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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이 끝날 때, 겨울이 시작될 때...

모놀로그 2012. 12. 3. 20:38

엄마는 몇 년 전부터 글을 쓰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유명 문예 잡지로 등단한 작가가 되었다.

 

교정을 내가 맡는데,

실은 별로 재미가 없다.

 

엄마의 글쓰는 스탈이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교정을 맡겼는데, 인정사정없이 모조리 퇴짜를 놓기도 한다.

그러다보면

정작, 엄마가 쓴 글이 뭐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은행잎이 지기 시작할 무렵,

엄마는 이런 말을 했다.

 

'우리 집 앞의 늙은 은행나무 잎이 모조리 떨어질 때, 난 가을이 끝났음을 안다.'

 

난 이렇게 대꾸했다.

'우리 집 앞에 은행나무가 있어?'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면서 두 가지 점에서 엄마는 화를 낸다.

 

첫째는, 엄마가 쓴 글의 한 귀절이었는데 그것을 몰랐다는 점,

즉 성의없이 엄마의 글을 읽었다는 점과,

 

둘째는, 수십년을 산 집 앞에 은행나무가 있었다는 것도 모르는

딸에 대한 어이상실스러움이다.

 

실은, 난 정말 은행나무가 있다는 걸 몰랐다.

그런데 한편으론 알고 있었다.

그냥, 알면서도 그걸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뿐이다.

 

난 가을이 언제 끝나는진 모르지만,

겨울이 언제 시작되는진 알고 있다.

 

우리 주택가를 감싸고 있는 2차선 도로의 플라타너스 잎이

모조리 저버릴 떄이다.

 

어젯밤,

난 산책을 나갔었다.

 

그동안 몇 차례, 비가 오고, 바람이 불었음에도

아직도 플라타너스엔 상당수의 잎새들이 버티고 있었다.

 

날씨가 무척 추워졌는데도

아직도 버티고 있다.

 

내가 산책하는 와중에도

바람은 불고,

그때마다 속절없이, 힘없이

플라타너스 잎사귀들이 내 머리 위로,

내가 지나간 길 위로,

내가 지나갈 길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러면

난 머리를 들고

과연 저들이 언제까지 버텨줄까?

조마조마해하면서 지켜본다.

 

완전히 앙상해질 때,

지난 여름의 무성했던 기억을 나무들이 스스로 잊어버릴 때,

겨울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는 걸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다.

 

그래서 난

은행나무보다 플라타너스를 더 사랑한다.

 

그 무한한 생명력을,

그 끈질긴 버팀력을

사랑..아니 흠모한다.

 

예전엔 단순히 좋아했지만,

지금은 마치 '마지막 잎새'의 여주인공 같은 심정으로

바라본다.

 

제발...조금만 더 버텨주지 않겠니??

 

오늘도 비가 왔다.

바람도 불었을 것이다.

 

종일 몸이 안좋아서

침대 위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리고 계속 잠을 잤다.

그러나

빗소리는 듣고 있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했다.

 

내가 오늘 밤에 산책을 나가면,

어쩌면

아스팔트 위에 어젯밤 봤던 잎새들이

딩굴고 있을지도 몰라.

 

나무는 앙상하게 헐벗은 모습으로

원망스럽게

그 잎새들을 바라보고 있겠지.

 

하지만,

의연하게 내년을 또 기다리겠지.

 

그 무식한 초록색 잎새들은

어차피 자기에게 돌아올 테니까...

 

하지만

난 내년을 기다릴 수가 없다.

 

그러기 위해

기나긴 겨울을 지내야하는데,

난 나무처럼 참을성이 없으니까.

 

그러나

나무처럼

내가 참을성이 있건 없건,

난 아무런 힘이 없으므로

속수무책으로 기다림을 강요당해야한다.

 

이렇게,

한 해가 가버렸다.

 

나의 한 해는,

플라타너스와 함께

끝나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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