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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훈/마왕

마왕- 마왕과 다모,그들의 사랑에 대한 주관적 상념

모놀로그 2011. 7. 3. 10:44

 

사랑의 정의는 누구에게나 각각 그 기준이 있을 것이지만,

내게 말하라고 한다면,

 

영혼의 집이 같은 것이다.

 

몸이 따로일망정

마음은 늘 한 지점에서 만나는 것이다.

 

또한

두 사람 사이에 남들은 모르는 둘만의 세계가 있어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마음이 하나여야 한다.

 

그리고

관심이다.

 

그 사람이 미처 모르는 것까지

그 사람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고통을 아는 것이다.

 

말해주지 않아도

그 사람이 아프다는 걸 알아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긍극적으론

공감대이다.

 

난 이 장면을 보다가 문득 다모를 생각했다.

 

일찌기 다모라는 드라마에서 가장 큰 이슈는 우습지만

 

'과연 장채옥이 사랑한 남자는 누구인가!'

였다.

사실, 다모폐인이었던 나는

 

다모 정도의 드라마에서

이른바 다모폐인이라는 사람들이

가진 가장 큰 관심이

 

'채옥이가 사랑한 남자는 누구얌??'

 

이라는 것이

무지하게 화가 났었다.

다모에서 그게 그렇게 중요하다는 생각도 하지 않았고,

설사 했다쳐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다모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고 확실하며

연출가나 작가의 의도도 명백함에도

다모폐인들은 정치적인 권력다툼에

드라마를 왜곡하기 시작했다.

 

굳이 사랑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각각 자신의 가치관,

즉 사랑에 대한 가치관에 맞게

스스로 판단하면 그만이다.

 

하지만 다모폐인들 중 일부는

그 문제를 두고

장장 몇 달을 쌈질을 해댔다.

 

마치 장채옥의 사랑을 받은 남자가

다모라는 드라마의 승리자라도 된다는 듯한

그 천박한 발상에

난 쓴웃음을 지어야했다.

 

가령,

마왕에서도

 

해인이가 사랑하는 남자가

오수가 아닌 승하라는 이유로

승하의 드라마에서의 위치가 더 격상된다고는 보지 않기 때문이다.

 

대개의 트렌디 드라마에선

반드시 여주의 사랑을 받는 남자가

이른바 메인으로 떠오른다.

아니 적어도 시청자들은 그런 잣대를 지니고 있다.

혹은 드라마 자체도 그렇게 흘러간다.

 

다모폐인중에서도,

특히 장성백파들이

그런 발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장성백이 채옥의 오빠라는 사실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다못해 막판에 극적 반전으로

둘이 실은 친남매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오길 바랄 정도였다.

 

난 다모 방영시에

정말 좋은 리뷰를 많이 읽었고,

당시만해도 드물었던 고급 유저들이 몰려들었던

다모폐인의 수준은

일찌기 그 어떤 드라마팬보다 월등했다고 믿는 바이지만

(물론 이건 2003년에 한해서이다.)

 

그러나,

그건 장성백파에겐 예외가 된다.

 

그들이 추구하는 사랑이라는 건

결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트렌디한 드라마에서의

흔하디 흔한 사랑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내가 다모에서 발견한 사랑의 가치는

그보단 좀 뛰어났었다.

 

내가 장채옥의 사랑이

황보윤이라고 믿은 이유는,

 

장채옥은 황보윤을 위해

늘 인내하지만, 동시에

그 인내로 인해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다.

 

그들의 사랑은 '눈물'이다.

 

그들은 각각 돌아서서 상대로 인해

아파하고, 그래서 눈물을 흘린다.

마주 서서는 치열하게 다투지만

돌아서면

결국 그들이 서로에게 바치는 건

눈물이다.

 

대개, 황보윤을 일컬어 장성백파가 비난한 것이

그의 사랑이 이기적이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난 오히려 장채옥의 사랑이 그랬다고 본다.

그렇다고 내가 이기적인 사랑을 무조건 나쁘게 본다는 뜻은 아니다.

이기심이 없는 사랑은 또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유욕이 없는 사랑이 사랑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얼핏 보기엔

장채옥의 사랑이야말로

헌신적으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 헌신조차

그녀의 이기적인 사랑, 혹은 강렬한 소유욕의 다른 형태라고 난 생각했다.

 

즉 가지고 싶은데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한을 그런 식으로 푸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눈물은 황보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다.

자기 연민의 눈물인 것이다.

 

반면, 황보윤의 눈물은 전적으로 채옥을 위한 것이다.

그는 채옥처럼 헌신할 수가 없다.

적어도 물리적, 육체적 헌신은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눈물을 흘린다.

 

어떻든 그들은

늘 문짝을 사이에 두고

각각 눈물을 흘린다.

 

그때 그들의 마음은 같은 곳에 있다.

 

그래서 난 장채옥의 장성백에 대한 마음은 둘째치고,

그녀의 사랑은

황보윤이라고 생각했다.

 

 

 

 

 

 

 

승하와 해인은

마치 장채옥과 황보윤처럼

문짝, 아닌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각각 한 곳을 바라보고 있다.

 

얼마 전 성당에서의 짧은 순간들이다.

 

 

 

그들은 비록

서로가 각각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같은 시간에 같은 마음으로

같은 곳을 바라보며

같은 생각을 하고

같은 아픔을 지니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지만,

 

그러나 그렇게 서로 모르는데,

그럼에도 서로 같은 곳에 있는 것이

내겐 사랑이다.

 

오승하와 서해인의 사랑은

드라마 사상,

가장 아픈 사랑에 속한다.

 

다모의 사랑처럼 천박한 의문이 끼어들 여지가 없어서

더욱 순수하고 아름답다.

물론 슬프지만,

슬픔처럼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간에게 내린 신의 선물도 없을 것이다.

 

 

이윽고, 그들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한다.

 

 

 

 

 

그 눈물의 의미는 어쩜 각각 다를 수 있다.

 

 

승하에게 있어서

해인은 현재가 아니다.

그녀는 어쩌면 현재일수도 있었지만

이미 현재일 수가 없다.

 

그에겐

만일 다른 인생을 살았다면 해인이

그의 사랑일 수 있지만,

현재에선 스스로에게 허용되지 않는 그 사랑의 무거운 짐을

버릴 수밖에 없는 비애감이 있다.

그래서 승하의 눈엔 눈물이 배어나온다.

 

해인에 대한 승하의 마음,

그녀를 원하는 마음, 그녀와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은.

그가 16년 전에 버린 인생을 되돌아볼 때

그곳에서나 현실이다.

그는 과거 속의 인물이므로

그 사랑을 현재라는 시간으로 끌어올 수가 없다.

그러기엔 너무 늦기도 했지만,

애당초 그럴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의 사랑은 역시 그의 기억 속에 갇혀 있기에

그동안 훔쳐낸 시간 속에서나마

잠시 누렸던 기쁨을 이제 반납해야한다.

 

분명 눈앞에 있다.

손만 내밀면

상대도 기꺼이 자신을 잡을 것임에도

해인의 존재가 승하에겐 현재일 수 없다는 것이

저 쓸쓸한 화면에서 배어나온다.

 

철철 흘리는 해인의 눈물은

이제 혼자 남을 자의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떠나보내야하는 자의 슬픔이다.

 

하지만

눈시울이 붉어지며

배여나오는 눈물을 억누르는,

 

떠나야자는 자의 아픔이

결코

그보다 못하지는 않을 것이다.

 

남는 자와 떠나는 자의 아픔을 암시하는

저 장면에서

 

그러나 내가 보는 건

사랑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사랑이라는 걸

화면을 통해서

형상화해준 작가와 감독,

 

그리고 아름다운 두 배우에게

찬사를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