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더글로리-동은과 여정-상처입은 영혼의 조우 본문
드라마 `더글로리'에서
두 사람의 첫 만남은 어떤 카페에서였다.
그때 두 사람은 서로를 등지고 있다.
친구와 함께 떠드는 대화는 동은에겐 소음이었다.
피곤해서 눈을 감는다.
과도한 일상의 힘겨움과 각박한 영혼의 피폐함으로 지쳐있지만,
아무리 지겨워도 힘을 내야 하는 동은에게
다른 우주의 생명체 같은 일상적이고 해맑은 젊은이들의 장난기 어린 대화는 외계어이다.
그들은 서로 등지고 서 있었지만,
등이 닿을 정도로 거리는 가깝다.
그들은 곧 비슷한 처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응급실에서의 만남에서
드디어 온몸이 상처투성이인 동은과, 온통 피에 젖은 여정은
나란히 누워 마주 본다.
메마르고 지친 눈빛과
무표정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본다.
거기엔 자기와 똑같은 눈빛과 표정을 한 사람이
거울 속을 비춘 듯이 자기를 멀거니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당시엔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서로를 알아본다.
너도 아프구나, 몸이 아니라 마음이...
동은은 영혼이 죽었고, 여정은 죽어가는 중이다.
자신과 똑같은 눈빛을 한 외로운 군상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 서로가 눈을 뗄 수가 없다.
그들은 그렇게 만났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둘 다 학생이었다.
잠깐 사이에 등지고 있던 두 사람을 마주 보게 한 어떤 사건이 여정에게 벌어졌고,
여정은 그래서 동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깊은 고통과 외로움과 인간성이 말살되어가는 두 영혼은
드디어 조우한다.
동은 역시 살면서 처음으로 막다른 골목에서 안간힘을 쓰는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발견한다.
그들은 오랫동안 서로를 바라본다. 손이 닿을 듯 말 듯.
언젠간 그 손을 마주 잡을 날이 올 것만 같다.
내가 우울증으로 고생할 때,
가장 괴로운 일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었다.
날 위로해준답시고 모였던 성당의 성가대 멤버들과 자리를 함께했을 때,
레지오 단원들과 롯데리아에서 억지로 뭔가를 씹어 먹을 때
난
'여긴 어디?
난 누구?
여긴 혹시 고독지옥? '
분명 가까이 있는데,
다른 종족인양 그들은 낯설고 무섭고 그 앞에서 멀쩡한 척 해야하는
내가 처량하기만 했다.
이미 많은 세월을 그렇게 살아왔을 동은보다
여정의 상황이 더 불리했다.
동은은 혼자이고, 관계라는 것에서 자유롭고
주변인간들을 무시해 치울 수 있었지만,
여정에게 그것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엄마에게 자신이 받고 있는 테러를 숨겨야 했고,
동료 선배 후배들에겐 자신이 병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굳이 들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환자들에겐 멀쩡한 의사로 보여야 하니까.
그는 시린 가슴과 미칠듯한 고통과 분노,
그리고 의사로서의 가치관과
그 인간을 죽이고 싶다는 욕망과 싸우느라 점점 만신창이 되어갔다.
그는 정신과 심리상담에서 조차 연극을 해야 했다.
이제 트레이드 마크가 된 밝은 웃음과 명랑한 말투를 유지하느라 그는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 여정은 자신과 비슷한 눈빛을 가진,
그러나 명랑한 체 하지 않는 둥은을 보는 것이 좋았고,
그녀와 함께 있는 것이 좋았다.
그녀를 바둑과외 시켜 주었던 1년은 그에겐 휴식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약 없이 헤어진다.
이후로 여정은 미치지 않기 위해, 견디기 위해
동은에게 문자를 보내곤 했다.
이해하거나,위로받지 않아도,
같이 있기만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그 여자와의 가냘픈 인연의 끈을
위태롭게 잡고 있었다.
그는 알고 있었다.
그 여자 또한 자기와 같을 거라고.
동은과 여정의 야릇한 관계는 8 년 가까이 이어지지만,
두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나눈 시간은 얼마나 될까?
세월이 흘러도
어제 만난 것처럼 늘 한결같을 수 있었던 그들의 만남은
참 신기한 관계였다.
몇 년 만에 만나도 어제 만났던 친구처럼
스스럼없고 솔직할 수 있었고
몇 마디만 나눠도 상대의 마음이 들여다보였다.
따스한 햇살을 찾아가는 본능처럼
여정은 동은에 대한 관심을 놓지 않고
마침내는 그녀 가까이 가고 싶어 졌다.
태어나서
그토록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고
다정하게 대해주고
그러면서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부르기만 하면 달려 올 태세의,
게다가 무엇 때문인지 상처 입은 작은 짐승 같은 눈빛으로 애처롭게 웃는 여정에게
동은은 타인에 대한 혐오감이나 거부감,혹은 거리감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은 그에게 자신의 치명적인 치부를 스스럼없이 내 보이는 신뢰감을 보여줌으로써
둘의 장벽은 완전히 허물어졌다.
동은보다 여정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그는 자신이 어떻게 망가져가는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여정은 혼자 있을 때는 수 없이 칼로 그 넘을 찌르고 또 찔렀을 것이다.
죽이고 또 죽였을 것이다
칼로 온몸을 마구 헤집으며 매일밤 피를 뒤집어 썼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정말 미쳐버릴 것 같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자기를 닮은 그 여자를 위해
혼자 하는 칼놀이를 현실로 옮길 작정인 것 같다.
그에겐 너무나 긴 시간을 찌르고 또 찔러왔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그들의 만남과 미래가 구원이 될 것인지,
손에 손잡고,
사이좋게 지옥으로 떨어지게 될지
2부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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