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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환자실

모놀로그 2010. 6. 6. 14:36

난 스무살 즈음에 중병을 앓았었다.
그떄 거의 두 달 가깝게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처음엔 늘 그렇듯 개인병원을 찾았는데
대수롭지 않다는 듯
쓸데없는 약만 주는 바람에
병세가 악화되면서
새벽에 병원으로 실려갔다.

다행히
우리 동네 병원장이
시내의 큰 병원 내과과장이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고할까?

내가 있었던 곳은 내과였기 때문에,
그리고 어렸기 때문에

내게 병원은
로맨틱한 장소였다.

물론
오랫동안 투병했고,
한땐 심각할 정도였지만,

다행히 잘 이겨내고
회복기에 들어서자
난 병원을 이곳저곳 마구 쏘다녔다.

내과 과장인 그 의사는 중년이었지만
키가 크고,
마치 외국 영화에 나오는 백작처럼 생겼다.
실제로 백작이 그렇게 멋있는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구렛나룻에 거무스름한 피부, 크고 늘씬한 키,
위엄 있고 잘생긴 얼굴...

게다가
나의 담당 레지던트는 하얀 얼굴에 청초하게 생긴
미남이었다.

스무살의 어린 처녀는
위험한 고비를 넘기고
어느 정도 회복기에 접어들자
그런 것만 눈에 들어왔던 것이다.

한땐 극히 심각해서
약도 잘 안듣고
혼수상태에 빠지기까지 했지만
중환자실엔 가지 않았다.

그때 척추에서 뇌수를 거의 매일같이 뺐는데
처음 그 느낌이란....ㅠㅠ

정말 묘하고 끔찍하고 소름끼치게 이질감을 주는
기분나쁜 체험이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허리가 약하다.

그러나
그 레지던트는 나를 상대로 어찌나 많은 뇌수를 뺐던지
나중엔 바늘이 들어가는 걸 느낄 수조차 없을만큼
기막히게 솜씨가 늘었다.

결국 난 그의 좋은 실험대상이었던 셈이다.

어린 처녀가 흔히 그러듯,
난 나의 담당 레지던트를 흠모하였다.

잘생기고 친철하고 매력적인 젊은 남자였으니까.

종일 그 사람만 기다리면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회복기의 나에겐
병원은 낭만적인 장소일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더이상 철부지 어린 처녀가
아니게 되었을 때

가족이 중환자실에 입원한 적이 있다.
친척 한분도 그랬다.

난 그때 처음으로 중환자실이란 곳에 가보았다.


내가 있었던 내과는 험한 꼴은 보기 힘든 곳이다.
대개는 겉모습은 멀쩡한 채로
병실에 얌전히 누워 있는 사람들이다.

또 난 2인실에 있었고,
나와 함께 있던 분은 간염 환자였던 것 같은데
겉보기엔 멀쩡했다.

그래서 더욱 병원의 살벌함을 느끼지 못했고
내게 병원이 그렇게 무서운 곳이 아닐 수 있었을 것이다.

중환자실엔 갖가지 종류의 중병을 앓고 있거나
이미  의식을 잃은
환자들이 즐비하다.

내 가족은 뇌출혈로 수술한 환자였다.
중환자실은
가족도 면회를 시간에 맞춰야 할 수 있기에

또한
그때 난 매우 바빴기에
자주 가보진 못했지만

스무살 무렵의 그 낭만적인 느낌 따윈
얼마나 사치스러운, 그리고 철없는 생각이었는지
절절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의식을 잃은 환자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는
중환자실은 정말 끔찍하다.
게다가 그것이 대부분 뇌질환 환자이기에,
혹은 암환자이기에 더욱 그렇다.

하루는 환자 면회를 갔다가
주변을 둘러보니
아래쪽 침대에 어떤 여자가 누워 있었다.
난 그 여자를 보자마자
그 여자가 이미 이 세상을 떠났음을,
즉 육신은 아직 숨을 쉬고 있을지라도
영혼은 멀리 가버렸음을 알 수가 있었다.

그녀에게선 영혼이 사라진 육신의 돌덩이같은
차가움과 비정함이 느껴졌다.

아니나다를까,
며칠 후에 다시 면회를 갔을 때
그 침대는 비어 있었다.

내가 간호사에게 물어보니
간호사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역시...

그 여자는 아직 젊었고,
아이들은 어렸다.
40대 정도?

면회 시간이
겹쳐서 그 여환자의 아이들이
엄마를 보러 올 때마다
귀에 대고 열심히 뭐라고 외치는데,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난 안타까왔다.

그 말은 이미 그 여자에겐 닿지 않는 곳으로
가버렸음을 알 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기어이 그 육신마저
아주 이 세상을 떠난 모양이었다.

혼수상태에 빠진 것과,
실제로 영혼이 빠져나간 것은 아주 다르다는 것도
중환자실에서 체험한 일이다.

당시의 내 가족은
그냥 혼수상태였다.

혼수상태의 환자는
들을 건 다 듣고,
느낄 것도 다 느낀다.

내가 아팠을 때도 잠깐 혼수상태에 빠졌지만
실제로 그랬었다.

그러나
영혼이 빠져나가고 껍질만 남아 숨을 쉬고 있을 뿐인
환자는 전혀 느낌이 다르다.

살아 있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내 가족에게서도 얼마 후에 체험했다.

결국은
어느날
난 보았다.
영혼이 빠져 나가고 껍질만 남은 그 모습을..

그때 난 알았다.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옆 침대에는
겨우 10대 후반의 젊은 청년이 역시
그렇게 굳어진 얼굴로 기나긴 잠에 빠져 있었다.

그야말로 죽음보다 깊은 잠에 빠진 것이다.

아주 미세한 실핏줄이 터졌다고 한다.
회복 불능으로 보는 듯했다.

난 가끔
그 청년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왜냐면
난 그에게서도
그 비정하고 딱딱한 껍질만 보았기에...

영혼이 멀리 가버린
육신을 보았기에...

병원은 이제 더이상
내게 낭만적인 곳이 아니다.

모든 것이 낭만적으로 보이던 시절이 그립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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