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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말, 물난리가 났던 시절에 난 행복했다니..

모놀로그 2011. 7. 27. 12:38

물난리로 서울이 들썩하는 건 꽤 오랜 만인 것 같다.

내가 기억하는 물난리는

벌써 십년이 넘는,

1999년이다.

 

그때 8월초에 사흘 동안 엄청난 폭우가 쏟아졌다.

때마침 독립해서 아파트에 혼자 살고 있던 친구 집으로 놀러갔었는데

그 친구의 가족들이 침수를 피해서 피난을 온다는 바람에

난 급히 집으로 철수해야했다.

 

친구가 살고 있는 일산 쪽의 아파트 촌은 괜찮았지만,

그 가족들은 한강변에 살고 있었기에

한강이 범람한다는 소리에 그만 몽땅 짐을 싸서

피난을 오겠다고 한 것 같다.

 

난 그렇잖아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차에

잽싸게 친구 집을 떠나서

귀경길(?)에 올랐다.

 

버스를 탔는데,

헉;;

정말 절반은 물에 잠긴 채로

서행을 하고 있다.

 

마치 물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았다.

집에서 그다지 머지 않은 곳에 있는 터널은

물에 잠겨서 그곳을 어찌 버스가 통과할지

그야말로 처음 보는 광경에 가슴을 두근거리며

대체 우리 집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

조마조마해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집에 전화를 걸어 확인했으면 간단한 일인데

왜 혼자 안달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때도 휴대폰은 가지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우리 동네가 가까와질수록

침수는 커녕 모든 것이 너무나 평화로와

전혀 다른 세상 같았다.

 

빗줄기는 가늘어져 있었는데,

우산을 쓴 사람들이

한가롭고 일상적인 표정,

다시 말해서 뭔가 고민은 있지만

그건 결코 침수나 물난리에 관계된 건 아니라는 듯이

거리를 오가고 있었다.

 

아스팔트는 반들반들하고

버스나 택시, 혹은 승용차들도

여느 때처럼 제 갈길을 가고 있다.

 

상점들이며

주택들도 너무 멀쩡하다.

 

난 어리둥절해서

내가 이런 별천지에 살고 있단 말인가?

새삼 놀랐다.

 

버스에서 흘러나오는 뉴스는

한결같이

살떨리게 살벌한데

어째서 이곳은 이토록 아무 상관이 없단 말인가??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가보니

우리 가족들도

내가 거리에서 본 사람들과 똑같은 표정을 하고 있다.

 

가까이에 자그만 동산이 있기에

혹시나 그게 무너져서

집이 홀라당 파묻히지나 않았을까 하는

걱정까지 했건만

 

우리 집은 물난리가 난 것은

어딘가 머나먼 다른 나라,

우주의 반대편에서나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듯 했다.

 

오늘도

뉴스마다 물난리로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그러나

역시 우리 집이나 우리 동네는

다른 나라에서 일어난 변고라는 듯

전혀 무관하다.

 

거참..

 

크지도 않은 서울에서

그나마 이런 곳에 살고 있는 걸 감사해야하는건가?

 

하긴 얼핏 들었는데

이 지역이 이를테면

언덕이라고 해야하나?

 

물에 잠기고 싶어도 그게 안되게끔

지형이 높은 곳에 있단다.

 

그래서

서울 전체가 떠들썩한 지금

이곳은 조용하기만 하다.

 

오늘

십년 만에

물난리가 나고보니

새삼 그 시절로 내 마음은 돌아간다.

 

별로 유쾌할 것도 없는 사건,

어쩌면 어떤 사람들에겐 너무나 힘든 상황일 것이

틀림없는 사건이

내겐 행복했던 어떤 시절을 회상하는 빌미나

되는 건 미안하지만,

 

어떻든 십년 전의 그 해는 그립다.

 

작년 이맘 때 우리 곁을 떠난 강아지가

그땐 겨우 2살이었다.

 

무엇보다 난 그땐 건강했다.

 

아마

건강했었다는 것,

십년어치만큼 젊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보단 하늘도 땅도 나만큼이나

건강했다는 것이

나로 하여금

잠시 그 시절로 돌아가 배회하게 만드나보다.

 

아..

우라지게 덥고

비는 지겹게 쏟아지고

몸은 항상 편치 않고

기분은 그래서 개죽이다.

 

20세기 말,

물난리가 났던 그 여름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면

아마 난 거절할 것이다.

돌아가느니 그냥 앞으로 가겠노라고..

 

돌아갈 수 없고

돌아가고 싶지도 않아서

더욱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