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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은 사랑 (2) ─신범수의 사랑 ─ 본문

이병헌/그의작품들

내일은 사랑 (2) ─신범수의 사랑 ─

모놀로그 2010. 6. 6. 16:03




신범수는
두 번에 걸쳐서 사랑에 빠진다.

첫번째 연애는
14회 정도에서 파탄이 나고 마는데
내막적으론
연기자의 중도하차라고 들었지만
극의 전개 내용으로 보자면 그게 오히려
자연스러운 게 아닌가 싶어서
만일 중도하차라면 차라리
잘했다고 칭찬해주고 싶다.

현경에 대한 범수의 집착은
사랑이라기보단
그녀를 통해 자신의 자부심을 확인받고자하는
약간은 치기 어린 강렬한 소유욕처럼 내겐 보인다.
그녀의 실체가 쉽게 그의 손에 잡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경은 범수의 그런 심리를 먼저 간파하고
그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그를 안달복달하게 만든다.

적어도 그 이후의 신범수라는 인물을 보면
한 여자로 인해
그렇게까지 마음 조아린다는 건
그의 사전엔 없는 일이었다.

그는 첫눈에 그녀에게 반하고
이어서 대다수의 남자들처럼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
신범수식의 엉뚱한 이벤트들을 벌이지만
현경에겐 통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현경은 당시의 범수보단 한 수 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녀에겐 다른 여자에게 통했을지도 모를
범수식의 구애 방법이 먹히지 않았고
돌아온 것은 비웃음과 경멸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치기 어린 멋진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것이나
저돌적이고 남자다운 척 하는 접근 방법이 아니라
보다 깊이 있는 진정성이었다.

뒤늦게야 그걸 깨달은 범수는 그녀에게 한방 먹고
손을 들려하지만
뜻밖에도 바로 그 순간에 그녀는 범수를 받아들임으로써
범수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된다.
당연히 범수는 그녀를 애지중지할 수 밖에 없고
그녀에게 집착할 수 밖에 없다.

후에
그의 여자가 되고 싶어 안달난 여자들이 줄을 서는 걸 보면
초반의 그의 컨셉은 좀 달랐던게 아닌가 싶다.

그녀는 그늘진 듯하면서
당차고
말수 적고 지적이면서도
여성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다.
무엇보다 눈부시게 아름답다.
그 아름다움은 고고하고 오만하며 신비롭다.
그런 점에서
신범수에겐 정말이지 만만치 않은 강적이었다.


그녀에 대한 범수의 기본 마인드는
불안이다.
그녀를 잃을까봐 늘 초조해하고
그녀와 정신적 교감 내지 일체감을 가지고 싶어 몸부림친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아
범수로 하여금 좌불안석하게 만든다.

결국 그녀는 범수를 버리고 떠나버림으로써
범수 생애 최초로 패배감과 좌절감을 안겨주는 것으로
그들의 관계는 끝나버린다.



첫사랑에 실패함으로써
대학 2년차을 막 마무리하던 무렵의
매사에 자신만만하고 치기 어린 행동이
특별하긴 커녕 유치하게 보이기까지 하던
신범수가
실연 이후에
보다 성숙해질 수 있는 빌미가 되어 주었고

겉보기엔
여전히 밝기만 한 그에게 알게 모르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로 인해
그가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게 되는데도 일조를 했기 때문이다.
그 사랑의 상처는
그에게 보다 깊이를 주며
훗날 하게 되는 두번 째 사랑도 어쩌면 그 사랑의 여파가
미치지 않았다고 확언할 수 없다.

그래서 극의 완성도나
두번 째 사랑의 타당성에 기여한 바로 본다면
첫사랑의 실패는
오히려 바람직한 일었다고 보는 바이다.














후에 헤빈의 대사로 나오는
"그는 관념적으로가 아니라 실제로도 내게 멀리 있는 듯 하다.."
라는 범수에 관한 그녀의 기본적 마인드와 그로 인한 불안과
따라서 시시때때로 엄습하는 질투의 모습이
실은
현경을 대하는 범수의 마음이었다.

물론 범수는 자신의 그런 불안을
나름대로 다스리려고 기를 쓰고
자신과 현경의 불안정한 관게를
인정하기보단
자기 스스로 설정해놓은
두 사람의 관계로 도피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 점에서 초반의 범수는 헌성 못지 않은 허풍과
억지스런 자신감으로 자신의 의식을 불투명하게 막아버린 인물로도 보인다.
한 마디로
범수는 쉽게 마음을 열지 않고 실체가 손에 잡히지 않는
현경이를
그야말로 열병을 앓듯
열렬하게 사랑하는데
그 이면엔 신범수식의 강렬한 소유욕과 자부심이 도사리고 있다.








첫사랑 현경과는 달리
두번째 여자 헤빈의 경우엔
첫눈에 반하는 케이스는 아니다.

대학 캠퍼스에서
미리의 후배라는 이유로 안면을 익히고
성일에 관련된 오해로 관련을 맺게 되며
틈틈이 마주치다보니
차츰 차츰 낯을 익히고
그래서 교정에서 마주치면 인사 정도는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되어가는 등

두 사람의 관계는 긴 시간을 두고
아주 서서히 가까와지는 형식을 취한다.

범수는 어느 정도 상대와 익숙해지자
다른 사람에게 그러듯
농담도 하고 장난도 치고 친절도 베풀지만
그 이상의 관심은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여자로서의 매력도 쉽사리 느끼지 못한다.
아니 의식에 그 여자가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그녀는 그저
그의 말대로 이쁘고 괜찮은 후배일 뿐이다.
성숙하고 알 수 없는 그늘이 드리워진 신비스운 여인이었던
현경에 비하면
혜빈은 그에겐 어린애처럼  보였을수도 있다.

또한
그의 마음이
첫사랑의 상실감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했음과 동시에
그로 인해
여자나 사랑에 대해선 의식 자체가 닫혀 있음을 보여준다.
설사 그의 마음에 뭔가가 들어와도
그걸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당시의 그에겐 쉽지 않은 일이었던 것이다.






그는 현경이 떠난 후에도
여전히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며 인간 관계도 잘 유지할 뿐 아니라
명랑하고 유쾌하게 대학 생활에 충실하지만
그의  내면 깊숙히엔
그의 말대로 최초의
좌절이 준 어둠이 드리워졌고
그걸 알아본 사람이
두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그를 사랑하는 진선과
바로 두번 째 여자인 혜빈이다.

진선이 그걸 알아본 것은 그렇다치고
혜빈의 경우엔
아마도 자기도 좌절감을 느껴본 적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그 좌절감을 극복하기 위해서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하는 과정에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우연인지 운명인지
범수의 어두운 모습,
혼자 있을 때만 내보이는 우수에 찬 모습을
두어 번 혜빈에게 들킨다.
물론 범수는 모르게..

헤빈이 범수에게 마음이 끌리기 시작하는 계기는
언제나 명랑하고 반듯하면서도 장난꾸러기에
독특하고 재미 있는 말솜씨로 주변을
즐겁게 해주는
구김살 없는 청년처럼 보이는 범수의
또다른 얼굴을 남몰래 훔쳐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혜빈 쪽에서 먼저 범수에게 관심에 이어 호감
그리고 그것이 알지 못하게 설레이는 감정으로
차츰 변해가면서 시작된다.
헤빈 역시 첫눈에 반하진 않지만
먼저 볌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은 헤빈 쪽이다.


말하자면
첫눈에 반해서 몸달아 쫓아다니다가 어이 없이
하루 아침에 상실해버린 첫사랑과 다르게
혜빈에 대한 그의 사랑은
알게 모르게 세월과 사건과 더불어 그에게 서서히 스며드는
형식을 취한다.



더더우기
첫사랑에서 끝내 그가 받지 못한
차분하고도 믿음성가는 여자의 사랑을
비로소 헤빈에게서 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범수는 헤빈에게 일종의 중독 증세를 보이고
그녀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생활 자체가 마비되버리는데

그것은
첫사랑 현경이 떠났을 때의
비교적 강한 체 하면서 극복하려고 노력하던 모습과
친구들 앞에선 절대로 자기의 아픔을 보이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던 모습과 상당히 다르다.










그럼 여기서
신범수의 독특한 여성관을 들여다보자~!

현경의 경우를 제외하면
범수는
그를 사모하는 많은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지만 명분상으로의 그들과의 관계는
흉허물 없고 절친한
친구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그 여자들은 내심으론
그가 자신을 여자로 봐주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가 그들을 여자로 볼 확률은
낙타가 바늘구멍 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희박하다못해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왜냐면 그는 꿈에도 그럴 생각이 없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자길 실은 남자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인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설사 인지하게 된다해도 그는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다.





혜빈의 경우도 처음엔 별로 다르지 않았다.
혜빈은 그를 연모하는 여인네 중 한 명일 뿐이었고
볌수는 그녀를 이쁘고 괜찮은 후배 정도로만 여기고 있었을 뿐이다.
그런 헤빈이 어느날
마침내 범수의 선택을 받아서
그의 연인이 된다.















하지만 오지라퍼 신범수의 애인 노릇은
그다지 평탄치 않을 것 같다.









여자 입장에서 볼 때
그의 내면엔 너무나 많은 세계가 뒤섞여 있고
여자는 그 세게 중의 한 영역의 구성 요소일 뿐이며
그는 사랑하는 여자일망정
그 세계와 명확하게 구분지어서
그 세계에 그 여자를 들여놓을 생각 같은 건 하지도 않는다.
그 세계를 살짝 살짝 구경시키고
설명해주긴 하지만 그것은 얼마나 여자를 매혹시킴과 동시에
감질나게 하는 일일까?
대개의 여자라면 당연히 그의 내부에 있는 그 모든 세계를
고스란히 공유하고자 하는 열망에 사로잡힐 것이고
그것이 능력이 부칠 때 좌절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를 사랑하는 것은
그리고 그의 애인이 되는 것은
참으로 고통스러운 일이 될 것이다.






그의 애인 노릇을 하면서 고통스럽지 않으려면
범수처럼 자기 세계가 따로 있어서
그만 쳐다보지 않을 수 있고
자기 가치관이 뚜렷해서 나름대로 세상과 맞설 수 있는
여장부 같은 타입이던가
아니면 범수의 애인이라는 이름에 만족해서
그의 악세사리나 인형 혹은 아름다운 꽃 노릇만으로
만족하던가 둘 중 하나여야 한다.




혜빈의 딜렘마는
자기 세계를 가진 여장부는 애초에 기질적으로 될 수 없고
그렇다고 꽃으로 만족할 수도 없다는 것에 있었다.

또 한편으론 만일 혜빈이
범수와 동등한 지적 능력을 지닌 여장부라면
애초에 범수의 선택에서 제외되었을 것이다.


볌수는 그런 여자에겐 절대로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여기에 묘한 이율배반적 요소가 있는 것이다.
그가 여자로서의 매력을 느낄 수 있는 타입은
그의 보호본능을 불러 일으키며
그가 돌봐줄 수 있으며
부족한 것이 많아서 그 여백을 그가 채워줄 수 있고
무엇보다 여성적인 가련함과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그런 묘한 심리적인 캡을
범수는 인식을 못하지만
혜빈은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그래서 범수를 사랑하면서도
그의 사랑이 관념적이고 둘의 관계가 겉돌고 있으며
그의 실체는 자기와 동떨어진 세계를 떠돌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후에 결국은 파탄이 일어나고
혜빈은 내가 예상한 대로
범수의 애인 역할을 하는 내내 나름
고통스러워하다가 결국은 결별을 선언하게 되는 것이다.





갈등보단 사랑이 더 강해서
대충 덮고 지내는 바람에 속에서 나름대로 무르익고 있던
내재된 문제점을 끄집어내어
그들의 갈등과 파탄의 게기를 만들어주는
이지민이란 여자가  난 인상 깊다.
그 여자가 인상 깊다기보다
그 여자는 신범수가 죽어도 여자로 사랑할 수 없는
자기와 동등한 눈높이를 가진 여지의 대표주자이기 때문에 흥미로운 것이다.


이지민은 신범수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를 피해서
학교마저 떠난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적어도 학교를 떠난 이유 중엔
그것도 상당히 작용한 듯 하다.
그녀는 예리한 두뇌와 직감으로
범수가 절대로 자기를 여자로 볼 수 없을 거라는 걸
알아차렸던 것 같다.

이지민은 혜빈과 달리
굉장히 지적인 여자이다.
성깔도 대단하고 판단력도 정확하며
자주적이고 긍지도 높다.
게다가
우수한 두뇌를 지녔다.
그래서 범수와는 막상막하의 적수로
대화가 가능한 여자이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그는
정녕 자기와 대화가 가능하고
동등한 입장에서
사회와 철학,시, 세게관
그리고 정치적인 토론이 가능한
이지민 같은 여자에겐
성적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친구로선 인정하고 편하게 느끼지만
그게 전부이다.








사실 혜빈보단
이지민 같은 여자가 범수에겐 훨씬 잘 어울림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혜빈과 나누는 대화의 치졸함이나 유치함을 보라~!
혜빈과 함께 있을 때의 범수의 갖가지 언행을 보라~!

그는 자기 속에 있는 가장 유아틱한 모습으로 혜빈을 대하는 것으로
진지함이 결여된 모습을 보이거나
아니면 날잡아서
선생님 같은 장황한 강좌를 헤빈에게 들려주는 것으로
혜빈의 열등감을 조장하면서도
그걸 전혀 알아차리지도 못한다.

그저 그녀가 이뻐 죽겠고
어두운 밤 그녀의 집앞까지 데려다 줄 때마다
남자로서의 설레는 욕망을 살짝 드러내는 것만으로
충분히 만족해서 그 이상은 바라는 것이 없다.

즉 범수는
스스로의  충족감에 취해서
혜빈이 뭘 생각하고 뭘 느끼며 뭐에 결핍을 느끼는지는
정작 무심하다.
그런데
그것은 범수라는 인간이
어떤 종류의 것이건 결핍증을 가져보지 못한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이 그가 가지는 한계일 뿐이다.










모성애나 누이 같은 깊은 이해와 사랑을 주는
진선이라는 존재가 있고
이지민처럼 지적인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비범한 친구들이 있으며
스스로 심취해서 만족스럽게 향유할 수 있는
자기 만의 세계가 내부에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는 범수에게
여자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달리 없다.














앞서
이지민의 이야기를 했지만

같은 여자로써
이지민과 함께 있을 때의
범수의 태도는
내가 헤빈이라도 모욕감을 느끼기에 충분했다고 본다.

세 사람이 함께 술자리를 벌였는데
두 사람만의 관심사를 놓고 피터지게 논쟁을 벌이는 바람에
 한 사람은 그 논쟁의 구경꾼 노릇이나 하며 주구장창
지루하게 앉아 있어야하는 상황이 번번히 연출되는 것이다.

그것도 혜빈으로선 도저히 끼어들 수 없는
오랜 친구이자 논쟁 상대로 서로에게 익숙할대로 익숙해진 호흡을
가진 두 사람이다.
게다가 그 논쟁의 내용이라니..
혜빈에겐 외계어처럼 들리기 안성맞춤인
핵문제를 둘러싼 세계적 정치 역학에 관한 논쟁이란 말이다.








그때 범수는 아예 혜빈에게 등을 돌려댄 채로
지민과 코를 맞대고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아마 혜빈의 존재는 완전히 까먹고 있었음이 틀림 없다.

명색이 애인인 혜빈은 처참한 소외감을 느끼는 채로
한 구석에 초라한 몰골로 오두카니 앉아 있어야함에도
그들 잘난 두 사람은
그녀를 완전히 왕따시키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도무지가 기본이 안된 사람들 아닌가~!!)

내가 혜빈이었다면
그 자리를 박차고 뛰쳐 나가던가

그딴 대화는 니들 둘이 있을 때 하라고
승질을 부렸을 것이다.








이지민의 경우엔 그렇게 눈치없이 굴다가
엄청난 후유증이 발생하여
결별까지 선언당하고
오랫동안 고통을 받아야 했지만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범수는 자기가 혜빈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끝까지 모르는 눈치..하긴 나도 왜 혜빈이 결별을 선언했는지
이해 안감)

그 이후에도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는데
동아리 후배 장재란과의 삼각 데이트 사건이다.

이번엔 세계 정치 역학과 제국주의 운운이 아니라
바둑과 당구라는
범수가 지극히 즐기는 잡기들이 등장하는데

내심 호시탐탐 범수를 노리고 있는
장재란은 범수의 상대가 될 수 있을 정도로 당구나 바둑엔 일가견이 있는
실력의 소유자이다.

이번엔 지적인 세계의 공유가 아니라
같은 취미를 가지고 자신을 흠모하는 여자가
등장하는 것이다.
(물론 둔해 빠진 범수는 역시나 재란의 시꺼먼 속내는 전혀 감을 잡지 못한다)





이때도 역시
당연한 일이지만
혜빈은 그들의 세계에서 소외된다.
(답답한 혜빈...꽃이 되고 싶지 않다면서 대체 노력하는 자세가 없다)

조훈현이 어쩌고 일본 기성이 어쩌고 4인방이 어쩌고하며
신나서 두 사람이 침 튀기며 나누는 대화에
한 마디 끼어들지도 못하고
한 구석에 쑤셔박혀 있어야하는 것이다.
그때도 역시 범수는 혜빈의 존재는 아랑곳 없이
장재란을 향해 앉아 있었고
두 사람은 죽이 맞아 점입가경을 이룬다.

그 전과 다른 점이 있다면
더이상 혜빈이
그로 인해 상처 받고 울고불고 하지 않을 뿐이다.






하지만 이지민과 연출했던 그런 장면들로 인해
결별 선언까지 당하고
일상생활이 마비되다시피 괴로와했던 범수는
달라진 것이 없다.


그는 대체 혜빈을 왜 좋아하는 것일까?
이쁘고 귀여워서?

하여튼 난 그들의 연애엔 별 공감이 안갔다.

그들이 함께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고
나눌 수 있는 대화도 한정되어 있으며
공유할 수 있는 세계도 없다.

그는 어째서
대화가 가능하고
취미 생활을 함께 할 수 있는 상대에겐
매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
설사 그렇다해도
그런 상대와 어울릴 땐
번번히 애인을 왕따시키는 태도는 또 뭐란 말인가?








혜빈을 보자.
그녀의
처음 등장은 신비로왔다.
뭔가 있어 보이는 등장이었다.

가끔 보여주는 어둠 속
발레의 아름다운 동작들

굳이 어둠 속에서의 발레 동작을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발레가 그녀의 인생에서
비껴간 운명임을 암시하는 거겠지..

발레를 하는 동안
그녀의 표정과  동작에서 배여나는
좌절과 동경과 슬픔..

그것은
그녀를 돋보이게 한다.









그녀는 참으로 교묘하게
범수를 사로잡아 자기 것으로 만든다.

그녀는 먼저 범수에게 비교적 적극적으로 접근해서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킨 다음
어느 순간부터
범수를 피하는 것으로 눈길을 끌고
기회를 잡아서
자기 마음을 털어놓는다.
그리곤 다시 피해다닌다.

대개의 여자들이 먼저 자기 마음을 드러낼 경우
도망쳐버리는 범수가
혜빈의 경우엔
오히려
그로 인해 마음이 흔들리는데

그녀는 다른 여자들처럼
그에게 사랑해달라고 졸라대며
들이대기보단
그를 피하는 것으로
그의 마음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하긴 혜빈의 청순가련한 외모와
부상당한 발레리나라는 그럴듯한 배경
등등이
일단 범수에게 어필한 면도 있으리라.

그는 그런 타입의 여자..
어딘지 어두운듯 하면서 가련해보이고
그러면서도 고집 세고 아름다운 외모의 여자에게
약하니까..

혜빈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피했다기보단
피하는 척 하는 것으로
그를 끌어당긴 거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면 말로는 피한다면서
그가 접근할 때마다 추파를 던지며
사랑해주세요~라고 애걸하는 눈빛을
범수에게 쏟아부으니 말이다.

결국 범수도 그 수법에 손을 들어버린다.






그러나
꽃이 되기 싫다며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그에게 결별을 선언하는 것으로
그로 하여금
괴로움과 상실감에 몸부림치게 만들어
자기 존재를 더욱 뚜렷하게 부각시키는 것은

의도하지 않았을 망정
상당히 악랄하다.
적어도 아무 영문도 모르고 당하는 입장에선 그렇다.

그녀가 아무리 자기 자신의 열등감과 질투심으로
몸부림치다가 내린 결론이라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자기 문제일 뿐이었건만
그 화풀이를
사랑하는 사람을 괴롭히는 것으로
하는 셈이다.

물론 자기 자신도 괴로와한다.
그러나
그건 당연한 일이니 언급할 필요 없고
길가다가 뒤통수 맞은 범수는
그야말로 뭐가 뭔지도 모른 채
호되게 당하는 경우이다.

하지만 그건 페어플레이라고 볼 수가 없다.

내가 보기엔
그저 응석이고 투정일 뿐이다.

그녀는
무미건조하다.
답답하고 꽉 막혔다.
개다가 꽁한 성격이다.

소심하고 여리고
여자라기 보단 소녀 같아서 성적 매력이 전혀 없다.







내가 범수라면
그런 애인과 함께 있으면
정말 따분할 것 같다.

그녀는
청초하고 귀엽고 유순하고 착하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주구장창 그런 태도를 고수하는 여자...
엄청 지루하지 않을까?

가끔 핵심을 찌르거나
범수가 괴로와하거나 힘들어할 때 결정적으로
감동적인 말을 한 두마디 하긴 하지만
대체적으로
천편일률적이고
일탈이나 분방함이 없는
고지식하고 따분한 인간형이다.
지나치게 반듯해서
하품이 난다.


무엇보다 짜증이 나는건
꽃이 되기 싫다는 둥
동등해지고 싶다는 둥
하며
이별을 선언하지만

실은
그건 그저 그럴 듯 한 핑게일뿐
그녀가 정말 범수에게 삐진 건
질투심이었다.


이지만과의 포옹 장면을 보지 않았다면
과연 결별까지 선언했을까 싶다.
그러면서도
끝내 그것만은 숨긴다.
뭔가 그럴 듯 한 이유로
결별하는 척 한다.

병적으로 강한 질투심
이면엔 열등감이 도사리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 열등감을 극복하려는 노력은
눈꼽만치도 하지 않는다.

정작 이별을 한 후에
그녀는 노력을 했는가?

정말
그가 없이도 똑바로 설 수 있는
주체적이고 당당한 여성이 되기 위한 노력을 했는가?







아니다.
허구헌 날
눈물만 짜면서
고집스럽고도 무의미하게 주변 사람들을  괴롭혔을 뿐이다.


실컷 범수와 주변 사람들을 괴롭힌 후에
너무나 쉽사리
범수 애인 자리로 돌아온 후에는
세상에서 가장 둔하고 평범한 여자가 되서
그나마 지니고 있던 약간의
매력을 모조리 상실한 채

꽃도 인형도 그렇다고 자기가 원했듯
동등한 인간관계를 가지지도 못하고
그저
아주 오래된 연인처럼
밋밋한 여자가 되어 버린다.

그래선가 범수도
그토록 애지중지 이뻐하던 혜빈과
이별을 한 후엔
당장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 듯이
난리법석을 떨더니
막상 그녀가 돌아오자
완전히 무관심해져서
그녀의 생일조차 모른다.

그녀라면 벌벌 떨면
신범수는 어디로 갔는가~!!

200일 기념으로 꽃다발을 안겨주던
모습은 어디로 가버렸는가?

아픈 몸으로 발레를 하는 광경을
비장한 눈빛으로 지켜보며
가슴 아파하던 신범수는 어디로 갔는가~!







그들 사이에선 긴장감도 설레임도 안타까움도
모조리 사라져버렸다.

대체 왜 이별과 그론 인한 고통의 모습을
길게 보여줬는지
참 생뚱맞기 그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