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천년지애-공주, 박물관에 전시되다 본문
천년지애는
드라마는 그저 그랬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흐를수록 가슴에 스며드는 아련한 슬픔을
느끼게 한다.
그건 드라마가 좋아서라기보다
'백제공주' 때문이다.
묘한 일이지만,
성유리의 서툰 연기가, 난데없이 21세기라는 천박한 시대의 한복판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진 백제 공주의.
현세에 적응하지 못하고 어리버리하면서도 자긍심만은 잃지 않아
어쩐지 앞뒤가 안맞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그녀가 느끼고 있을 황당함에 꽤나 도움이 되어
일종의 상승작용을 일으키며, 여주를 돋보이게 한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그러나 바로 그 성유리라는 섬세하고 가느다란 선을 가진
신선한 프로필이 그 공주가 정말 이 공주라는 착각을 일으키게도 한다.
드라마를 보다보면 어떤 음악에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만큼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주구장창 틀어대서 아주 세뇌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좋은 음악이라면 드라마와는 무관하게
좋은 노래 하나 건지는 셈이니 나쁠 건 없다.
천년지애도 음악의 홍수를 이루어
뮤직 비디오가 아닌가 싶을 정도이지만,
그 중 이 노래가 가장 귀에 꽂혔다.
그래서 이후로 '내음악 '의 블랙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그런데 이 노래를 듣고 있자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아마, 그 장면 때문에
그나마 내가 천년지애에서 아픔을 느꼈던 것 같다.
660년대를 살던 어린 처녀가
눈이 핑핑 도는
이 현란하고 너절한 21세기의 대도시에
맨몸으로 내던져졌으니
제아무리 대찬 공주일지나
어딘가에 숨고 싶어질 것이다.
그래서
두 남자 사이를 방황한다.
한 남자는 자기가 사랑했던 사람이었으니
그에게선 정서적인 안정을
그리고
자기에게 무턱 대쉬하던 왕년의 웬수인
또다른 남자에게선
그가 제공하는 무상의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각각 취한다.
하지만,
사랑도, 최첨단 물질 문명의 향유도
실은 공주의 빈가슴을 채워주지 못한다.
그런 것들도 자기가 숨쉴 수 있는 환경에서만 의미가 있는지도 모른다.
아지 못할 공간에 홀로 내던져진 공주에게
사랑이나 물질적 풍요로움만으로
절대고독이 채워질 리가 없다.
자신이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자기 자신의 정체성이 스스로에게만이 아니라
타인들에게까지 인정받을 때
사랑도 물질도 가치가 있는 거 아니겠는가??
그들은
공주를 사랑하지만 그들이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은 그저
그녀를 자기 옆에 묶어 두는 것이다.
그녀를 원하는 제3의 남자가 있다.
그는 조폭이다.
그래서 단순하고 무식하게 그녀를 원한다.
그도 역시 그녀가 자신의 영역을 벗어나는 걸 참지 못한다.
그렇듯 모두가 공주에게 집착하고 소유욕을 느끼지만
그녀가 뭘 원하는지.
그녀가 어떤 결핍을 느끼는가엔
세 남자 모두가 관심이 없다.
아니 어쩌면,
알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을 파고 들게 되면 공주를 잃어버릴지도 모르기에
외면하려한다.
그래서 공주는 자신을 사랑하는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음에도 늘 쓸쓸하고 불안하고 슬프다.
공주가 가장 슬픈 것은
자신이 속해 있던 세계마저
현세에선 부정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디.
분명히 실재했던 그 세계가 부정당하고 있음은
자기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그녀는 바로 그 세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몸이 현세에 내동댕이쳐졌을망정,
그녀는 백제 공주의 정신을 잃지 않는다.
그것마저 놓아버린다면
그녀는 정말 갈 곳이 없다.
'너희들에겐 천년 전의 일이겠지만,
내겐 한달 전의 일이었다'
라고 그녀는 외친다.
물론 아무도,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외치는 사람도 그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긴, 당연한 일이겠지만.
내가 가장 가슴 아팠던 부분이
결국 그녀가 바로 그 나이트클럽의 이름모를 꽃이 되기로
스스로 결심할 때이다.
공주는 21세기의 한국이라는 거대한 괴물과
더이상 싸우는 것에 한계를 느끼고
나름 순응해보려한다.
그녀는
백제라는 나라가 역사 속에서
전혀 인정받지 못한 패배자가 되어, 몇줄의 기록으로
그것도 승리자에 의해 왜곡된 기록으로만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에
좌절해버리는 것이다.
백제가 그렇게 역사 속에 빈약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면,
자신이 그곳의 공주라는 것이
현세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녀의 갸륵할 정도의 백제에 대한 자긍심과, 공주라는 자존심도
백제를 부정하는 21세기에선 오히려 초라하게 여겨진다.
그녀는 백제의 몇몇 유물이 박물관에 버려진 듯
진열되는 걸로,
그 찬란했던 문화가 박제되어버렸듯,
자신도 그 박물관의 빛바랜 유물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제 21세기의 오도가도 할 곳이 없는
젊고 나약한 존재로서 환경에 순응하며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으로
그녀는 나이트클럽의 꽃이 되기로 결심하는 것이다.
그녀를 찾아오는 이른바 그녀를 사랑한다는 작자들,
그들은 하나같이 격분하고 발을 구르지만,
그러나 그들의 분노에 그녀는 동참할 수가 없다.
유리상자 안에 갇혀서
그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고,
그들 또한 그 유리상자로 인해
자신의 실체를 확실하게 들여다볼 수 없는 것 같은
거리를 슬프게 재면서
그녀는 이윽고 천천히 무대로 걸어나온다.
그리고 유리문을 열고 들어간다.
그녀는,
박물관에 진열된 백제의 유물을 보고 슬퍼하지만,
결국 스스로 전시물이 되길 원한다.
마치 그렇게 유리상자 안에서
정체되어 잊혀져가는 백제와 운명을 함께 하겠다는 듯.
난 이상하게 그 모습이 잊혀지지가 않는다.
그것은 내겐 천년지애에서 최고의 명장면이 된다.
그리고 그때마다
이 노래가 생각난다.
스스로 전시물이 되려는 공주의
외로움과, 절망감은
그러나 단지 현세에 무릎을 꿇는 것만은 아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 힘으로 새로운 세계에 적응해보려는 시도이며,
그것이야말로
내겐 진정한 자존심으로 보이는 것이다.
백제 공주의 자존심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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