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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훈/궁

궁 21부- 율이란 캐릭터에 관한 주관적 견해

모놀로그 2011. 5. 6. 22:07

율이라는 캐릭터를 보고 있노라면

필연적으로 내게 생각나는 캐릭터가 있다.

 

다모의 장성백이다.

 

장성백과 율은 비슷한 점이 있다.

 

일단 궁과 다모가 원작이 따로 있는 만화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또한 두 캐릭터 모두 원작과는 전혀 다른 캐릭터로

재창조되었으므로 그 캐릭터들에겐 원작에서 따올만한

모델 케이스가 없으니

작가의 역량이 필요했었다는 것도 비슷하다.

 

신군이나 채경이에겐 어떻든 드라마에서 뭘 해야 좋을지

기준선을 그려주는 성격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율은 원작에서

이름만 빌려왔을 뿐 새로운 역할을 주었다.

 

다모에서 장성백 캐릭터는

원래는 원작에선 별로 비중이 없는,

평범한 악역이라고 들었다.

 

그리고,

궁에서도 원작 만화에서의 율은 역시 그렇게 비중 있는

캐릭터도 아닐 뿐더러,

오히려 그저 그런 찌질한 악역이라고 들은 것 같다.

 

둘 다 내가 원작을 보지 않았으니

뭐라고 하기가 좀 그렇긴 한데,

 

어떻든 그게 사실이라고 치고

또한 사실일 거라고 믿기에

 

그렇다면

두 캐릭터 모두

원작과 무관하게 제작진에선 야심차게 재창출하여 새로운 성격과

비중을 부여하여

극의 긴장감을 살리고,

주인공과의 대립각을 살리기 위한

중요한 캐릭터가 된 셈이다.

 

그리고

둘 다 실패했다는 점에서 또한 비슷하다.

 

모델 케이스가 빈약한 토대 위에서

새로운 캐릭터로 재창조해서

그럴 듯 하고,

멋있는 옷을 입혀주긴 했는데,

 

그렇다면

그에 걸맞는 새로운 행동과 말을 해야한다.

즉 전혀 다른 캐릭터가 되야한단 말이다.

 

그런데 둘 다

겉모습만 달라질 뿐,

하는 짓은

원작에서의 찌질함을 그대로 가져온다.

 

그러다보니

이상한 갭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갭을 논문으로 채워주기 위해

그들의 팬이 무슨 소린지 알 길 없는

장황한 글을 써대는 것도 똑같다.

 

다모의 최대의 흠은 장성백 캐릭터이며

그래서 장성백에 관한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글들이 허벌나게 장성백 지지파에 의해서 쏟아졌듯이,

율군도 그렇다는 말이다.

대개 율에 관한 글치고

도무지가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하는 건 고사하고,

실제로 드라마를 보고 쓰는건지

자기가 이러길 바라는 걸 쓰는건지

알 수가 없는 글이 태반인 것도

너무나 장성백 관련 리뷰와 닮아서

웃음이 나온다.

 

어떤 배우가 한 캐릭터를 연기했을 때,

그 캐릭터에 대한 관념적인 글들이 많이 쏟아진다는 건

대개

그 캐릭터에 매력을 느끼지만

(하긴 캐릭터가 아니라 잘생긴 배우에게 끌리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지만)

뭔가 부족하다고 느꼈을 때

그 괴리를 땜방해주기 위해서

모자란 부분을 글로 채워주는 게 다반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그런 거 다 필요없다.

 

그저 둘 다 작가의 역량이 딸려서

새로운 옷만 입히고

정작 하는 짓은

원작에서 그대로 가져오는 바람에

도무지가 말이 안되는 캐릭터가 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극의 완성도를 떨어뜨리는데

대단한 일조를 할 뿐이다.

그에게 기를 쓰고 뭔가 주려고 할 때마다

극은 그만큼 점점 더 망가진다.

그럴 수밖에 없다.

완전히 새로운 캐릭터로 만들었다면

완전히 새로운 역할과 대사를 주어야하는데

그러질 못했기 때문이다.

 

앞서도 말했듯이

 

'황태자비를 연모하고 있습니다'

라는 한 마디 말을 하기 위해,

그 드라마틱한 장면 하나를 위해

수많은 무리를 하며

극을 망가뜨린 것이 좋은 예이다.

 

 

율군은

마치, 초반의 싱그러운 궁을 상징하듯,

싱싱하고 씩씩한 채경과 더불어

오렌지빛 왕자로서

신선함을 화면에 불어넣는다.

 

난 초반의 율군은 눈이라도 즐겁다는 이유로

그가 나타나면 기분이 좋았다.

 

그는 채경이와 참 잘 어울리는

신선한 하모니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건 채경이가 얼음 왕자 신군과 이루는

색다른 그림과는 또다른 매력이 물씬 풍기는 것이었다.

 

채경이는 그 오렌지빛 왕자와 얼음 왕자 사이를

버라이어티하게 오가며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가끔 그 눈빛에 깊고도 섬뜩한 원망이 어른거릴 때도

꽤 인상적이었다.

 

시간이 흘러흘러

그가 점점 극의 중심으로 이동해오면서

채경과 신군 사이에 놓여지게 되자

그가 하는 짓은

혹시 원작에서 그러지 않았을까 싶게

찌질하기 그지 없다.

 

가끔 뭔가 있어 보이는

대사도 읊긴 하는데,

그건 그저 겉치레일 뿐이지

내용이 없다.

 

대개 제작진에서 실제로 공을 들이는 건

서브남주이다.

멋있고 말이 되는 상황을 모조리 가진 메인 남주와

팽팽한 대립각을 이루려면

서브에겐 복잡한 성격을 주어야만 그나마 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실은 서브가 더 많은 연기력과 매력이 필요하다.

메인이 아니기에 메인이 가진 인텐시브를 갖기 못한 서브가

맨발로 따라잡으려면

배우 자신의 매력도와 연기력이 있어야만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메인 남주에게 필적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궁에서의 율군은 불행히도

그에게도 주어진 상당한 타당성과,

그로 인해 복잡해진 그의 상황을

설득력있게 이끌어가며

메인 남주에게 뒤지지 않을만한

배우의 매력도와 연기력에서 일단 뒤쳐진다.

그에게 주어진 설득력은 찌질한 대사와 행동으로

제작진에서 망치기에 급급하다.

 

 

율이란 인물은 상당히 복잡한데

캐릭터가 복잡한 게 아니라

원작에서 빌려온 악역에,

드라마에서 부여한 비중이 더해져서 복잡해진 것이다.

 

따라서 고도의 심리 연기와 내면연기가 요구되는

난해한 역이 되버렸는데,

이상하게 시간이 흐를수록

단순해져간다.

 

율역을 맡은 김정훈은 굉장히 유약하고 청초한 이미지이다.

그가 선량하고 부드러운 인물로 나올 때까진 그래서

꽤 어울렸고, 무난했다.

 

문제는 극이 점점 갈등 구조로 치달으면서

율군이란 인물의 내면적 복잡성이 부각되고,

그것이 시청자들에게 중심인물과의 대립으로 보여질 때,

그의 심리묘사는 한계에 다다른다.

가수 출신 연기자가 연기하기엔 너무 난해한 인물이 되버린 것이다.

 


그나마 나의 흥미를 끈 것은

율과 신의 성장한 모습이다.

율은
신이 황태자가 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었을지도 모를
자상하고 정많고 배려심많고 유순한,
적어도 겉으로는 그렇게 보이는 모습으로,

신은
율이 황태자로 성장했다면
바로 그렇게 되었을 거라고 내가 굳게 믿는
거만하고 싸가지 없는 인물로,
역시 겉모습으로는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는 인물로
각각 변해 있다.

둘의 지위가 바뀌면서
그렇게 겉모습도 바뀌었지만
그러나
본성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채경이란 인물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은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내가 초반엔 호감을 가졌던 율에게 흥미를 잃기 시작한 것은
그가 사랑하게 된 채경을 신군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쓴 방법이
다름 아닌 이간질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율군은
신과 채경의 사랑의 방해꾼역을 맡은
일종의 악역이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왜 하필 이간질의 방법을 썼을까 싶다.

역시, 새로운 캐릭터를 창출할 능력부족으로

원작의 대사를 고대로 가져온 게 아닌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율군이 하는 말과 행동은

그 캐릭터가 지닌 깊이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다.

 

 

율군의 대황실 선언 후에

신군이 잠시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내겐 그 장면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낯설고 스산하기만 한 궁에 시무룩하게 서 있던 꼬마 신군은
사촌인 율군을 발견하자
기쁜 듯이 달려가서 아는 체 하다가
봉변을 당하는 것이다.
그가 받은 건 매몰차고 정감 없는
명령과 쥐어박힘 뿐이었으니까.

이쯤에서 율군과 신군의 차이점인
뒤바뀐 겉모습과 내면의 본성이
차츰 드러난다.

난 율군 캐릭터가 차츰 단순한 캐릭터로

수렴해가는 과정이 딱하기 그지 없다.

 

지나칠 정도로 채경에게 집착하여,

그녀를 자기 것으로 만들어야만

모든 상실감이 해소될 것처럼 만들어버린다.

 

집착캐릭터에게 반드시 주어지는

상대방의 마음은 개의치 않는 언행도

율군은 이상할 정도로

극단적이다.

 

수많은 드라마에서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여주를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해

온갖 집착증을 보이는 캐릭터 중에서도

유례가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또한 그 집착을 치장하기 위해

그가 늘어놓는 갖가지 이론을 듣고 있노라면

조용히 다가가서

한 마디 들려주고 싶다.

 

법도니, 궁안의 인형이니, 가식적인 뭐시기니

채경의 웃음을 찾아주겠느니,

채경의 본 모습을 잃어가는 게 안타깝느니

 

그런 의미없는 말들 다 집어치우고,

 

율군, 네가 채경이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법도를 부수고 자시고 그런 거창한 게 아니라

오로지 채경이가 널 원하고 사랑하는 길 뿐이라는 걸

왜 모르냐?

 

고 한 마디 해주고 싶다.

 

하지만

저 간단한 걸 시청자들이 알아차리면

재미가 없다고 생각하는건지,

 

아니면

캐릭터 스스로가 자기 말의 공허함을 느끼고 발버둥을 치는건지

저 간단한 원리에 귀막고 눈감고

악착같이 복잡한 논리를 가져다가

대입시키니

점점 더 어거지를 쓰게 되고

극도 이상해지며

캐릭터는 초라해지는 것이다.

 

저렇게까지 하는데도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하니

어찌 초라하지 않으랴??

 

하여튼,

드라마의 삼각 관계에 반드시 등장하는

순정적이고 사랑에 목맨 캐릭터 중에서도

율군은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건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