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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헌/그의작품들

바람의 아들 (3) ─수연─

모놀로그 2010. 6. 6. 15:55

 

형을 따라 작부집에 간 홍표가 스무살 나이에 처음 안 여자가 수연이다.
비록 술집에서 몸파는 여자지만  아직은 때가 묻지 않고
귀엽고 발랄하다.

수연은 여러가지 점에서 홍표와 많이 닮았다.
담담하게 자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원초적 순수함과
두려움 없이 현실과 맞서는 당당함과 천진한 에너지가 그녀에겐 있다.
게다가 겉치레 없이 거리낌 없는 성격까지 비슷하다.
그런 동질감을 서로가 이내 감지한 것일까..
그들은 쉽게 가까와지고 친밀감을 느낀다.

삼류 술집의 작부로서의 생활은
그녀에겐 그저 피상적으로 벌어지는 외부적이고
물리적인 현상일 뿐 그녀 인성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연화가 홍표의 내면에 숨어 있는 진정성을 끄집어낸다면
수연과 함께 있는 홍표의 모습은 그의 현실 속에서
대충 살아가는 하류 인생의 적나라한 모습이다.

그의 모든 외부적인 조건이며 생활 방식
삶을 꾸려가는 단순성 등등이
수연이라는 술집 작부와 함께 딩굴 때 더욱 극대화되어
밑바닥 인생들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풍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홍표와 수연의 관계는 내 취향이 아니다.

난 밑바닥 인생들끼리  살을 부벼대는 듯한 유대감과 더불어
거리낌 없이 딩굴면서 쌓아가는 정에는
쉽게 공감하거나 몰입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상당히 부르조와적인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는 나의 한계이다.







홍표는 그의 말에 의하면
심심해서 데리고 노는 차원에서 그녀를 만난다.
당시의 그의 처지에서 상대할 만한 혹은 상대해줄 만한 여자는
수연 정도일 것이다.

비록 술집 여자와 손님으로
만났을 망정 워낙 어리고 순수한 인간들이라
서로에 대한 편견도 거리낌도 없다.

젊은 청춘 남녀들답게 데이트 한답시고 극장에도 가고
강가에서 도란거리다가 딩굴기도 하면서 친밀감을 더해간다.

어쩌면 스무살 나이에 터질 듯한 젊음으로
충만하였으면서도
내면에 잔뜩 도사린 갖가지 욕구불만을
표출할 길이 없어 닥치는대로 치받고 다니던
홍표에겐 발산할 수 있는 숨구멍 역할을 해준 것이
수연일수도 있다.

수연은  그가 어떤 행동을 하건 어떤 말을 하건
홍표란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여자이다.
거기엔 이해나 교감이 필요치 않는 동물적이고 원초적인
유대감이 있다.

주체할 길 없는 젊음의 욕정을 발산하는 대상으로
그녀가 지닌 천진한 여성성으로, 그리고 같은 하류 인생이라는 동질감으로
그들은 묶어져간다.

그런 관계가 홍표에겐 편안했는지도 모른다.
그 또한 자기가 가진 가장 단순하고 거칠고 허식 없는 모습으로
그녀를 대한다.







확실한 것은 큰형이 죽기 전까지
홍표의 인생 계획 속에 수연은 들어가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만에 하나 큰형이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리지만 않았던들
그와 수연의 불장난은 막을 내렸을 것이다.
그러나 갑자기 큰형이 죽어버리고
혼자 남게 되자 홍표는 즉흥적인 만남의 상대로가 아니라
자신과 함께 떠날 상대로 수연을 찾는다.

홍표는
아무 조건이나  계산 없이 자기 곁에 있어줄 사람은
역시 암담한 현실 속에서
도망칠 곳이라곤 없는 데다가 무엇보다
자기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수연 외엔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를 찾았다고 본다.

그 자신의 감정 따윈 아무래도 좋았던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시의 그는 연화를 가질 수 없다면
아니..연화를 가질 수 없는 자기 처지에서
누구라도 상관 없었던 것이 아닐까?

꼭 수연이 아니었더라도
당시 그가 누군가를 만나고 있었다면
함께 떠날 상대로 그 여자를 택했을 것이다.

그는 결코 바보가 아니며
오히려 영리한 사내이다.
그는 자기가 어떤 인간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고
자기가 어떻게 살게 될 것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삶에 어울리는 여자는
수연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마치 그가 늘상 입고 다니는 누더기처럼
편안하고 푸근했을 것 같다.

연화의 아버지 집을 털어 돈을 훔친 후에
친구까지 가세해서 서울로 도망친 후
마치 부부처럼 생활하면서
정을 쌓아간다.

일이 잘 풀렸다면 홍표는 수연으로 만족해서
그럭저럭 잘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그들은 연인이나 부부라기보다
그야말로 수연 말대로
손발이 잘 맞는 짝패였으니까~!!







할 줄 아는 거라곤 주먹질 뿐..
세상 물정 모르고 촌구석에서 살아온 홍표 일행은
서울에 오자마자  폭력 세력의 사기에 휘말리고
친구의 배신까지 곁들여
하루 아침에 홍표는 그들에게  돈도 여자도 모조리 빼앗긴 것으로 모자라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서로가 서로를 배신했다고 생각하며 깊은 상실감과 배신감 속에서
3년 세월이 흐른다.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홍표는 수연을 찾아 헤맨다.
수연은 이미 그에게 동료이며 친구이고 여자임과 동시에
엄마나 누이 같은 가족이자 아내였다.

그녀는 여자 특유의 민첩함과 사태를 파악하는 민감함으로
혹은 자신을 내던지는 헌신적인 애정으로
세상사에 서툴기만 한 홍표의 부족한 점을 메꿔주며
다독이고 보살펴주었다.

운명이 어긋나서 더이상 함께 할 수 없게 된 이후
홍표가 그녀에게 집착하고 그녀 아니면 안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을 것이다.








연화가 기득권을 하나씩 상실하는
고통스런 삶 속에서 보다 폭넓은 인간으로  성장해가면서
눈에 보이진 않으나
홍표와의 거리를 좁히고 장벽을 허물어가는 동안

수연은 반대로 어쩔 수 없는 외부적 요인으로
장벽을 홍표와 쌓아간다.

그들의 장벽은
당시 혼란스런 사회상 속에서
정치권과 연계한 폭력 조직의 강권에 의한
사회적 약자로써 선택의 여지가 없이 당하는 일방적인 희생의 산물이다.

따라서 아무리 그들이 원한다고 해도 쉽게 허물수가 없다.
내면적인 이유가 아니기에..









자기의 전재산을 빼앗고 감옥에까지 처넣은 무리의 보스 여자가 되어 있는
수연을 발견한 홍표..
세상에 유일한 자기 편이었던 수연의 그런 모습에 경악한다.







수연은 그의 억세게 재수 없는 삶의 궤적과
함께 한다.
그가 나락으로 떨어질 때마다
수연은 더욱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식이다.

한번 어긋난 운명의 수레바퀴는 좀처럼 되돌릴 수 없나보다.
오히려 가속도가 붙듯이 점점 더 엉뚱한 곳으로 치닫는다.

수연의 유서에 써 있듯

"이 자식이랑 얽히면 무지하게 재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어.."
라는 말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홍표라는 인간은 그만큼 위험한 인물이며
그것은 그의 성격상 인생살이 도처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수 밖에 없고
그것은 그가 원하던 원치 않던
피해갈 수가 없다.

그런 인물과 운명을 함께 하면
함께 나락으로 떨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강하고 억센 수연이라해도
결국은 남자들의 노리개에 불과한 힘없는 여자일 뿐이니..






기어이 수연이 사는 곳을 찾아내서 그녀 앞에 나타나는 홍표..
3년 세월이 그들 사이에 흐른다.

한때 사심 없이 웃으며 딩굴던 사이였건만
이제 3년 만큼이나 멀기만 하다.
















수연은 홍표에게 돌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진실을 서로에게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있다.

시시덕거리면서 투닥거리고 허식없는
알몸으로 맘껏 딩굴던 그들의 모습은 간 데가 없고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두터운 장벽은
허물 길이 없다.

그러기에 홍표는 수연이 자기를 거부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가 없고
수연은 그의 아픈 곳을 사정없이 찌르는 것으로
그에게 돌아갈 수 없는 자신의 아픔을 헤집는다.

그렇게 해맑았던 그들의 사이엔 구름이 드리워지고 오해와 애증으로
점철된다.

그들의 마음이 서로를 원할수록
두 사람 사이는 점점 더 멀어져서 함께 하는 것이 요원해진다.

수연의 말대로 그것이 운명일까?











3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수연은 수연대로
홍표가 돈을 몽땅 빼돌려 자길 버리고 도망쳤다고 믿고 있었다.
원망과 자포자기 상태에서 오갈 데 없는 어린 작부가
갈 길은 보스의 총애에 힘입어 그에게 얹혀 사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3년을 같이 산 늙은 보스가 홍표를 감옥에 처넣고
모든 것을 망쳐버렸음을 알게되지만
이미 뱃속엔 그의 아이가 들어 있으니
같이 떠나자는 홍표의 말을 따를 수가 없다.

홍표는 홍표대로 보스의 첩으로 안정되고 풍요로운 생활에 길들여져서
자기를 거부하는 거라고 오해한다.
상처를 주고받으며 다시 헤어지는 두 사람..

수연이 홍표가 살고 있는 넝마 고물상을 찾았을 때..
홍표는 그녀를 경멸과 혐오로 대하지만

막상 그녀가 한참 좋았던 시절에 자길 부르던 호칭인
"자기야~!!"를 외치는 순간 움찔한다.

"보고 싶어서 왔어.."라는 고백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흔들리지만
자존심과 오기로 똘똘 뭉친 그는 끝내 돌아선다.
마음 속에선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을 것이다.






수연이 다시 찾아와 금고 열쇠를 내밀며
폭력 세력에게 빼앗긴 돈을 되찾아서 멀리 떠나라고 했을 때
홍표의 대답은 간단했다.

"니가 안가면 나도 못가~!!"


수연이 없으면 이미 돈도 필요없다는 것이 홍표의 마음이다.
그는 다시금 그녀와 웃으면서 딩굴 날을 기대하겠지만
그런 날은 다신 올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수연과의 그런 날들도 이미 추억이라는 책갈피 속에 묻혀진
낡은 잎새가 되버렸음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수연은 알고 있다.
다신 자기들에게 그런 날이 올 수 없다는 것을...







홍표를 떠나 보내기 위해 같이 가겠노라고 거짓말을 한
수연은 나가다말고 돌아서서 마지막으로 눈에 새기려는 듯
홍표를 바라본다.

다시는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럴 수 있었다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홍표가 돈을 훔치면 수연이 제일 먼저 의심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그녀는 몰랐을까?

알면서도 뱃속의 아이를 믿고 강행한 것일까?
아니면 홍표를 위해서 자기 자신을 다시 한번 버린 것일까?









홍표가 돈을 훔치고 역에서 기다리는 동안 수연은
극장에서 "바보들의 행진"을 보며 눈물짓는다.

젊은 연인의 모습이 화면 가득 펼쳐진다.
기차가 서서히 떠나려 하고 주인공들은 작별을 하고 있다.
그들은 미래를 약속하고 있다.

그 장면에서 수연도 이미 예전의 해맑고 천진하며 발랄한
어린 작부가 아니고
홍표도 겁없이 날뛰던 젊은이만은 아닌
세월에 의해 변질된 두 사람의 모습이 반추된다.

이제 수연의 미래엔 홍표가 없다.
훔쳐낸 돈으로 어딘가에서 잘 살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수연이 홍표에게 해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이었겠지만..
조직의 돈을 훔쳐내어 무사할 수 있다고 믿었다면
그들은 역시 어리석다고 볼 수 밖에 없다.

그 시간에
역에서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리며 발을 구르는 홍표..
기차가 떠나자 할 수 없이
돌아서는 그의 눈에 눈물이 고인다.
그렇게 그들은 다시 기약 없이 헤어지는 것이다.














홍표란 인물이 다른 캐릭터와 차별화되는 가장 큰 특징이 있다면
절대로 질척대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사 무지하게 괴로울 것이 틀림 없는 순간에도
그는 적어도 겉으로는 담담하다.
심란한 순간에도 무표정하다.
그만큼 철저하게 그의 내면은 외부와 단절되어 있고
화면 또한 그의 내면을 보여주지 않는다.

비록 수연에게 버림받았다고 생각할망정
그는 결코
비틀거리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다시 2년의 세월이 흐르고
훔친 돈으로 외지에 나가 제법 성공해서 한참 잘 나갈 무렵
그는 고향을 찾는다.

자기 딴엔 금의환양하는 기분이었겠지만
딱히 갈 곳도 없고 반겨주는 사람도 없다.
자길 키워준 사람들도 어느 새 이사가고 없다.

수연이 머물던 술집 춘자집 앞에 잠시 멈춰섰을 때 
그는 그저 피식 웃으며 가볍게 돌아선다.


반면에
연화의 집 앞에선 걸음을 멈추고 오랫동안
 머물면서 옛생각에 잠겨 있었던 것을 보면
홍표에겐 고향에서 보낸 성장기 시절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남은 것은
역시 연화에 대한 짝사랑이었나보다.

아니
그의 험한 인생살이에서 두번 다시 없을
아름다운 것이 바로 연화에 대한
그의 연정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아닌
영원히 찍힌 초상이고 추억이며 아름다운 사진이라
사라질 수가 없다.

반면에 수연은 지난 시절의 여자로 잊혀진 듯 보인다.
그러나 아직 그들은 끝나지 않았다.
마무리가 남아 있다.






홍표와 수연의 관계는 최악의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아마도 홍표 인생 최고의 비극이었던 큰형의 죽음에 필적할 만한
아픔이었으리라.

그것은 모든 것이 결국은 자신으로 인한 비극이었으며
자기 여자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남자 중의 남자인 홍표의
고통과 연민으로 인해 더욱 치열할 것이다.

자기에게 보스의 돈을 훔칠 기회를 주었음을 들키는 바람에
매맞고 팔려가서
최하의 거리의 여자로 전락해 있는 수연의 모습을 발견한
홍표에겐 일찌기 없었던 비애감이 넘실댄다.
그것은 거의 육체적인 아픔일 것이다.
그의 마음이 그토록 아팠던 적은 없었으리라.













수연을 구해내기 위해 미친듯이 돈을 구하러 다니는 홍표에게선
여전히 동물적이고 즉물적인 에너지가 느껴진다.

그는 수연을 구렁텅이에서 건져내기만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수연의 입장은 다르다는 것을 그는 모른다.
그만큼 단순한 사내이다.


홍표에게 짐이 되기 싫어서였을까..
망가질대로 망가져서 그에게 돌아갈 희망이라곤 전혀 없어진 탓일까..
결국 수연이 택한 것은 떠나는 것이다.
그들의 짧은 행복의 댓가는 이렇게 최절정의 비극으로 막을 내린다.
그들이 함께 한 해맑은 시절과 대비되어 그 비극성이 더한 듯 하다.

홍표와 수연의 순수함의 극치를 이루는 순간이기도 하다.

















수연을 망치고 자신을 망친 세력을 찾아서 홀홀단신 맞서려는 홍표..
사실 그 세력은
단순히 수연만이 아니라
그의 형이며 더 크게는 아버지까지 망친
홍표로 봐선
자기 자신의 인생의 진로를 바꾼 철천지 원수들이다.

수연을 잃고 그녀를 죽인 인간들을 찾는 홍표의 표정은
슬픔이 뭔지 상실이 뭔지 알게 해준 세력에 대한
사무친 원한이 알알이 배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보다 더 성장시켰을 것이다.














담배 한 대 피워문 채로 수연을 강가에 뿌리고
그녀가 남긴 편지를 읽는 홍표..
일찌기 느낀 적이 없었을 그 쓰라림은
역시 그를 한층 성숙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장홍표란 인간은 조금씩 성장해가는 것이다.










그녀의 죽음으로 인한 홍표의 깊은 슬픔은
그러나
가슴에 묻는 아픈 사랑이라기보다
차라리 가슴 무너지는 연민이 아니었을까?

연민은 때때로 욕망보다 더 강한 법이다.

연화가 멀리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아름다운 꿈이라면
수연은 그의 현실이며 연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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