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혜빈의 경우도 처음엔 별로 다르지 않았다. 혜빈은 그를 연모하는 여인네 중 한 명일 뿐이었고 볌수는 그녀를 이쁘고 괜찮은 후배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헤빈이 어느날 마침내 범수의 선택을 받아서 그의 연인이 된다.




하지만 오지라퍼 신범수의 애인 노릇은 그다지 평탄치 않을 것 같다.

여자 입장에서 볼 때 그의 내면엔 너무나 많은 세계가 뒤섞여 있고 여자는 그 세게 중의 한 영역의 구성 요소일 뿐이며 그는 사랑하는 여자일망정 그 세계와 명확하게 구분지어서 그 세계에 그 여자를 들여놓을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는다. 그 세계를 살짝 살짝 구경시키고 설명해주긴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여자를 매혹시킴과 동시에 감질나게 하는 일일까? 대개의 여자라면 당연히 그의 내부에 있는 그 모든 세계를 고스란히 공유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힐 것이고 그것이 능력이 부칠 때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고 그의 애인이 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의 애인 노릇을 하면서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범수처럼 자기 세계가 따로 있어서 그만 쳐다보지 않을 수 있고 자기 가치관이 뚜렷해서 나름대로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여장부 같은 타입이던가 아니면 범수의 애인이라는 이름에 만족해서 그의 악세사리나 인형 혹은 아름다운 꽃 노릇만으로 만족하던가 둘 중 하나여야 한다.
혜빈의 딜렘마는 자기 세계를 가진 여장부는 애초에 기질적으로 될 수 없고 그렇다고 꽃으로 만족할 수도 없다는 것에 있었다.
또 한편으론 만일 혜빈이 범수와 동등한 지적 능력을 지닌 여장부라면 애초에 범수의 선택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볌수는 그런 여자에겐 절대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 묘한 이율배반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그가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타입은 그의 보호본능을 불러 일으키며 그가 돌봐줄 수 있으며 부족한 것이 많아서 그 여백을 그가 채워줄 수 있고 무엇보다 여성적인 가련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그런 묘한 심리적인 캡을 범수는 인식을 못하지만 혜빈은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범수를 사랑하면서도 그의 사랑이 관념적이고 둘의 관계가 겉돌고 있으며 그의 실체는 자기와 동떨어진 세계를 떠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후에 결국은 파탄이 일어나고 혜빈은 내가 예상한 대로 범수의 애인 역할을 하는 내내 나름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은 결별을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갈등보단 사랑이 더 강해서 대충 덮고 지내는 바람에 속에서 나름대로 무르익고 있던 내재된 문제점을 끄집어내어 그들의 갈등과 파탄의 게기를 만들어주는 이지민이란 여자가 난 인상 깊다. 그 여자가 인상 깊다기보다 그 여자는 신범수가 죽어도 여자로 사랑할 수 없는 자기와 동등한 눈높이를 가진 여지의 대표주자이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이다.
이지민은 신범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피해서 학교마저 떠난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적어도 학교를 떠난 이유 중엔 그것도 상당히 작용한 듯 하다. 그녀는 예리한 두뇌와 직감으로 범수가 절대로 자기를 여자로 볼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아차렸던 것 같다.
이지민은 혜빈과 달리 굉장히 지적인 여자이다. 성깔도 대단하고 판단력도 정확하며 자주적이고 긍지도 높다. 게다가 우수한 두뇌를 지녔다. 그래서 범수와는 막상막하의 적수로 대화가 가능한 여자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는 정녕 자기와 대화가 가능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사회와 철학,시, 세게관 그리고 정치적인 토론이 가능한 이지민 같은 여자에겐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친구로선 인정하고 편하게 느끼지만 그게 전부이다.



사실 혜빈보단 이지민 같은 여자가 범수에겐 훨씬 잘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혜빈과 나누는 대화의 치졸함이나 유치함을 보라~! 혜빈과 함께 있을 때의 범수의 갖가지 언행을 보라~!
그는 자기 속에 있는 가장 유아틱한 모습으로 혜빈을 대하는 것으로 진지함이 결여된 모습을 보이거나 아니면 날잡아서 선생님 같은 장황한 강좌를 헤빈에게 들려주는 것으로 혜빈의 열등감을 조장하면서도 그걸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그저 그녀가 이뻐 죽겠고 어두운 밤 그녀의 집앞까지 데려다 줄 때마다 남자로서의 설레는 욕망을 살짝 드러내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해서 그 이상은 바라는 것이 없다.
즉 범수는 스스로의 충족감에 취해서 혜빈이 뭘 생각하고 뭘 느끼며 뭐에 결핍을 느끼는지는 정작 무심하다. 그런데 그것은 범수라는 인간이 어떤 종류의 것이건 결핍증을 가져보지 못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가 가지는 한계일 뿐이다.



모성애나 누이 같은 깊은 이해와 사랑을 주는 진선이라는 존재가 있고 이지민처럼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비범한 친구들이 있으며 스스로 심취해서 만족스럽게 향유할 수 있는 자기 만의 세계가 내부에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는 범수에게 여자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달리 없다.




앞서 이지민의 이야기를 했지만
같은 여자로써 이지민과 함께 있을 때의 범수의 태도는 내가 헤빈이라도 모욕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세 사람이 함께 술자리를 벌였는데 두 사람만의 관심사를 놓고 피터지게 논쟁을 벌이는 바람에 한 사람은 그 논쟁의 구경꾼 노릇이나 하며 주구장창 지루하게 앉아 있어야하는 상황이 번번히 연출되는 것이다.
그것도 혜빈으로선 도저히 끼어들 수 없는 오랜 친구이자 논쟁 상대로 서로에게 익숙할대로 익숙해진 호흡을 가진 두 사람이다. 게다가 그 논쟁의 내용이라니.. 혜빈에겐 외계어처럼 들리기 안성맞춤인 핵문제를 둘러싼 세계적 정치 역학에 관한 논쟁이란 말이다.


그때 범수는 아예 혜빈에게 등을 돌려댄 채로 지민과 코를 맞대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혜빈의 존재는 완전히 까먹고 있었음이 틀림 없다.
명색이 애인인 혜빈은 처참한 소외감을 느끼는 채로 한 구석에 초라한 몰골로 오두카니 앉아 있어야함에도 그들 잘난 두 사람은 그녀를 완전히 왕따시키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도무지가 기본이 안된 사람들 아닌가~!!)
내가 혜빈이었다면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가던가
그딴 대화는 니들 둘이 있을 때 하라고 승질을 부렸을 것이다.


이지민의 경우엔 그렇게 눈치없이 굴다가 엄청난 후유증이 발생하여 결별까지 선언당하고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야 했지만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수는 자기가 혜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끝까지 모르는 눈치..하긴 나도 왜 혜빈이 결별을 선언했는지 이해 안감)
그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는데 동아리 후배 장재란과의 삼각 데이트 사건이다.
이번엔 세계 정치 역학과 제국주의 운운이 아니라 바둑과 당구라는 범수가 지극히 즐기는 잡기들이 등장하는데
내심 호시탐탐 범수를 노리고 있는 장재란은 범수의 상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당구나 바둑엔 일가견이 있는 실력의 소유자이다.
이번엔 지적인 세계의 공유가 아니라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자신을 흠모하는 여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둔해 빠진 범수는 역시나 재란의 시꺼먼 속내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

이때도 역시 당연한 일이지만 혜빈은 그들의 세계에서 소외된다. (답답한 혜빈...꽃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대체 노력하는 자세가 없다)
조훈현이 어쩌고 일본 기성이 어쩌고 4인방이 어쩌고하며 신나서 두 사람이 침 튀기며 나누는 대화에 한 마디 끼어들지도 못하고 한 구석에 쑤셔박혀 있어야하는 것이다. 그때도 역시 범수는 혜빈의 존재는 아랑곳 없이 장재란을 향해 앉아 있었고 두 사람은 죽이 맞아 점입가경을 이룬다.
그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더이상 혜빈이 그로 인해 상처 받고 울고불고 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이지민과 연출했던 그런 장면들로 인해 결별 선언까지 당하고 일상생활이 마비되다시피 괴로와했던 범수는 달라진 것이 없다.
그는 대체 혜빈을 왜 좋아하는 것일까? 이쁘고 귀여워서?
하여튼 난 그들의 연애엔 별 공감이 안갔다.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나눌 수 있는 대화도 한정되어 있으며 공유할 수 있는 세계도 없다.
그는 어째서 대화가 가능하고 취미 생활을 함께 할 수 있는 상대에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 설사 그렇다해도 그런 상대와 어울릴 땐 번번히 애인을 왕따시키는 태도는 또 뭐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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