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궁 6부- 신군, 채경, 율군그리고 효린, 그들의 첫걸음 본문
무엇이든 처음이라는 것이 있다.
흔히들 발단이라고 부른다.
혹은 기회라고 부를수도 있겠다.
우리의 삶에선 기회라고 부르겠지만,
드라마를 비롯한
극중에선
발단이 되겠다.
궁은
고혹적이고 무거운 격식에 얽매인 궁이라는
답답하지만 우아한 19세식의 공간과
그 공간과 타협할 수만도
그렇다고 쉽게 버릴 수도 없는
21세기의 황족들 이야기와
그리고 갑작스레
그 황족이라는 신분에 편입된
소녀의 이야기가
느릿하게 진행된다.
황태자부부의 사이는 이렇다할 진전이 없다.
그들은 부부라는 이름으로 묶였지만,
친구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부는 물론 아니고,
남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에서
각종 공식 행사엔 부부동반으로 참석하지만,
동궁전에선 각각의 처소에서
학교에서도 자기 분야에서,
그 어떤 공감대도 생활도 공유하지 못한 채로
지내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지내는 것이
그들에겐 지극히 당연한 듯 하다.
그렇게 가다간 정말 평생이 가도
정들 것 같지 않은
냉랭하고 무늬만 부부,
게다가 미성년,
아직 학생,
아무것도 나눌 것이 없고,
대화가 통하는 것도 아닌
그냥 동거인에 지나지 않는
무미건조한 나날들이 계속될 것만 같다.
어느날
공식 행사에 참석한 신군은
그것도 만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계란 세례를 받는다.
황태자로서의 체통과 자존심밖엔
가진 게 없는 그가
티비로 생중계까지 되는 와중에
날계란으로 온몸이 범벅이 되는 것이다.
그는 마치 남의 일처럼
멀거니 자기 얼굴에서 날계란이 끈적하게
흘러내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
후에 채경이 한 말,
"잊혀지지가 않아...그 순간의 표정이.."
그 말대로
그는 난생 처음 겪여보는 수모에도
흐트러짐도 놀라움도 없이,
오히려 생경한 모습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물론 주변은 비명 소리와 카메라 플래쉬소리와
경호원들의 외침으로 가득하다.
우아한 공식 행사장은 순식간에
살벌함이 팽배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가 계란 세례를 받는 순간,
채경이 온몸으로 날아오는 계란을 막아내며
발을 구르며, 울먹이며,
화를 내고, 어찌할 바를 모른채
그의 곁에 있었다는 점이다.
명문가 출신의 황태자비라면 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신군으로선 처음으로 받아보는
원색적이고 진심어린,
채경의 염려였다.
그가 일생 받아온
경호원들의 으례적인 보호도 아니요,
황후나 황제의 냉랭하고 격식에 맞는 염려의 말과 훈계가 아닌,
그런 원색적인 행동은
채경만이 할 수 있는 것이었고,
그때 은연 중에 신군에겐 진정 위로가 되었을 것이다.
누군가,
아니 자기 아내라고 이름지어지고
자기 옆자리에 늘 있지만,
자기와는 무관한 존재라고 생각했던,
아니 그렇게 생각하고
거리감을 두려고 생각했던
어떤 존재의 자기에 대한 진심에 가득찬 외침과 분노..
그것은 그의 결핍을 채워줄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짙은 감정이었다.
"신군, 괜찮아?"
그 여자 아이는 울먹이며 묻는다.
그 말에선 그가 한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니 일생을 통해서 한번도 들어보지 못한
진정성이 느껴진다.
아주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이었지만
그 짧은 순간의 채경의 반응은
예상치 못한 신군의 리액션을 불러일으키는데
바로
혼인한 이래 처음으로 자발적으로
채경의 처소를 찾아가는 것이었다.
그는 그 원색적인 위로를 다시금 받고 싶었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은,
사실 계란 세례는
혜정궁의 작품이다.
공식 석상에서 계란 세례를 받으면
어떻게 보일까..
국민들이 현 황실내지, 황태자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느낌을 줄 것이다.
어찌 보면,
혜정전이 이후로 펼치는 갖가지 대신군 공격 중에선
제일 재치 있다.
무엇보다 현 황태자에 대한 반감이 국민 사이에 흐르고 있다는 것처럼
황태자를 공격하는 데 좋은 무기는 없으니까.
하지만, 또 재밌는 것은,
혜정궁의 신군 공격은 늘 채경과 신군 사이가 가까와지는 것에
징검다리가 되어주는 것과 동시에,
당연히 율군의 질투심을 부추겨서 오히려 채경에 대한 막연한 연민과 호감이
연모의 정으로 깊어가게끔 하는 것이다.
황태자를 공격하는 것은 자신의 아들을 위함인데,
오히려 자신의 아들이 언제나 가장 큰 상처를 받게 된다는 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일까?
어떻든 신군은 처음으로 채경을 찾았다.
행사장에서의 그녀의 으례적이지 않은
진정성을 내뿜는 그에 대한 염려는
감춰져 있던 그의 허기증을 자극했고,
그는 보다 더 간절하게 그걸 원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오로지 자신 만을 위한 그녀의 그 염려를
들이마시는 것으로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외로움이라는
자신도 모르는 깊고 어두운 우물을 채우고 싶었다.
냉소적인 그는
분위기 파악 못하고 푼수짓하는 네가 곁에 있으면
위로가 될까 했다고 비딱하게 말하지만,
그건 의외로 진심이다.
그가 말한대로,
주변 사람들은 지레 그의 우울포스에 질려서,
혹은 그러리라고 짐작하고
그를 내버려두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율군도 그렇게 말한다.
그들은 모두 피상적으로만 그를 알고 있다.
그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궁의 사람들은
자기 그림자에 자기가 겁내듯 그의 곁에 얼씬도 하지 않고,
그는 혼자이다.
하긴 아무 일 없을 때도 살벌포스를 내뿜으니,
그런 꼴을 당한 그의 곁에 누가 있고 싶으랴~!
그의 아내라는 이름의
매사에 거리낌 없고 눈치없고 명랑하고 주책 없는
아니,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채경말고는
아무도 없다.
황태자라는 이유로 수모를 당했고,
황태자라는 이유로 경호원들의 직업적인 돌봄은 있을망정,
결국 그는 혼자 남는다.
실은 그는 혼자라는 게 지긋지긋한데 말이다.
그때 그 순간,
오로지 딱 한 사람,
직업적인 훈련에 의한 것도 아니요,
황태자여서 보호막을 쳐준 것도 아닌,
그런데 이름뿐인 아내면서
그의 냉대와 무관심 외에는 받은 것도 없으면서
진심으로 자기를 위해
몸을 던지고 슬퍼했던 채경을 찾아서
그는 파빌리온을 가로지르고 있다.
처음으로~!!
그는 채경이라는 존재를 필요로 하고,
그녀를 인정하고,
그녀가 옆에 있어주기를 바랬던 순간이다.
그리고 그게 바로 발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순간에
채경은
엉뚱하게도
율과 함께 앉아 있다.
그것을 한 장의 그림으로 보자면
그에겐 씁쓸하고 상실감에 사로잡힐 만한
바람직하지 않은 장면이자
외로운 사람들이 흔히 가지는 강렬한 소유욕과 질투심마저
느낄만한 장면이다.
특히나 그 순간에 그녀를 필요로 했으니 더욱 그렇다.
그러나
그런 장면엔 항상 그렇듯이
오류가 있다.
그녀는 실은 그때
신을 위해 아파하고 분노하고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도
신군처럼
바로 그 순간에
자신의 운명이 어쩔 수 없이
그와 함께라는 것
그의 아픔이 더이상 타인의 그것이 아니라는 것
단순히 황태자가 당한 봉변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남편이 당한 망신이라는 사실을
막연하게 인지하고,
(똑똑한 여자라면 더욱 확실하게 알았겠지만)
뭔지 모를 연대감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의 곁에 있어주고 싶다.
그가 염려된다. 자기 눈으로 그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
보고 싶다.
그런데 그것을 율이 제어한다.
그 또한 처음으로 율이 그들의 화합을 방해하는 순간이다.
그때까지 율은 비록 채경에게 호감을 지니고 있었다곤
하지만 그래도 비교적 방관자적인 시각으로
그녀를 신의 아내, 황태자비로 대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채경이 신을 위해 진심으로 분개하고, 염려하는 모습을 보자
갑자기 방해하고 싶어진다.
신군처럼 그녀를 냉대하는 인간에겐
그녀의 그런 진심은 아깝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자신도 신군에게 가려다가 거부당한 것이
자존심이 상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 율도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를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고 있다.
그를 차갑고 이기적이고 자존심 강하고 성질 더러운
아이라고만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그는 신군에게 별 관심이 없다.
그 역시 인간 이신, 사촌 이신이 아니라
황태자 이신으로만 그를 보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에겐 가슴 속 깊이 한 가지 더 맺힌 것이 있다.
바로 자기 것을 모조리 가져가서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오만한 녀석이라는 편견이다.
그의 돌연한 방해도
물론 그때 그 순간이 시작이었다.
채경의 진심어린 염려와 분노가 발단이 된 것이다.
그때 그는 이후의 자신의 무기였던 위로와 동정, 그리고 효린이라는 존재를 이용해서
행여 신군에게 갈지도 모를 채경의 마음을 제어하려한다.
게다가 스킨쉽까지 시도한다.
외롭지? 힘들지? 난 너를 이해하고 동정하고 있어..
나만이 니가 현재 얼마나 힘들게 애쓰고 있는지,
남편이라는 작자조차 널 모른 체하고
방치하고 있지만,
나만은 알고 있고 널 안쓰럽게 여기고 있어..
적신호가 울리자
본능적으로 그녀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하려 하는 것이다.
아마 율군 스스로도 그 순간엔 알 수 없는 마음,
그러나 반사적인 행위였을 것이다.
사실 율군으로선 달리 무기가 없다.
그녀를 막을 방법도 달리 없다.
자신이 채경을 누구보다 이해하고 염려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달하는 것 말고는
황태자비가 황태자에게 가려는 것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율군이 범한 첫 시행착오이기도 하다.
그런 말을 하는 시기가 영 아니었다.
당시의 채경에겐 자신의 외로움이나 벅찬 황태자비 노릇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마음은 오로지 신군으로 가득 차 있다.
그래서 율군의 마음은 그녀에게 통하지 않는다.
이때, 비로소 본성이 얼굴을 들이민다.
그는 굉장히 독선적이고, 집념이 강한 성격이라는 것이
위기에 처하자 절로 드러난다.
율군은 이번엔 효린이라는 존재를 거론하는 것으로
그녀의 열등감을 자극하려한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이다.
채경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한이 있어도
기어이 자기 의지를 관철시키려는 집념이 엿보여서
솔직히 무시무시하다.
이후로도 그는 끝없이 효린을 무기로 채경이 마음이 신군에게 가려는 걸
방해한다.
그들 부부는 일찌감치 화합할 수 있었지만
수많은 방해와 오해
근원적 요인으로 화합에 제동이 자주 걸려서
막상 부부로서 연인으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완벽하게 서로를 받아들이기까지 오랜 풍파를 거치게 되지만
바로 이때가
그 수많은 어긋남의 첫순간이 되겠다.
즉
처음으로 채경을 찾는 신군의 눈에 들어온
율과 채경의 장면이 그렇고
신군에게 가려는 채경에게 굳이 효린을 들먹이며
은근히 방해하는 율이 그렇다.
부부~!!
억지로 맺어진 부부라하나
어쩔 수 없는 연대감이라고 할까
부부라는 이름이 얼마나 힘이 센가~~
사이가 좋지도 않고
함께 한 시간도 없고
대화 한번 나눠본 적 없는 그들이
위기에 처하자
본능적으로 서로를 찾는다.
그리고
그 관계에 제동을 거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 인물은 속삭인다.
넌 아무것도 아냐
넌 명색만 황태자비일뿐
그의 아내가 아냐
넌 남의 자리에 앉아 있는 허수아비일뿐이야
그가 원하는 건
니가 아냐
그런데
불행히도
신군이 원하는 건
바로 그 순간에 채경이었고
오로지 채경이었고
채경일 수밖에 없고
채경 또한 그러했다.
신군이 바라보는
그들의 모습은
물론
겉모습이다.
그 이면에 뭔가 꿈틀대는지
어떤 위기가 그들 사이에 시작되는지
그는 알 길이 없다.
그들이 온전하게 마음을 열고 부부가
아니 부부 이전에 친구가
연인이 될 준비를 하기도 전에
깊이 도랑부터 파여져서
그들을 떼어놓으려는 시도가
막 시작되었음도 모른다.
그가 본 것은 그저
자기도 모르게 찾았던
그의 유일한 편이어야할
채경이 실제의 정혼자이자 자신의 사촌인 율군과 사이좋게 앉아서 잡담이나 나누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병처럼 새록새록 피어나는
고독과 쓸쓸함과 그로 인한 심술
그리고 소외감
뭔지 모를 불쾌함, 짜증
그러나 무엇보다
외로움....
역시 난 혼자구나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위해 울고 있었고
걱정하고 있었고
빈정대는 자신에게 온몸을 던져서 사과하고 있었다.
그들이 하나가 될 첫 걸음이 시작된 것이다.
언제나 음모와
사랑은 함께 시작된다.
음모는
사랑을 방해하고
사랑에 상처를 주고
오해를 준다.
그래서
아프고
쓸쓸하고
서로 할퀴지만
실은
그게 음모의 바보 같은 점이다.
음모는 사랑을 깊어지게 한다.
갈라놓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합치고
하나가 되기 위한 본능이다.
그런데
그것을 어거지로 떼어놓으려고 하니
자연히
그 욕망은 깊어지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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