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바람의 아들 (4) ─미숙─ 본문
내겐 홍표의 꼬이고 뒤틀린 인생을 상징하는 여자가
미숙이 같다.
가슴 속에 묻은 두 여자
가슴 속 아련하고 아름다운 꿈의 여인인 연화도
기다림을 알게 해주고 연민과 눈물 속에 보낸 수연도 아닌
엉뚱하게도 미숙이란 인물이
그의 평생 반려자가 되었으니 말이다.
홍표에게 미숙은 좀 모자라는 듯한
그래서 귀엽긴 하지만
귀찮게 따라다니는
관심도 없는 여자애일 뿐이었다.
그것이
술김에 사고치고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아이까지 낳아놓고
자길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미숙이나 그녀의 부친 또한 밑바닥 중의 밑바닥 인생들이다.
미숙은 모자라는 대로 야바위꾼이고
그의 부친은 감방에서 반평생을 보내다시피한 칼잽이에
금고털이 전문가였다가
손을 씻고 나무로 인형이나 만들어 근근히 먹고 산다.
모자라는 딸에 전과자 아버지...
그들이 최종적으로 홍표의 가족이 된 것이다.
난 홍표란 인물이 정말 강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많지만
특히 그가 단지
미숙의 아버지가 전설적인 금고털이였다는
이유만으로 미숙과 결혼하라는 주변의 압력을 받아들이는 점에서
그러하다.
사랑은 커녕 여자로서 끌리지도 않고 미숙이 낳은 아이에 대해서도
일말의 책임감조차 느끼지 못하는 상태에서
평생을 같이 하겠다는 이유치곤
참..기가 막힐 노릇 아닌가?
나로선 상상이 가지 않는 사고의 영역이다.
홍표는 미숙의 부친에게 금고털이 기술을 배우기 위해
미숙을 데리고 살기로 결심한다.
이 어찌 놀랍지 않은가~!!
혹시 홍표 내심에
금고 터는 법만 배운 뒤엔
미숙을 버리고 도망쳐야겠다는 생각이 숨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연화는 결혼해버렸고
수연이 자기에게 돌아올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
사실 사랑 따윈 그에게 이제 그에게 의미가 없어졌으며
그 두 여자가 아니라면
같이 사는 건 누구라도 상관 없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어차피 그는 여전히 하류 인생이며
밑바닥을 기고 있으니
미숙이쯤 되야 그의 성질을 감당하며
같이 살 수 있을지도..
그러나 그 어떤
정서적 공감대도 유대감도 가질 수 없는 여자와
그런 단순한 이유로 함께 살 수 있다면
그건 보통 강한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오로지 자기 존재만으로도
모든 걸 감당할 수 있는 정말 강인한 사내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본다.
그의 말대로 잡초처럼 질긴...
아이를 빌미로 홍표의 발목을 잡긴 했지만
미숙은
사랑스러운 캐릭터이다.
극중 배냇병신이라고 아버지가 말할 정도로
좀 모자라는 탓에
항상 여기저기서 구박받으며 놀림거리나 되지만
그러나 홍표에 대한 애정만은
남부럽지 않고
맹목적이니
거칠고 척박한 사내 홍표에겐
어쩜 가장 어울리는 짝일지도 모른다.
기술 하나 배우자고
맘에도 없는 여자를 데리고 살기까지
하건만
그의 장인은 전혀 그 기술을 가르쳐 줄 생각이 없다.
어떻게든 기술을 배우려고 나름대로 머리 굴리며
추근대보지만 번번히 욕만 얻어먹을 뿐이다.
그 화풀이는 고스란히 미숙이 몫...
그러나 홍표가 은근히 정에 약한 구석이 있는 만큼
남편이랍시고 구박구박 받으면서도
애정을 쏟는 미숙에게
걸핏하면
소리부터 버럭버럭 지르지만
가끔은 애잔한 마음에 토닥거릴 때도 있었다.
사실 난 미숙과 함께 있을 때의 홍표가 재미 있고
사랑스럽기도 하다.
마침내 금고털이 기술을 배우게 된 동기는 엉뚱하게도 수연의 죽음이다.
깊은 밤..소리 죽여 마당 한 구석에서 울고 있는
홍표의 모습을 장인이 본 것이다.
그에 대한 연민일까..
아니면
자기 딸을 평생 데리고 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을까..
뭔가 남겨주면 그게 고마워서라도
딸을 버리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일까..
하여튼 노인은 마침내 자기 기술을 전수해준다.
절대로 딸을 버리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전수한 것을 보면
역시
딸에 대한 애정에서였으리라.
그는 미숙과 아이를 데리고 아르헨티나로 떠난다.
난 가끔
그가 그 나라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그 나라 말은 제대로 배웠을까..
그는 어떤 아버지가 되었을까..
궁금하다.
연화라는 이름이 붙여진 그 아이는
과연
좀 모자라는 엄마와
과격한 아버지 사이에서
어떻게 성장했을까..
홍표는 미숙이라는 여자와 어떤 결혼 생활을 하였을까..
격동의 20대를 보내면서
나름대로 고통을 통해 성장한 만치
그도 성숙한 인간이 되어
남편 노릇
아버지 노릇 했을까?
연화라는 이름을 붙인 그 딸은 연화처럼
아름답게 자랐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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