지

지키고자 했던 조선의 왕권을 이어받은 영조가


아비로선 아들을 죽일 수 없지만


군왕으로선 자질이 부족한 후계자를 죽일 수 있다는,

혹은 죽일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 같다.

물론,

이것은 애초에 영조가 세자에게 부친으로서의 자애를 주지 못하여

그것을 갈망하던

세자를 미치게 만든 단초에 대한

변명이기도 하다.


영조는 단 한번도 아비였던 적이 없다.

그는 이선의 탄생조차 왕조의 맥을 자기가 끊지 않았다는

안도로 받아들였을 뿐이고,


아들이 아니라 왕조의 후계자로 봤기에

백일도 안 된 아기를

동궁으로 삼아 동궁전으로 보내버리는 것이다.


긍극적으로

영화 '사도'는


부자간의 비극이 아니라

군왕과 후계자의 비극이며



사도세자의 죽음을 납득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아들을 굶어죽여?'

라는 매우 현대적인 사고방식으로

그 사건을 보고 있는 현 시대 사람에게

그 답을 주려는 의도인 모양이다.


뭐,

아버지가 아들을...

이라는 감성적 접근법이 아닌,


왕이 후계자에게

라는 정치적 점으로 본다면


그 후계자를 사랑은 커녕

증오로 대한 군왕은

영조 말고도 얼마든지 있었으니 말이다.



아들을 죽이기 전에

자기가 먼저 죽은 왕도 있고,


아들을 은밀하게 제거한 왕도 있었지만


그에 비하면

끝까지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미적거린 것이

비극을 키운 셈이 아닐지 모르겠다.


하지만,


한중록을 비롯한 여러 1차 기록에서

내가 얻어낸 나름의 결론을 비추어볼 때,


사도는 전혀 새로운 시각의 영화도 아니요,

설사 새로운 시각이라한들


나를 만족시킬만큼

정교하지도 못하고 엉성하기 그지 없으며

듬성듬성한 틈새로 뭔가가 줄줄 새어나가는 느낌이다.


무엇보다 가장 큰 불만은


다름 아닌 영화 '사도' 속에서

사도세자를 연기한 유아인의 연기에 대한 불만과

혜경궁에 대한 묘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