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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 21부- 율군, 대단해 본문

주지훈/궁

궁 21부- 율군, 대단해

모놀로그 2011. 4. 29. 12:36

 

초창기의 채경이는 다소 덜렁대는데다가,

지나칠 정도로 순진해서 그렇지

 

제법 사려깊고 사랑스러운 아이였다.

 

자기 주관 없이 이리저리 나부끼는 줏대없는 촛대같은 아이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때부터 벌써 좀 이상한 조짐이 보이긴 했다.

 

이건 당췌가

이상하게 율군만 만나면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의 말이라면 성경처럼 절대적으로 신뢰하는 것이다.

자기 판단보단, 또한 신군의 다소는 까칠하고 싸가지없고 냉소적이지만

그래도 알맹이가 있는 말보단,

이상하게 율군의 말에 더 귀를 기울인다.

 

율군의 말들이 대개는, 채경의 가슴에 대못을 박아대는 말이라는 점에서 볼 때

참 신기한 일이다.

 

어쩌면, 율군은 채경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불안과 불신을 교묘하게 자극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자기가 듣고 싶은 말에만 귀를 기울이는 습성이 있지만,

또한 자기가 회피하고 싶어하는 잠재적인 약점을 찌르는 말에도

심하게 약하기 때문이다.

 

결혼 초엔, 효린에 대한 남모를 열등감을 노상 자극하는 발언만

그것도 엄숙하고 깊이 있는 얼굴로 해대더니,

 

효린이가 사라지자

신군의 마음을 가지고 여러가지로 단언을 하는 것으로

채경이의 불신을 살살 찔러대다가,

 

궁에서의 생활에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건

또 어떻게 캐취했는지

재빨리 방향을 선회해서

아예 이혼을 시키려고 서두르고 있다.

 

궁에서 나오기만 하면

자기 손에 뚝 떨어질 거라고 생각하는 건 좋은데,

그 전에 채경에게도 순순히 내 손에 떨어져 줄 의향이 있냐고

물어줬음 하는 소망이 있다.

채경이만 정녕 율군의 손안에 떨어지는 걸 원한다면

난들 어쩌겠는가??

채경이가 원하는대로 하도록 구경만 해야지??

그런데 채경이는 황후에게 단언한다.

 

 

'율군은 내게 그저 친구일뿐이랍니다'

'친구 이상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답니다'

'그는 내게 남자가 아니며, 난 그를 사랑하지 않으며, 그의 손안에 떨어질 생각이

추호도 없답니다'

 

이러니 내가 답답한 것이다.

 

채경이도 사람인데

율군은 채경이를 전혀 사람 취급을 안하니,

 

율군이 노상 채경에게 부르짖는

 

그 지긋지긋한 '궁안의 인형론'을

율군이 가장 자주 적용하는 인물이 바로 채경이라는 아이러니한 모순을

스스로 범하고 있음을 그는 아는가, 모르는가??

 

채경에게도 인격이 있고, 생각이 있고, 나름의 주관이 있다는 걸

인정하지 않고,

무턱 자기가 원한다는 이유로 자기 곁에 두기 위해 물불 안가리는 거야말로

상대를 인형 취급하는 게 아닐까?

 

어떻든,

 

채경이가 자신의 원격조정이 멋지게 먹혀서

뭔가에 홀린 듯

기어이 '이혼'이라는 말을 입에 담고,

 

그로 인하여

오만 인간들을 혼란과 비참과 불신과 고통의 도가니탕속으로 밀어놓고,

특히 그 중심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고 있는 인물은

바로 자기가 그토록 사랑한다는 채경이가 될 것은 뻔한데,

 

정작 율군 자신은 뽀샤시한 얼굴로 밤새도록 연구한 결과물을 가지고

황제 앞에 나타나서

대군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고 있다.

 

채경이를 웃게한다더니,

자기 때문에 그야말로 눈에서 닭똥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고,

황제에게 깨지고, 신군에게 깨지고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하기야

 

'하란다고 하냐?

어차피 니가 결정해서 니 의지로 말한거니까

니 책임도 절반이다!'

 

뭐 이런 마인드를 적용시킨다면 모조리 율군만 탓할 순 없겠다.

정말 그런 말도 안되는 짓거리를

하란다고 한 건 바로 채경이 자신이니까.

 

그래선지 율군은

채경이같이 씩씩한 아이라면,

그리고 자기에게 오려면

그 정도의 댓가는 가볍게 치뤄야한다는 듯

별로 관심도 없다.

 

거참..

 

율군의 마인드도 내겐 불가사의하기 그지 없다.

 

채경이가 단순하고 순진하고 그다지 영리한 스탈이 아니라는 걸 감안하여

어거지로 이해해줄 여지가 있다고 친다면,

 

율군은 대체 어떻게 접근해서 그의 뇌구조를 이해해줘야할지

난감하기 그지없다.

 

애초에 황실의 일원으로서

오로지 자기가 갖고 싶다는 이유로

이혼을 종용하고, 그것도 신군과 일대일로 담판을 짓게 하기보단

차라리 방송에서 말하게 하는 것부터가 교묘하지 않은가?

 

서로 좋아하는 부부가,

얼굴 맞대고 이혼 얘기를 한다고치자.

 

채경이가 진지하게 이혼을 고려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신군이 무릎 꿇고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여!

라고 외치는 긴급 사태가 발생할 위험이 있다.

 

채경이는 신군 입에서

 

'사랑'이라는 말만 나오면 맨발로 뒤도 안돌아보고

신군의 품으로 날아갈 태세를 취하고 있었으니까.

 

(하긴 막상 닥치고보니 그것도 아니었으니

대체 채경이가 원한 게 뭔지 나도 잘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아예 원천 차단을 하기 위해

방송에서 말하게 하는 그 교묘함과 천재적인(?) 계획에 일단 감탄은 보낸다.

 

그런 짓을 하면

신군이 절대로 용서하지 않을 거라는 것에 배팅을 해볼만 하다.

 

거만하고 자존심 강한 신군이,

만인 앞에서 그런 소릴 들으면 가만 있겠는가?

 

적어도 율군이 아는 신군이라면 가만히 있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다.

율군이 알고 있다고 믿는 그 잘못된 신군에 대한 자신의 밑그림에 근거한다면 그렇다.

(하지만 애초에 토대가 잘못 되었으니 그게 문제다.

신군은 율군이 생각하는 그런 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율군은 잘 모르는 것을 아는 체하지 말아줬음 하는 소망이 있다)

 

 

게다가,

채경이가 못마땅해 죽을 지경인 황후가 또 가만 있겠는가?

 

사방에서 채경이를 달달 볶아댈 것이니,

견디지 못해

채경이가 맨발로 궁에서 도망칠 거라고 기대한걸까?

 

(그러나 역시 율군이 모르는 게 있었다. 황후는 그가 아는 것이 전부인

여자는 또한 아니었던 것이다.)

 

계획은 교묘하지만, 인간들에 대한 통찰력이 심히 부족하고

자신의 독선에 눈이 멀어서 진실을 제대로 볼 힘이 없으니

딱하게 생각하려고 했는데,

그러기엔

이후의 그는 참 뻔뻔스럽다.

 

채경이가 당하고 있는 갖가지 곤욕엔 전혀 관심이 없으니 말이다.

 

뽀샤시한 모습으로 알찬 계획을 밤새 작성하여

황제 앞에 들고 나타나서

황태자를 제끼는 솜씨는 가히 일품이다.

 

그게 황실을 위한 대군의 임무를 다하는 것 뿐이라는

겸손까지 발휘한다.

 

율군의 대군으로서의 임무를 다하는 것이

난 좀 겁난다.

 

대군으로서의 임무 중에,

황태자부부 이혼시키기 프로젝트가 들어있어서 말이다.

옵션으로, 채경이 물먹이기와, 황실에 먹칠하기까지 포함되어 있으니 말이다.

 

그가 김내관인지 이내관인지 하는 자의 말대로,

눈물젖은 밤을 사랑하는 여자가 보내는 동안,

자기는 화사한 얼굴로 한국 문화재에 대한 그의 깊은 조예를 개발하기 위해

밤샘을 한 것이

대군으로서의 임무라고 말할 수 있는 율군의 또다른 3차원적인 정신 세계가

난 정말 감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