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궁 23부- 신군의 희망, 절망,그리고 고백 본문
궁 23부 초반부에,
내 시선을 잡아끄는 장면이 두 군데가 있다.
첫째로,
전각 화재 사건으로
황제에게 꾸중을 듣고 난 후 자기 방에 틀어박히는 모습이다.
다름 아닌 부모에게 받는 불신은
신군에겐 뼈아프다.
절대절명의 신군에게 유일한 병풍이 되어줘야할
부모가 앞장 서서 자신을 성토하고 있다.
그는 자기 거처에 틀어박혀 상처입은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다.
채경이는 그가 울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채경이는 신군을 사랑한다고 그동안 말해왔지만
처음으로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개념의 기준에 준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
사랑하면 당연히 신군이 어떤 상태인지 말해주지 않아도
알 수 있어야한다.
이어서 신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채경에게 다가오는 데,
이때의 모습을 보면 문득 생각나는 게 있다.
짐승은 상처를 입어서 고통스러워도 내색을 하지 않는단다.
자신의 나약함을 상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한 치열한 자기 방어 본능이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것,
그것이 중요하다.
안그러면 자기가 위험에 정면으로 노출되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세계 아닌가!
신군이 살고 있는 세상도 바로 '약육강식'의 세계와 다름이 없는 것 같다.
짐승은 병이 나거나 상처를 입으면 자신의 소굴로 들어가
자연 치유가 될 때까지 잠을 자며 기다린다고 한다.
그들의 세계에서
병이 나거나, 상처를 입었을 때
그걸 극복하는 방법은 자연 치유가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밖엔 없다는 것이다.
신기한 것은,
인간 세상에서 살고 있는 강아지, 즉 애완견조차
그런 정글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궁이라는 온실
그러나 무척 황량한 온실에서 보호받으며 자랐을 신군도
본능적으로 그 온실의 내면에 흐르는
살벌함에서 자신을 보호해야한다.
신군은
그리하여 자신의 소굴로 숨어들어가
자신의 상처를 남들에게 보이지 않으려한다.
자연 치유가 되거나,
적어도 눈물이 마를 때까진 시간이 필요하다.
그런 그가 채경의 앞에 나타났을 땐
표면적으론 달라진 것이 없다.
여전히 냉소적이고 여전히 냉철하다.
상대가 자신을 떠나려는 여자이기 때문이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편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어도 약한 구석을 보여선 안될 사람이 되버렸다.
적어도 그때의 신군에겐 그러하다.
물론 약간의 뒤틀린 마음과 분노, 외로움, 불신
등등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채경은 이제 자신이 상처받았음을
드러내며 기댈 곳이 아니라고 그는 생각한다.
혹은 그렇게 자신에게 타이르고 싶어한다.
가뜩이나 남자로서, 남편으로서 버림받았다.
그녀 앞에서 초라한 패배감을 느끼고 있는 신군은
덧붙여서 방화범으로 몰린 처참한 꼴까지 보여야한다.
그는 안간힘을 써서 태연하고 냉철한 모습을 고수한다.
따라서 자신을 걱정하는 채경의 마음을 거부한다.
동정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그녀의 마음이 진실이고 동정이 아니라 애정이라는 걸
마음 깊이에서 알고 있을지라도
그것에 매달릴까봐 자신을 경계시킨다.
자기를 떠나지 못하여 그토록 안달하는 여자에게,
비참해진 자신의 처지를 보이는 게
신군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뜻밖에도
채경이는, 부모조차도 믿어주지 않는 자신을
아주 단순하게 믿는다.
오로지 신군의 눈빛만으로,
그리고 본능적으로 믿는다.
그때의 신군의 표정이 난 잊혀지지 않는다.
신군은 단순한 사람이 아니다.
명석하고 예민하고 날카롭다.
그는 채경의 자신에 대한 신뢰를 느낀다.
그것은 애정, 무조건적인 애정이 없이는
나올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런데 왜...
나를 그토록 불신하며 밀어내니?'
자기도 모르게 그녀에게 원망과 애원이 담긴 눈빛을 던진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자기 자신에게 다시금 예리한 채찍을 내리친다.
아무것도 믿지 말고,
아무것에도 매달리지 말자고..
공연한 기대같은 건 갖지도 말자고 단속한다.
더이상의 상처는 감당하기 힘들다.
지금 아무렇지도 않은 척
그녀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벅차다.
그는 채경에게서 시선을 돌린다.
그건 마음 속에 남아 있는 미련과, 기대, 희망을 외면하는 것과 같다.
이제 그는 결심했기 때문이다.
혜정전이 자기를 방화범으로까지 만들어서 불명예스럽게 폐위시키려고 하는데,
황제는 전혀 자신의 백그라운드가 아니다.
아무도 자신을 지켜줄 수 없고,
스스로도 자신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채경이라도 엉망진창,
파워게임으로 얼룩진 지옥같은 궁에서
해방시켜줘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전에는,
채경이를 자기가 지켜줄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녀가 궁에 머물러주길 바랬지만,
폐위가 되면 더이상 그녀를 지켜줄 수 없으며,
더 나아가 방화범의 아내로까지 전락시키게 될지도 모른다.
여기서 난 잠깐 궁의 허술함에 대해 말하고 싶다.
아무리 신군을 궁지로 몰아넣기 위한
상황 전개라지만
언제부터 궁이 저렇듯 무법천지가 되었는가?
혜정전조차 가지고 있는 비밀 채널이
어찌하여 황실의 주축인 네 사람에겐 없단 말인가!
그런 건 당연히 있어야하는 거 아닐까?
어째서
엄연히 황위에 있는,
황궁의 가장 중심인물들을 지켜주는
하다못해 경호원들조차 없단 말인가!
cctv까지 맘대로 만질만큼
궁은 허술한가?
아니, 하다못해 경찰이라는 사람들까지
너무나 쉽게 음모에 넘어가서
만들어진 증거만 가지고 신군을 조여댄다는 게
가능한가?
황실을 너무나 가볍고 불쌍하게 만들어버렸다.
황궁이 혜정전이라는 일개 아녀자의
장난감같다.
경호원이 줄줄 따라다니던
신군이 어찌하여
무대책으로 당한 단 말인가?
대체 그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담?
오종종하게 모여 있는 황실 가족들이
그렇게 딱하게 보일수가 없다.
그들은 망망대해에 작은 뗏목을 의지하고
그저 망연하게 흘러가는대로 몸을 맡긴
무기력한 조난자들같다.
아무도 그들을 지켜주거나
비호해주지 않는다.
종친이라는 세력이 그토록 대단한가?
종친이 무서워서
자신들의 며느리요, 일국의 황태자비를 사랑한다고
큰소리를 친 의성대군에게도 응분의 처벌을 내리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폐비시키라는 종용에 떨고 있다니
어이없다.
아들이 방화범으로 몰렸는데도 손만 놓고 있는 황제 부부가
딱하다.
아니 황후의 역할이 갑자기 팍 죽어버렸다.
분명, 어느 순간까진 굉장히 정치적으로 야무지고,
아들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보호하던 황후가
왜 갑자기 저렇게 힘을 받지 못하는걸까?
대체 황실이 어찌하여 저렇게 무력하고
답답할 수가 있을까?
그리고 그들의 무력함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신군 같다.
일국의 황태자가 어이없이,
너무나 쉽고 간단하게 방화범으로 몰리는 것도 우습다.
상대는 감히 황태자나 황태자비의 이동통신 내역까지
간단하게 삭제할 정도로 대단하다.
그런데
정작 황실 사람들에겐
그것을 막을 힘도 없다.
막긴 커녕 어린아이가 팔을 비틀리는 것처럼
바보같이 당하고 있다.
그리고 처분만 바라고 있다.
이 부분은 내가 보기엔, 심각한 오류요 에러이다.
그럴 순 없으니까.
채경에게서 돌아선 신군은 공내관을 부른다.
(이때
'공내관..'
이라고 부르는 주지훈의 음성과 억양,
참으로 대단하다.
그건, 그야말로 황태자의 억양이고,
말투이며
이제 주지훈은 그야말로 황태자가 되버린 듯
자기 앞에 두손 모아 조아린 원로 배우 앞에서
조금도 꿀리거나 어색하지 않는다.)
그때까지
늘 내관이나 상궁등
이른바 아랫사람 앞에서 절대로 자신의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전형적인 황족의 태도를 고수하던 신군이
처음으로 공내관에게
내면을 고백하고 있다.
물론,
공내관은 알고 있다.
이상한 일이지만,
궁에선
부모보다 가까운 것이
바로 내관이나 상궁이다.
그건 조선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문안이나 드리는 부모보단
노상 곁에서 시중드는 아랫사람들이 훨씬 가까운 존재인 것이다.
설사 부모는 자신을 지켜주거나,
자신을 위해 희생하지 않지만
그들은 기꺼이 자신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것이다.
신군도 겉으로야 늘 공내관 앞에서
잘난 체하고 있었지만,
내심으론 누구보다 자기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이
또한 공내관이라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더이상의 허식이 필요치않다는 듯,
이제 공내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어쩜 그 얘기조차,
공내관은 일찌감치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이미 알고 있는 얘기를
신군의 입을 통해서 확인받고 있을 뿐이다.
신군이 어거지로 황태자 노릇을,
그러나 참으로 대견하리만큼
자존심을 가지고 해내왔다는 것과,
그런 신군의 주변엔 아무도 없다는 것.
부모조차 없다는 것을 공내관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소심하고 예민한 소년이었던 신군이
적어도 겉으론 냉정하고 이기적이며 비정한 인물로 보이게끔
자기 마음을 닫아건 채로
성장했지만,
그러나 실은 신군이 그런 사람이 아닌 것도
공내관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오만하고 딱딱한 껍질을 천진한 채경이가
무심하게 벗겨내어
신군이 차츰 채경이를 사랑하게 된 것도
공내관은 알고 있었다.
신군이 공내관에게
채경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고백하는 것도
어쩌면
공내관은 이미 알고 있다는 걸
신군 또한 알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비궁을 만나고 난 이후로
자기가 포기했던 이신의 삶을 다시 꿈꾸게 되었는데..
풍선처럼 날고 싶었던 건
채경이나 자기나 다를 바 없었는데
채경이에겐 자신이
채경의 풍선을 터뜨리는 인간이 되버린 자괴감이
쓸쓸하게 신군에게 감돌고
채경이가 궁에서 도망치고 싶었듯,
자신도 황태자위에서 도망치고 싶었는데
그러나
채경이가 폐비가 되는 불명예를 쓰고
궁에서 나가게 되길 바라지 않았듯
자신도 방화범 황태자가 되어
폐위되는 불명예를 원치 않는다는
고해성사를
다름아닌 공내관에게,
그러나
그건 공내관이 아니라
세상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알고 있는
한 인간에게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사랑하는 아내요, 여자인 채경이를 놓아버리고,
황태자위에선 불명예스럽게 밀려나기 직전의
신군이
그 어느 때보다
황태자스럽고
인간적이며
고적하게 아름다운 것도 신비스럽다.
더이상 황태자의 위엄으로
공내관을 대할 필요가 없어진,
허식을 벗어던진 신군은
쓸쓸하게 미소짓는다.
'주지훈 > 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궁 23부 -궁과 신군 (9) (0) | 2011.08.16 |
---|---|
궁 23부- 키쓰신과 소파신=신군과 채경의 정신적 합방 (0) | 2011.08.11 |
궁 23부- 주지훈의 신군, 정갈하고 품위있는 섹시함 (0) | 2011.08.10 |
궁 23부 -궁과 신군 (8) (0) | 2011.08.10 |
궁 23부- 신군의 상상 (0) | 2011.08.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