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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훈/궁

궁 23부- 채경의 유배, 그리고 신군이 상실하는 것

모놀로그 2011. 8. 29. 22:22

황태자비의 외국행을

난 유배라고 이름지었지만,

 

정녕 그것은 21세기식

귀양살이가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그 유배는

폐비의 전단계인가?

하는 의구심이 생기는데,

그 대목이 확실치가 않다.

그런데 채경이 하는 말,

 

'우리가 함께 있을 수 있는 마지막 시간'

이라는 말을 들으면

아닌게 아니라

폐비의 전단계로서의 유배라는 생각도 드는 것이다.

 

조선조를 보면 일단은 귀양을 보내놓고나서

이후에 어떤 처분을 내리는데,

물론 그건 사약이 되기가 십상이었지만

어떻든 그 처분을 내리기 전 단계가 유배인 셈이다.

21세기이니 그 귀양지가 외국이 된 셈이다.

 

 

여기서 잠깐,

폐비와 이혼의 차이점에 대해서 곰곰 생각해봤다.

 

폐비는 이혼과는 좀 다른 것 같다.

하지만 조선조에도 이혼이 있었나?

 

이혼은 여자의 권리도 인정해줄 때나 가능하다.

조선시대엔 여자는 인권이라는 것이 아예 없기에

그저 쫓겨나면 그만,

이혼하고 자시고가 없었던 것 같다.

 

적어도 왕가나, 양반의 집안에서

이혼이라는 것이 과연 있었는지

내 미천한 지식으론 모르겠다.

하지만 듣도보도 못했던 건 확실하다.

 

대신에,

왕족이나 양반 계급에서의 정실의 자리는

또한 만만치 않았던 것도 사실 같다.

 

그러니 칠거지악이란 것도 있지만,

3불거도 있었으리라.

 

아무리 지독한 인간도 정실은 함부로 하지 못했고,

설사 그 자리를 노렸던 첩실이 있어

어거지로 올랐다해도

그리 오래가지 못했으며

그 말로도 별로 좋지 않았다.

장희빈이 그랬으며,

문정왕후 시절의 윤원형인가 뭔가 하는 인간도 그러했다.

그 인간의 첩실인 미천한 태생의 정난정인가 뭐시긴가 하는 여인네가

정실자리를 목에서 손이 나올 정도로,

혜정전이 황위를 탐내듯

간절하게 원했지만,

 

그녀의 뒤엔 문정왕후라는 백그라운드와 윤원형의 총애가 있었음에도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선

기어이 정실을 독살해야했다.

그만큼 이혼이라는 게 없고

여자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장치가 없었음에도

또한 그 자리가 주는 기득권은 대단했던 것 같다.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이어받았다는

21세기의 황실은,

그러나 내 보기에 조선시대와 별로 다를 게 없는

마인드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그래도 21세기이다.

이혼이라는 개념도 분명 있을 것이다.

 

영국 왕실을 보면

이혼해도 왕족의 신분은 유지되는 것 같다.

그리고 결혼과 더불어 받았던

작위와 그에 따른 재산도 여전하다.

그러고보면

이혼은 폐비와는 다른 것 같다.

 

이혼은 본인들의 의사가 반영된 거라면

폐비는 일방적으로

황실에 의해서 그 신분 자체를 박탈당하는 것이다.

 

하지만 혼인 자체가 무효가 되는 건 아닌 것 같다.

그러니까 평민으로 돌아가서, 황족이라는 신분과,

그 신분이 주는 각종 지위와 재산을 박탈함에도

신군의 부인이라는 사실은 변함없고,

 

따라서 지위와 재산에 더불어 자유까지 박탈당하는 게

폐비가 아닐까 싶다.

물론 21세기이니 이혼은 아마 그 이후에 가능하긴 할 것 같다.

사실 조선시대의 폐비와 뭐가 다른지 설명이 없어서 헷갈린다.

 

궁 작가가 그렇게 일일히 따져가며 대본을 쓴 것 같진 않다.

그래서 더 헷갈리나보다.

 

혜정전이 나름 몸을 던져 화상까지 입으며

전각을 불사른 댓가로,

신군은 드디어 방화범으로까지 몰리고,

 

그것은 어떻든

그동안 내내 잡음을 내왔던 황태자부부며,

황태자비며,

게다가 의성대군까지 얽힌 황실의 어지러움을

표면에 떠오르게 한 사건이 되고 말았다.

 

갑자기 궁에서 급부상한 막강 세력 '종친'이라는 것이

없었다해도,

또한 혜정전이 종횡무진 활약하지 않았다해도

이쯤 되면

외부로 보여지는 황실이 많이 난잡해진 건 사실이다.

 

그리고

다른 나라는 몰라도

한국에 황실이 있다면 아닌게 아니라 보수적이기가

영국 황실 저리가라할 정도일 것이다.

한국처럼 명분이 중요하고

남에게 보여지는 것이 중요한 나라도 드물기 때문이다.

 

아무리 영국 왕실이 보수적이기로 으뜸이라하나,

한국을 맨발로 뛰어도 따라올 수가 없는 것이,

한국은 그 이름도 무서운

'유교'라는 것을 표방하고 있다.

 

물론 내막적으로야

현재 황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은

매우 비유교적이다.

 

황태자를 흠집내어 끌어내리려고 기를 쓰는 혜정전이나,

사태 파악을 냉철하게 해서

자기가 주도권을 갖고 모든 사태를 정리하지 못하는 황제나,

황태자비가 싫다고 난리를 쳐온 채경이나

더불어 그 황태자비를 사랑한다고

대황실 선언까지 한 서열 2위의 왕자나

모두 가관이긴 했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모든 것들을 홀로 짊어지고

꿋꿋하게 버텨온 신군은

오히려 그 사태의 가장 큰 희생자가 된다.

 

채경이가 유배를 자기 희생적인 결단으로 받아들이자,

신군은 펄펄 뛴다.

 

'황실의 폭력'이라는 둥

'황실보다 더 중요한 건 니 인생'

이라는 둥

반발해보지만, 그러나..

 

신군은 이미 그 황실이 가하는 폭력, 내지 갖가지 월권의 희생자로

살아왔다.

그는 언제나 황실이라는 이름이 주는 굴레에 굴복해왔다.

황태자의 비애이다.

 

인간이기 전에

황실이라는 상징적 집단을 대표하는

후대의 황제, 즉

황태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끝내 피하지 못했던 그 황실의 압박을

채경이가 무슨 수로 피하겠는가?

 

그러니 그건 그저 어린애가 발버둥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펄펄 뛰었던 그의 심정은 단 한 마디

'헤어지지 않기로 했자나'

로 집약된다.

 

신군은 일찌기 채경과 헤어지는 것에 대한 강박증에 시달려왔다.

그녀가 자신을 떠날까봐 두려워했다.

그런데

결국은 그 무서운 일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그것도 자신이 황태자이기에..

자신을 황태자로 억압해온 황실에 의해서...

또한 황실을 위해서 그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건

이미 결론으로 나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침내 신군은 무너지고 만다.

 

황태자로 살아온 14년이 생애의 끄트머리엔,

사랑하는 여자와의 이별이 기다리고 있었다니

그동안의 그의 인내가 너무나 무참하다.

 

난 그 장면에선 그저

 

'헤어지지 않기로 했자나!'

 

신군의 이 한 마디만이 귓가에서 맴돈다.

갑자기 알프레도를 안고 춥고 무서운 궁의 복도에 우두커니 서 있는

어린 소년 신군이 오버랩된다.

 

황태자가 되면서 상실했던 그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만회해준 유일한 존재가 신채경이었다.

 

그녀는 그의 친구였고, 가족이었으며 엄마였고 누이였고

그리고 사랑하는 여자였던 것이다.

황태자 이신이 가질 수 없었던 진정한 인간관계의 총집대성이 바로 신채경이었는데

그는 이제 그것을 잃을 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