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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 15부- 승하가 잡은 것 본문

주지훈/마왕

마왕 15부- 승하가 잡은 것

모놀로그 2011. 2. 23. 16:54

 

 

 

 

 

 

 

다름 아닌 해인과 단둘이 종일 보내다시피한 승하는
자기도 모르게 완전히 무장해제되어버렸다.

그는 복수자도, 피에 쩔은 마왕도, 음침한 동굴 속에
웅크리고 들어앉아 스스로를 조련하는 노련한 조련사이자
동시에
그 조련사를 다시 훈련시키는 상처입은 짐승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젊은 남자 오승하가 되어 버렸다.
그는 무심결에 그야말로
처음으로 활짝 웃고 만다.

 

그러나
승하의 이 서툴고 사랑스러운 모습에서 난 미소를 지을 수가 없다.
오히려 내겐 굉장히 가슴아픈 장면이다.

'그렇게 자주 좀 웃으세요'

라는 해인의 말에
급정색하는 승하.


 

 

 

 

 

 

 

'아니..내가 웃었단 말인가? 이 내가...정말 웃었단 말인가?'
라고나 하듯이
그는 어색하리만큼 급격하게 경직되버린다.

그러나
여인의 체취를 바로 곁에서 종일 느껴야했던
젊은 남자 오승하의
이미 약해질대로 약해진 방어전선이
돌아서려는 해인을 본 순간 갑자기 맥없이 무너진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해인의 팔목을 잡는다.
마치 이 순간을 놓치면
영영 그녀를 만져볼 기회는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듯한
절박하고 반사적인 행동이다.

이 순간의 승하는

그 어느 때보다 내겐 아프게 보인다.

 

이성을 물리치는 본성의 승리 때문이다.
냉철한 복수자이고 마왕이며 아름다운 루시퍼이고자
12년을 갈고 닦았던 내공을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눌러버린 그것,

꼭 한번만 해보고 싶은 그것,
좋아하는 여자와 닿아보고 싶은 것,
그냥 손 한번만 잡아보고 싶은 것,
그 이상은 바라지도 않고 바랄수도 없지만
그래도 그것만이라도 한번만 꼭 해보고 싶은 욕망이

 

굳건한 철갑옷을 뚫고 나와

덥썩 잡아버린다.

 

 

 

 

 

누구보다 놀라는 건

바로 오승하 자신이다.

 

 

그가 자신에게 절대로 허용하지 않았던 것들,

아니 허용하지 않으리라 맹세했을 그것들,

 

젊음이라는 것,

그리고 삶이 주는 작은 행복들..

그 감촉과 느낌들..

 

그건 희열이며, 그래서 낯설지만 너무나 매혹적이라

그는 두려웠을 것이다.

 

그것들에게 그만  지고만 것이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는 듯,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건 그의 설계도엔 없던 것들이다.

아니, 상상조차 하지 않았기에

전혀 걱정도 대비도 하지 않았던 에러이다.

 

 

 

 

 

 

그러면서도 역시 이성을 누르는 본성이

그녀에게 닿았을 때의 감촉을 되새기게 만들고,

아마도 처음으로 세차게 뛰었을 그의 심장의 고동이

내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그러나 난 그가 붙잡은 것이,


마치 자기의 잃어버린 청춘같고,
잃어버릴 생명 같고,
가질 수 없는 젊음 같고,
허용되지 않은 삶인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