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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철인왕후',그리고 사도세자의 서자들

모놀로그 2023. 2. 10. 10:56

요즘 '드라마 철인왕후'를 보고 있다.
이 드라마를 처음 보는 건 아니다

몇 년 만인가, 별 부담 없으면서 재밌고 유쾌한 드라마가 보고 싶어서

내 방대한 드라마 목록 중에서 골랐는데,

전에 보았을 땐 발견하지 못한 여러 가지 매력이 새삼 눈에 띄는 바람에

유독 꽂혀서 정주행  뺑뺑이를 무한정  돌고 있다.

난 동영상을 틀어놓고는 대개는 다른 짓거리를 많이 하는 편이라

화면에 집중하지 않는다.

특히 재탕 드라마들일수록 그런 식의 시청법이 심하다.

드라마는, 그러나 영상이 중요하다.

대사보다, 아니 대사는 없지만 극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중요한 장면이 때때로 삽입된다.

 

처음 정주행할 때는 비교적 집중하지만

처음이라 놓치는 작은 장면이나, 그 장면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실은 두 번째 정주행이 매우 중요하다.

어떤 드라마는 볼 때마다 새로운 장면을 발견하기도 하고,

새로운 느낌을 받기도 하며,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기도 한다.

그런데 드라마 시청법이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매우 산만해져서 정주행 처음 당시에만 집중을 대충 할 뿐, 이후론

그저 라디오 드라마를 틀어 놓듯이 들려오는 소리만 흘려듣게 된다.

그러다가 중간 즈음에서 시청을 끊어버리는 것이다.

 

이런 나쁜 버릇이 좋은 작품 감상에 지대한 손해를 보게 만드는데,

아마도'철인왕후'가 전형적으로 그런 작품이었나 보다.

아마도 코믹드라마에 타임슬립물에 판타지 사극이라 가볍게 생각한 면도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내가 정말 싫어하는 

조선조 말기의 약해빠진 왕권에 이른바 세도정치가 극심해지면서 망조로 들어서는 꼬락서니가 보기 싫은 점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시대적 배경이 '철종'이라는 것이 제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코믹한 드라마에 

비참한 운명의 왕이라니...어울리지 않는다.

 

정통 사극이 오래 전부터

되풀이하고 주입하고 세뇌시킨

바로 그 이데올로기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거나,

혹은 벗어날지라도 사실 해석과는 전혀 별개의, 아예 창작을 해버리는 것도 싫지만, ,

그렇다고 수십 년을 같은 장면이나 같은 해석을 반복하거나,

혹은 새로운 해석이랍시고

'이덕일'식의 엉뚱하고 비뚤어진 사관을 강요하는 것도 역겹다.

이덕일이야말로 역사 왜곡의 달인이니까.

결국 사극은 기존의 시각이나 새로운 해석 어쩌구나

모두 거슬린다.

그저 화려해진 세트나, 복장으로 겉치레만 그럴 듯 해진 것도 싫다.

 

철인왕후는,판타지사극이기에

어느 정도 지나친 감이 있더라도 기본전제, 즉,

세도 정치가 극심했던 점이나 철종이라는 인물이 매우 왕권이 약했던 점이라던가,

철인왕후라는 인물 역시 알려진 바나 기록이 남겨진 바가 전혀 없으니 상상의 영역이 넓은 인물일 수 있다는 점에선

어느 정도의 과장이나 창작이 그렇게 거슬릴 건 없다.

 

세도정치의 중심인물을 제외하면

철종이나 철인왕후의 삶이 어떠했는가는

실록이나,승정원일기(번역 여부)는잘모르겠지만,

난 실록도 승정원일기도 그렇게 철저하게 신봉하지 않는다.

 

우린 어차피 결과를 가지고 그 시대를 판단할 수 있을 뿐,

그리고 몇 개의 올바른 팩트로 상황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을 뿐,

이면의 심리나 정치적 알력, 고뇌, 인간들의 사상, 뻔뻔함, 악함

그러한 것들은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드라마 철인왕후를 이번에 다시 보면서

내가 놓쳤던 많은 장면과 그 장면의 의미,

혹은 그 장면의 매력, 그 장면 속에 담긴 주요 인물들의 심리를 재발견했던 것 같다.

그래서 몇 번이고 정주행을 했는데

신기하게도 볼 때마다 새로운 뭔가가 보이는 것이었다.

그게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철인왕후는

매력적이고 재밌는 드라마이다.

배우들의 연기가 뛰어나고 독창적이라,

타임슬립의 클리쎄에서 벗어난 신선함이 있다.

특히나 평소 그렇게 호감이 아니었던

'신혜선'과 다소는 낯설은 '김정현'배우가 그러하다.

'비밀의 숲'에서 짜증 나는 캐릭터로 내게 미움을 받았던 신혜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이 '철인왕후'에선

그 어떤 젊고 미모의 여배우도 보여줄 수 없는 넓은 연기력으로 놀랍게 한다.

코믹  연기를 그렇게 기막히게 할 수있다는 것도

감탄스럽고, 입이 딱 벌 어지는 명연기의 퍼레이드를 쉴 새 없이 펼치며

종횡무진, 화면을 누비고 다닌다.

 

김정현 배우는,

일찍이 그 배우의 작품을 본격 감상한 것이 철인왕후가 처음이지만,

그렇다고 완전 생소한 배우는 아니었다.

철인왕후에선 젊은 배우답지 않게 자유자재로

코믹 과진지 사이를 넘나드는 데, 섹시하기까지 하다.

 

조연들은 말할 것도 없는 연기 베테랑으로 단단히 포진했다.

 

악역들은 다소 희화화해서

화가 나기보단 차라리 우스꽝스럽게 연출하여 악덕 정치꾼들이 나와도 그다지 열받지 않게끔 했다.

순원왕후나, 조대비, 김문근 등등의 인물들이 그러하다.

 

몇 명은 대단히 심각한데,

그들은 대부분 사랑꾼들이다.정치를 위해 악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품은 사랑의 소유욕을 위해서 악역을 자처한다.

이들이 드라마에 반드시 나오는 스트레스의 주범들이다

자기만의 시선과 사고에 갇혀서 고집스러운 사고와 언행으로 보는사람 피곤하게 만드는 원흉들이다.

피해의식에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비극적 드라마적 감성은 이들이 초래한다.

대표적으로 영평 군과 김병인, 그리고 조화진이 그러하다.

 

하지만 이 배역의 세 배우는 외모가 준수해서 눈은 즐겁다. 

 

문제는

드라마 이산'이 그러했듯이, 제 아무리 판타지 사극으로 치장해도

워낙에 철종이라는 왕에 대해선 수 백 년 간 쌓아 올려진 강한 이미지가 우리를 지배하기에

드라마의 매력엔 빠져 들지만,

마냥 즐거울 수만은 없는 찝찝한 구석이 있어 어쩐지 편치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제아무리 상상력의 영역이 있다 한 들,

그들의 실제로 존재했던 인물인 한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팩트가

해피엔딩일 수 없는 인물들이 주인공이라는 것이,

비록 엔딩마저 판타지로 끝났을 망정, 그게 판타지인 한

만족해하며 보내는 것이 되지 않을 아픔이 있는 시대요, 인물들이기 때문이다

 

 

이산에서

이산과 '의빈성씨'와의 사랑이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쳐도,

그걸로 '그들은 행복하게 잘 먹고 잘 살았다'로

끝나는 게 아니라

더없이 짧은 시간에 그 사랑과 그 결실은 처절하게 비극으로 끝난 것이 엄연한 사실인 것처럼,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것이 전혀 기쁘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기쁘긴커녕 이제부터 고행의 시작이구나 싶은 것처럼 말이다.

 

철종을  지켜보면서

'장봉환'이라는 인물은 수시로 이런 대사를 읊는다.

 

'짠한 왕 놈의 새끼'

 

그렇다.

철종의 정체성은 그게 사실이고 그게 전부이고, 그게 팩트이자 과정이고 결과이다.

 

드라마에서 아무리 그를 성공한 개혁 군주이자 입헌군주제를 성공시킨

새로운 역사의 창조자로 만들어줘도 그게 판타지라는 사실을 우리는 아는 것이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 실패해서 방황하다

겨우 30대 초반의 나이로 죽어버리는 걸 보고 싶은 시청자는 없을 것이다.

 

뿐이랴,

철인왕후는 어떠한가?

우 14세의 나이에 그야말로 안동김문의 꼭두각시처럼 왕비에 봉해지고

아들을 하나 낳기는 했지만

일찌감치 죽어버리고,

철종 보다 먼저였는지 이후에 떠났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확실한 건,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은 채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인물인 것이다.

 

철종이란 인물의 아내와 자식들은,

유일하게 살아남긴 했으되,그역시 요절해버린' 영혜옹주'를 제외하곤,

모두 이름만 남겼을 뿐 짠하게 살다가 짠하게  가 버린

저따위 운명이 다 있나 싶은 왕이라는 것이다.

제대로 왕노릇을 못할 바에야 오래 살기라도 할 것이지...

 

고종을 보라!

제대로 임금 노릇한 것도 없는 정도가 아니라,

망국의 절차를 밟아가는 혼란 속에서

마누라가 비참하게 죽는 꼴을 봤음에도,

나라를 빼앗긴 왕임에도,

권력욕 하나는 끝내주는 데다가

60을 넘겨 죽은 비교적 장수한 왕이다.

뭐 그정도는 해줘야 동정심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한나라의 왕이었던 이가 그저

'짠하게 살다가 짠하게 가버렸다'는

세월이 어떠했든 마음 아픈 일이다.

 

하기야 조선시대에 그렇게 짠하게 살다가 짠하게 가버린 왕이 한 둘인가?

단종은 어떠했던가?

하지만 적어도 단종에겐 정통성이 있었고,

그래서 비웃음을 당하진 않는다.

그를 위해 목숨을 내던진, 아니 올바른 역사를 위해 기꺼이 산화한 신하들도 있었던 것이다.

철종에겐 그런 것마저 없었다.

그는 정통성도 , 그를 따르는 신하도, 그를 사랑하는 여인도, 가족도, 자식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철종이 짠한 것은 그가 그러한 왕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내가 가슴 아프게 여기는 사도세자의 불쌍한 서자들의 자손들 중 한 명이다.

세상에서 가장 팔자가 센 인간이 다름 아닌 왕족으로,

그것도 조선조의 왕족으로 태어나는 인간들이라고 생각하곤 했었다.

적자라면 모를까,조선조 서자들의 운명이란....

태어나지 않는 것만 못 한 것이 조선조 서자들의 삶이었다.

 

신하들의 멸시와, 아비라는 작자의 개무시와

걸핏하면 역모의 무리들이 멋대로 자신들의 '거사'에 이용하는 바람에

뭔가 뭔지도 모른 채

허망하게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기 일쑤였다. 

그래도 왕의 서자로 태어난 인물들은 좀 낫다.

 

조선조 후기, 특히 사도세자 이후로 매우 귀해진 왕족 남자들 중에서도

가장 가혹한 운명에 시달린 것이 바로 사도세자의 서자들이다.

 

하필이면,비참하기 그지없게 살다가,

비참하게 죽어버린사 도세자의 아들들이다.

적장자인 정조마저도 세손시절엔 조심스럽게 처신하며 늘 두려움에 떨며 살았을때,

그 서자들이야 어떠했겠는가? 

 

아버지 살아 생전에는 물론, 죄인으로 죽어버린 이후에도
평생을 눈칫밥을 먹으며, 여기저기서 왕따 당하고 이용당하다가 죽임을 당하고,

또 이용당하다가 귀양 가서 죽고, 사약 먹고 죽는 등,
도무지가 제대로 늙어서 죽은 이가 없을 정도로 박복한 사람들이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그들은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 조차
할아버지나 아버지의 사랑은 커녕

태어난 것 자체가 재앙인 존재들 취급을 받았다는 점이다.

 

혜빈은
'해괴한 것들이 태어나서'어쩌고라고 한중록에서 대놓고 언급한다.

 

서장자이자 철종의 조부였던 '은언군'은,아예 임신사실이 알려지기가 무섭게  다름아닌 아버지에 의해 낙태당할 뻔 했고,할아버지라는 작자는 세자가 서자를 잉태시켰다고 노발대발했다니....정작 영조 자신은 최숙빈의 상중에 후궁에게 임신까지 시켜서숙종에게 욕을 바가지로 얻어 먹었음에도 말이다.'내로남불'의 절정인 궁생활의 아이러니의 극치!!!!!!!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생전 만나 보기라도 했는지 궁금할 지경이고,

세상에 나와서도 온갖 험한 꼴을 지켜보며 숨죽이며 살아간다.

엄마는 맞아 죽거나, 요절하는 등등
그야말로 비참한 왕족의 레전드들이다.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조선조의 말기로 접어들면서 현저하게

왕손이 씨가 마르기 시작했다.

어쩌다 태어나도 모두 요절했다.

문효세자에 효명세자에 헌종까지

모두 30 전에 심하면 20대 초반에 홍서했다.

 

적어도 소현세자의 혈손들은 명맥을 이어 갔지만

효종과 현종,그리고 숙종과 영조의 명맥을 이어가야하는 혈손들은

씨가 마르다시피 했던 시절이다. 

결국 헌종대에서 숙종의 혈통은끝나 버린다.

적자던 서자던 아들은 왕실의 힘이다.

그런데 왜 굳이 사도세자의 서자들은 그토록 구박덩어리에

재앙덩어리로 여겨지며

결국엔 모조리 죽여버리는 바람에

고종이라는엉 뚱한 왕이 탄생한 것일까?

적어도 철종은 당당한 사도세자의 혈통이었던것이다.

 

그들은 기껏 역모 모의가 이루어지면   당사자조차 모르게 떠받들렸다가
엄하게 목만 날아가거나
일가족이 몰살당하기 일쑤였으니,
참으로 비참한 아버지에  그 아들들이 아닐 수 없다.
그나마 마지막 하나 살아남은 은전군마저
정조가 어떻게든 살려 보려고 악착같이 마크했지만
기어이 정순왕후가 죽여버렸으니
대체 아무 힘없는 왕족,
게다가 왕족이 씨가 마른 숙종의 후손들을
그렇게까지 모조리 죽여버린 이유가 뭔지....

그 시대 그 바닥의 사정이야 실록이나,승정원일기마저
일어난 사건의 팩트만 적을 뿐,
이면의 진실은 절대로 적지 않았을 것이기에
우리가 결코 알 수 없는 '그들만의 리그'가 있었을 것이지만.

실제로
은밀하게 독살당한 왕이나 왕족도 많을 것 같고,
우리가 모르는 컴컴한 일들도 훨씬 많을 것이다.

 

조선조는 힘없는 왕족처럼 처참한 존재도 없었던 만큼

아무리 유쾌하고 재밌는 드라마라 해도

어떻든 실제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에서는 숙종의 혈통을 이어받은

마지막 왕손이었던 철종은 실제로 조선조 마지막 왕통이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고,

사도세자의 서자들과 그후손으로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내야 했으며

 

대개가 20대에 비명 횡사하였고,

그 자손들 역시 삶의 질이 뻔했을 것을 생각하면

왜 하필 판타지 사극의 주인공을 철종으로,

그'짠한 왕 놈의 새끼'로 했는지,

 

게다가

김정현이라는 배우는

그 '짠한 왕 놈의 새끼'역을 어찌나 잘하는지

웃으면서도 마음은 편치 않았던, 그래서 어쩐지 짠한 드라마로

내마음엔 각인되었다.

 

그런 내게

21세기의 전형적 자뻑형에 닳아빠지고 뻔뻔하기 그지없는

' 장봉환'같은 인간의 능글맞고 이기적이며 유머러스하고

조선왕조에 난데없이 갖다놔도 척척 적응하면서

오히려 큰소리치는  인물이 없었다면

아마도 철인왕후는

두번 보기 힘들었을 것 같다.

최진혁배우의 힘찬 목소리가 그나마 극을 유쾌하게 이끌어 준

보이지않는 에너지였다고 생각한다.

그의 나레이션이 늘 위로가 되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