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영어 선생을 난 싫어했다.
난 중2때까지 그 선생에게 수업을 받은 적이 없었다.
그는 마르고 키가 작고 얼굴은 작은 것에 비해선 지나치게 큰 코와 커다란 눈 예민하고 섬세하게 보이지만
뭔지 모르게 거부감을 주는 까칠한 외모와 신경질적인 느낌을 주는 사람이었기에
난 가끔 수업에 들어가기 위해 복도를 걸어가는 모습을 창문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그에게 거부감을 느꼈다.
중3이 되자 그는 비로소 우리 영어 수업을 맡았다.
그런데
어느날 난 갑자기 그를 사랑(?)하게 되었다.
이유는 생각이 안난다.
어떤 계기로 그렇게 된 거지?
그를 사랑하게 된 이후에
얼마 동안은 그의 외모가 주는
야릇한 혐오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신경에 거슬리는 뭔가가,
지나칠 정도로 예민하고 신경질적이고 섬세한 그 얼굴이
맘에 들지 않았음에도 어떻든 난 그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흔히들 여중 혹은 여고 시절에 겪는 선생님에 대한 열병을 난 그 영어 선생으로 인해 처음 겪었다.
그리고 그게 처음이지 마지막이었다.
그런 걸 첫사랑이라고 할 순 없겠다.
그건 그저 사춘기 소녀의 열병같은 호기심과 내면에서 꿈틀대는 정열의 발산의 대상일 뿐이다.
사랑하게 되자 당연히 내 눈엔 콩깍지가 씌웠고
그때까지 날 불쾌하게 하던 그의 독특한 개성들이 이젠 더없이 매력적으로 보였다.
내가 가장 열심히 학교 생활을 하고 열심히 학교에 달려가고 학교에 있는 것이 그저 행복했던 시절이 바로 중3이었을 것이다.
난 그를 무조건 사모하고 연모하고 보고 싶어하고
그래서 새벽에 학교로 달려가고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서 서성댔지만
단한번도 그와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참 우습게도 난 그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는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눈치챈 듯 했다
약간의 관심도 보여주었다.
그리고 섬세한 성격에 어울리게 의도적으로 날 피하고 내겐 무리한 질문을 하거나 무안을 주지 않았다.
그가 어떻게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걸 알았는지 모르겠다.
그는 인기투표에서 늘 일위를 하고 있었으니 그를 좋아하는 학생들은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왜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일까?
확실한 건 그는 내 감정을 존중하면서 동시에 자신도 내 앞에선 뭔지 쑥스러워하면서
나와 정면으로 마주치는 건 피했다는 사실이다.
사춘기 소녀의 뜨거운 눈빛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난 끈적거리는 성격이 아니므로 늘 그에겐 거리를 두고 대했고 한번도 그에게 접근하거나 그의 주변을 맴돌지 않았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 영어 수업시간을 기다리고
막상 수업시간이 되면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채로 한 시간을 몽롱하게 보내고
그렇게 하루하루가 더없이 행복하고 그득했을 뿐이다.
지금도 얼굴이 붉어지는 사건은
어느날 아침
그의 책상에 꽃을 놓아주고 싶다는 일념에
커다란 노란 국화를 잔뜩 사서 선생들이 출근하기 전에 그의 책상 위에 서툰 솜씨로 꽃아두었던 날이다.
난 그가 누가 그랬는지 알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난 꿈에도 내가 그랬다는 걸 그에게 알릴 마음이 없었다.
그런데..
아...
난 너무 많은 꽃을 샀고 그 바람에 몇 송이가 남았길래 그것을 가방에 넣어두었던 것이다. 가방 위로 커다란 노란 국화들이 삐죽이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아.. 난 대체 왜 애기 머리통만한 국화를 택했을까?
그리고 왜 남은 걸 버리지 않았을까...
그날 영어 시간에
그는 내 곁을 지나치다가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내 가방 위로 삐죽 튀어나온 꽃을 본 것이다.
난 그가 턱을 어루만지며 잠시 내 자리에서 머뭇거리다가 생각에 잠겨 돌아서는 걸 보았고
그 자리에서 죽어버리고 싶었다.
당시
선생들은 대개가 동창생들이었다.
물론
젊은 선생들에 한해서지만..
막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교편을 잡은 그들은
사석에선 격의 없는 동기동창이었던 것이다.
그 중에서
한 여선생이 있었다.
그녀는 이미 결혼해 있었다.
그리고
임신중이었다.
이쁘지 않았고,
작고 뚱뚱하고
못났다.
그러나
굉장히 똑똑하고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느낌을 주는
당찬 여자였다.
그녀는 가끔 영어 선생과 함께 웃으면서
복도를 천천히 걸어
수업하러 가곤 했다.
어느날
학교에서 발간한 잡지에
영어 선생의 글이 실렸다.
그 글은
한 여자에 대한 절절한 사랑이
묻어나는
그러나
쓸쓸하고 감성적이지만
초연한 글이었다.
은연 중에 학교엔
소문이 퍼졌다.
즉,
그 여선생을
영어 선생이 사랑했는데,
정작 그 여선생은
다른 남자와 결혼해버렸다나 뭐라나..
그 얘기를 듣고
난 그 여선생을 유심히 뜯어보았는데,
어쩌면 그럴수도 잇겠다 싶었다.
못나고 직설적이고
냉정했지만
매력 있었고
똑똑하다는 느낌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소문은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영어 선생의 우수에 찬 모습에
더욱 더 신비로운 무지개를 드리우게 했을 뿐이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드디어 졸업 시즌이 왔다.
난 졸업할 때까지 그와 단 한번도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다.
아마 우린 둘다 자존심 강하고 자의식 강하며 동시에 순수한 사람들이었던 것 같다.
그는 그러나 내성적이고 말없는 소녀의
자신에 대한 연모를 싫어하진 않았고, 그 마음을 존중해주기까지 했음을
난 알고 있다.
난 그걸로 만족한다.
졸업하는 건 내겐 죽음처럼 고통스러운 일이었고
그렇게 행복했던 중학교 시절은 이어지는 고등학교 시절을 더더욱 견디기 힘들게 만들었던 것 같다.
발랄하고 자유로운 분위기와 젊고 매력있는 서울 사대 출신 선생들과 학생들의 격의 없는 친밀함에 익숙햇던 난
우리나라 4대 명문이라는 매우 보수적인 여고에 진학하게 됨으로써
내 인생에 아주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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