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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왕-해인과 승하의 감정 본문

주지훈/마왕

마왕-해인과 승하의 감정

모놀로그 2011. 2. 11. 22:42

마왕을 혼자 몰아서 본 뒤에
(난 한번 보기 시작하면 날밤새면서 몇날 며칠 동안이 걸려도
끝장을 봐야하는 성질이라..)

뒤늦게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며 이런저런 글을 읽다가,

해인과 승하의 어린 시절 장면이 나오자,
승하가 그때부터 해인을 사랑했느니,
하는 글이 종종 보였다.

난 그 의견에 반대한다.

당시 해인은 초딩 정도로 보이고,
승하는 겨우 16세,

사춘기 소년이라하나
너무나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겪고
막 그 동네를 떠나기 직전의 모습 같은데,

떠나기 전에
자기에겐 너무나 고마운 그 꼬마를 한번 만나보고 가고 싶었던 것 같다.

마침 비가 오고 있었는데,
그는 우산을 쥐어 주고,

나도 고마워..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아마
그 한 마디가
그가 그 꼬마를 일부러 만나러 온 이유일 것이다.

물론, 그 꼬마는 무슨 소린지 알 길이 없었겠지만.

그 후 12년 만에 다시 만날 때도 비가 오고 있었다.
또 두 사람이 꿈같은 시간을 보낸 유기농형의 농장에서도
잠깐 비가 내린다.

승하와 해인이 만남엔 꼭 비라는 매개체가 끼어드는데,

그것은
두 사람 사이가 비극적으로 끝날 것만 같은 느낌을 강하게 풍기기도 하고,
태성의 눈물 같기도 하며,
그를 보낸 후의 해인의 눈물 같기도 하다.
혹은 태성의 절통한 사연이 비가 되어 해인에게 하소연하는 것 같기도 하다.

훗날, 해인은 승하가 떠난 후에
그날 일을 되살리고
그게 무슨 뜻이었는지,

왜 그때 그 오빠가 자기에게 우산을 꼭 쥐어주고
고맙다는 말 한 마디 생뚱맞게 남기고
지친 어깨를 보이며 떠나갔는지
이해를 했을까?

하여튼
승하는 단지 그 꼬마에게 감사의 말을 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다렸거나 뭐 그런 것 같고,

그 상황에서
그 꼬마에게
태성이가 연애 감정 같은 걸 품었을 리 없다.

절망과 분노만 남은 채 떠나는 마당에도
귀여운 꼬마에게 따뜻하고 순수한 미소를
던지긴 하지만,

그때 이미 사랑했었느니,
오래 전부터 마음에 품고 있었느니,

하는 의견엔 찬성할 수가 없다.

사랑같은 거 하기엔 나이도 처지도 걸맞지 않는 것도 그렇지만,
자기의 계획에 냉혹하게 끌어들여
일종의 앞잡이 노릇을
연약한 여자에게 시키는 걸로 복수극을 시작하는 것만 봐도

고마운 건 고마운거고,

일단 감정은 배제한 행위인 것만 봐도
승하 아닌 태성은
해인을 사랑하거나,
혹은 그 비스무리한 감정 같은 건 가지고 있지도 않았고,
스스로도 그런 감정을 해인에게 가지게 될 것이라곤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그 증거는
승하가 해인을 대하는 태도의 변화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녀에게 사심이 없이,
단지 자신의 목적에 이용하기 위해
도서관을 드나드는 승하는,

여자라곤 손 한번 잡아본 적도 없는 처지일 것이 뻔함에도
불구하고,
마치 선수처럼 행동한다.

그녀에게 하는 말이나 행동거지는
가히 여자에게 도통한 듯한 선수급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가 마음 속에 들어오자,
그는 조금씩 변한다.

그의 정서는 다시 사춘기 소년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래서
사춘기 소년들이나 할 법한 행동으로
그의 애정을 표현한다.
기껏 손이나 잡아보고 싶어하는 정도가
그가 품은 흑심이다.

가장 재미 있는 장면이 같이 식사할 때이다.
그토록 선수처럼 능수능란하게 해인을 다루던 승하가,
막상 단둘이 밥을 먹게 되자,
마치 어린 아이처럼
해인이 시키는대로 하면서
쑥스러워 몸둘 바를 모른다.

행복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한 그 감정은
그를 뒤흔들고,
그래서
다신 그녀와 단둘이 밥을 먹지 않겠다는 선언을 한다.
처음으로 그녀에게 쏠리는 마음을 다잡는 장면이다.
물론 사랑이란 것이 잡으려한다고 잡아지는 것도 아니요,
버리려 한다고 해서 버려지는 것도 아니니
그 이후에도 승하는 그녀를 만나고 싶어하는 자신의 욕망을
누르지 못하지만 말이다.

밥은 같이 먹지 않아도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하는 그의 마음이
딱 첫사랑을 시작한 소년 같다.

다시 만난 그 소녀는
너무나 밝고 맑게 성장해 있다.

어둠 속에 살고 있는 승하에겐
정말 향기로운 빛처럼 빛나는 해인을 보면
그의 마음이 그 순간만은
어쩐지 오래 전
가족들과 함께 지내던 시절처럼
따스하고 온전해지는 느낌이 들었을 것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해인의 도서관을 자주 찾으면서
그녀와 사이를 서서히 돈독하게 다지지만,
처음 얼마 동안은
자기 목적을 위한 행동이었기에 사심이 없었고,
그래서 선수 같은 말과 행동도 가능했을 것이다.


맘속에 서서히 싹트는 해인에 대한 사랑, 그리고
젊은 남자로서의 욕망 등등은
그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시간이 흐르면서
생겨난 것이지

처음엔 자기가 사랑에 빠질 수 있다는 건
당연히 상상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랑이 뭔지도 몰랐을 게 뻔하다.

그렇듯 처음엔 목적을 가지고
도서관을 찾지만,

차츰 승하는 마음이 착잡하거나, 골치 아프거나, 힘들어지면
이제 습관적으로 도서관을 찾는 모습을 보여준다.

성준표에게 노란 봉투에 든 타로카드를 받은 후에
식사를 함께 하자며 해인을 찾고,

그 성준표를 없앨 계획을 세우기 위해
의도적으로 오수에게 잘못된 정보를 준 후에도
해인을 찾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오수의 아버지와 만난 후에도
그의 발길은 도서관을 향하고 있다.

해인을 매정하게 뿌리친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우리는 거의 중반 쯤에나 가서야
실은 해인을 진작부터 승하가 알고 있었음을 알고 놀라는데,

생각해보면
그건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놀라는 게 이상한 일이다.

자기 형의 죽음의 진상을 말해준 유일한 사람이며,
비록 아무도 믿어주지 않아
허공 속으로 사라져버렸지만,
어떻든 그녀의 존재를 승하 아닌 태성이 몰랐을 리 없기 때문이다.

중반 쯤에야 굳이 그녀와의 소년 시절의 만남을 새삼 회상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은
아마 그때 이미
그녀를 다른 눈과 마음으로 보기 시작하였음을 알려주기 위해서인 것 같다.

고마운 소녀, 귀엽고 맑게 보였던 소녀,
그러나
그녀도 그 초능력을 가진 탓에 결코 펑범할 수만은 없었고,
따라서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 초능력은
오수나 승하의 가슴에 찍힌 낙인처럼
그녀에게도 같은 의미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그 어린 시절의 맑음과 밝음을
잃지 않고 있다.

나이에 비해 득도한 듯한 모습과
가끔 하는 말에도 관조적이고 달관한 듯한 면이 있다.
그건 참 놀라운 일이다.

상해 있는 두 남자를 상대하기 위해서
작가는 아직도 20대 초반에 불과한 그녀에게
그런 설정을 부여한 것일까?
그래서 입체적이지 못하고,
극중 인물 중 가장 비현실적으로 보이는 약점은 있다.

겉모습은 멀쩡하지만
속은 축축한 지하실처럼 음습한 승하는
가끔은 많이 춥다.

그래서
어느덧 그렇게 추울 때마다
해인을 찾는다.

그리고
해인이 뿜어대는 빛을 들이마시고 에너지를 충전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건 승하뿐이 아니라
오수도 마찬가지여서,

그녀는 결국 두 추운 남자에게
따스한 빛을 비추는 존재지만,

그녀의 빛은 그들에겐 위로는 되었으나
구원은 될 수 없었던 것이 비극이다.

또한
해인이 오수를 대할 때나 승하를 대할 때
거의 같다고 투덜대는 사람도 많았지만,

해인은 분명히 두 사람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
배우의 연기나 캐릭터가 비교적 다른 인물에 비해서
평면적이라 눈에 두드러지진 않았지만,
그래도 다르다는 것은 확실하게 보인다.

우선,
오수는 굉장히 편하게 대한다.
그와 함께 있을 때는 사무적이고도 비교적 허물이 없다.
그건 오수가 남자로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가 되겠다.

그러나 승하와 함께 있을 땐
몹시 긴장하고, 편안해보이지 않는다.
승하의 눈치를 자주 보고, 말수도 적다.
잘 웃지도 않고 몸을 사리는 느낌이다.

제아무리 계몽해인이라지만,
그래도 승하와 함께 있는 해인은
제법 여자처럼 보인다.

그건 해인에게 승하는 남자라는 것을 의미한다.

남자를 모르고 살아온 해인인지라,
자기에게 남자로 느껴지는 승하가 편치가 않다.

그를 보면 불편하면서도 끌리고, 그러면서도 설레는
처음으로 남자라는 성과 마주친 여자다운 모습을 보여준다.

따라서
두 사람 중 누구를 더?
어쩌구 하는 논란은 불필요한 것이었다.

나중에야 애초에 승해라인으로 러브라인이
결정되어 있었음을 알았지만
그걸 몰랐다해도
화면 속에 뻔히 답이 보이기 때문이고,
전에도 언급했듯,
승하와 러브라인이 성립되어야
마왕의 비극성이 더욱 처연함을 띄우기 때문에
당연하다 하겠다.

난 작가의 의도며, 기획의도며, 기타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봤기 때문에
오히려 아무런 편견 없이
마왕을 봤고,
그래서
눈에 보이는대로 느낄 수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본방을 보는 것보다
이렇게 뒷북으로 보는 재미는  이런 것에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