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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현-'호텔델루나의 고청명'

모놀로그 2023. 1. 16. 01:43

 

 

'호텔델루나'가 방영된 것이 2019년이다.

우울증이 절정을 이루었던 그 시절,

 가볍게 웃고 즐기고 싶어서 호텔델루나를  정주행 하다가

생각지도않게, 느닷없이, 벼락 치듯이

 

순간에 저얼굴과, 저 표정을 본 순간이 생각난다.

지루하고 고통스럽던 일상 속의 신선한설렘이 섞인 충격,

현실 속에서는 일어날 리 없는

그렇다고 드라마 속에서 기대하기에도

이젠 난감해진 선물,

내가 오랫동안 기다렸던 어떤표정, 어떤느낌, 어떤 감성,

내가 뭔지 모르면서,

찾아 헤맸던 것 같기도하고, 아름다운 꿈 같기도 했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하지만내가, 혹은, 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건조하면서도 드라마틱한 표정이었다.

 순간,고청명은 그야말로 하늘에서 뚝 떨어지면서 지루하던 드라마에 단비를 뿌렸다.

 

고청명, 그는 고구려 귀족 청년이다.

고구려 유민들을 모아 화적 떼를 조직한 보스 '장만월'과의

첫 만남은 저렇듯 격렬한 전투로 시작된다.

 

그들은 비록 처지와 신분은 다르지만,

나라를 잃은 젊은이로서의 동질감일까,

비록 당나라 성주 딸의 호위무사와,  

그 행렬을 기습한 화적 떼의 보스로 만났지만, 쉽게 가까워질 수 있었다.

 

시대극의 좋은 점이랄까,

이렇듯

어둠과, 호수와, 안개와, 반딧불과, 술병이 오가는 침묵 속에 서로를 스쳐가는 시선만으로,

그들의 설렘과 나의 설렘,

그들의 청춘의 황홀한 두근거림과,

그것을 흘려보낸 나의 추억 사이의 여백이 공간적으로, 심리적으로,

등장인물의 마음까지도 함께 침잠하게 되는 느낌은,

수많은 도로와, 빌딩과, 번쩍이는 불빛으로 표현되는 현대극에선 불가능한 자연 속의 소통법이다. 

 

시대적 배경이 조선시대가 아닌 게 다행이었다.

삼국시대가 막을 내리고

전국시대가 끝나갈 무렵의 수많은 유랑민과 지난 왕국의 귀족들,

그러나 그 덕분에 서로 만날 수없는 인연이었던 사람들이,

남녀들이 이렇게 만나 망국의 애처로움과 그리움을 공유하며

동시에 바로 이전의 신분이 아니라

망국으로 인한 서로의 어깨에 놓여진 짐의 무게로 인해   

이제 둘은 헤어져야 하고,

예정된 헤어짐을 어긋나게 하려던 의지는 예기치 못한 비극을 낳는다.

 

그래서 더욱 아팠다.

늘 동경과 많은 언어를 담은 채,그러나 말로는 표현되지 못했던 눈빛으로

청명을 바라보고,웃음기없는 냉철한 얼굴에 스쳐가는 따스한 표정으로  

올려다보던 만월의 마음 한편에는 신뢰는 부족했던 것일까?

 

대개의  파국은 오해와 불신에서 비롯된다.

상대에 대한 불신, 열등감, 자신의 처지엔 사치스러운 미련과 그리움을 탐했던 장만월은 엉뚱한 대가를 치른다.

 

그 또한 시대적인 비극이다.

저 시대의 귀족이 투항할 때 자신의 성과,

그 성에 따른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한다.

장만월이 자신의 화적떼가 몰살당했을 때

미치게 자괴감에 몸부림쳤던 이유가 그랬듯이 말이다.

우두머리의 무게는 자신의 목숨이 아니라

신을 따르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의 무게였으니까.

그들의 비극은 저시대만의 비극이며

다른 시대에 선일어날 수 없는 비극이다.그래서 아프다.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전국시대엔 목숨에 연연하지 않는다.

목숨보단 명예가 중요하고

명예는 일족의 운명을 지켜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청명에게도 예외는아니었다.

그는 만월을 따르고 싶었고,그녀의 꿈에 합류하고 싶었다.

그도 고구려 유민의 나라를 세우고자 하는 그들의 꿈을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목숨은 그의 것이 아니라

이미 타국의 성주 것이고

수많은 일족과 그들이 거느린 백성의 목숨만큼의  무게였던 것이다.

 

청명은 몇번이고 만월에게 이런말을 한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인가?'

 

그는 아마도 이미 타국의 종이 되다시피한 망국의 귀족으로서

신분상으론 비교가 안되지만,

자유롭고,아직도 고구려민으로서

자긍심과 투쟁심을 포기하지 않은 만월 일행을 동경했을 것이다.

그는 그러한 자신과 만월의 아슬아슬한 인연.

어둠속에서만,호숫가에서만,

비밀스럽게 이어지며 깊어가는 연모의 종착점을  궁금하게 여긴다.

스쳐지나가는 인연일까,아니면...마음이 자꾸만 깊어지듯 인연도 이어질까...

 

그는 자신이 천년의 원념의 대상이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그만큼 만월의 마음이 깊었고,

그래서 원념도 깊었고,

죽을수조차 없을 만큼 그아픔이 컸다는것이 아파서

천년을 그녀를 곁에서 지키는 반딧불,

가냘픈그들의인연을상징하는 듯

그녀의 천년의 분노에 화답하는

애처롭게,위태하게,그러나

끊임없이 반짝이는 운명으로 스스로 산화해 버리는 것이다.

어느날 호숫가에서의 데이트 때,

수많은 반딧불이  어둠 속에서 황홀하게 그들을 에워쌌을 때 ,

자신의 운명을 예감이라도 한 듯이

그 중 한  마리를 손안에 가두어 만월에게 보여주며 마주 보고 웃었던 행복한 순간이

그가 그토록 궁금해했던 그들의

'마지막'이었던 것이다.

 

 

 

이 드라마를 찍을 당시,

배우 이도현의 나이는 25세쯤이었다.

그로부터 벌써 4년이 흘렀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때가 훨씬 남자스럽다.

그 또한 시대극의 장점이다.

조선시대에선 표현할 수 없는 남성미이다.

길게 풀어헤친 풍성한 머리에 무인 복장과 머리띠,

신분이 가져다주는 타고난 느긋함과 태연하고 무심한 듯

솔직하고 기품 넘치는 행동과 말투가 청명이라는 인물의 특성이다.

장난기어린 미소와 심각 표정의 괴리가 매력적이다.

 

아이유와의 환상적인 케미와

눈길만 스쳐도, 결투 중에 숨결만 스쳐도 오싹하게 주고받던 텐션은

나이 어린 배우임에도 숨 막히게 섹시하다.

시대극 특유의 절제된 화면 탓이리라.

그래서 청명팬들이 다시 한번 사극을 찍어 주길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행복한 순간은 짧고 그 대가는 가혹하다.

장만월 천년의 원념의 상대인 고청명,

바람 스치듯 만나

호수의 반딧불처럼 멀어지려 했지만

가혹한 운명은, 아니 시대의 비극은 그들을 최악의 비극으로 몰아넣어

처음 그랬듯 마지막 마저 칼을 겨누어야 하는 처연한 장면으로 몰아넣는다.

 

'호텔델루나'의 천년 묵은 신경질적이고 무식하고 단순한 장만월은 현란하지만,

천년 전의 어린 장만월은 아름답다.

그녀는 무사이고,

우두머리의 카리스마와

따뜻한 심성에 청명에 대한 연모마저 서늘한 칼내음을 풍겼지만

그 서늘한 눈빛엔 늘 그리움이,

차마 할 수 없었던 수많은 말들을 담은 채,

청명을 바라보곤 하였다.

그것은 그리움과 아픔이었다.

그런 그에게 칼을 겨누면서 피눈물을 흘리는

원망과 미움과 그럼에도,

아직도 생생하게  살아있는 사랑의 아픔에 일그러지고

부풀어 오른 입술에,

눈물이 흘러넘치는

처연한 눈빛이 가슴 미어지도록 아름다웠고 비장했다.

 

 

 

또한 변명을 할 수도,설명을 할 수도,

사랑한다고 말할 수도 없는 청명의 절망적인 눈빛,

그녀를 너무나 잘 이해하기에

기꺼이 그녀의 칼에 목숨을 던질 수 있는 그의 마음은

자신을 차마 베지 못하는 그녀의 떨리는 칼날 앞에서 고백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날밤은 장만월 일족을 몰살한 대신 살려준 만월의 목숨과 거래한 청명과

그를 원한 성주딸의 혼례식날, 그러나 청명을 기다리던 신부의 붉은 신부복은 핏빛으로 더욱 붉어지고.

만월은 붉은 혼례복을, 청명은 흰색 첫날밤 옷을 입고 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마주 선 그들에게 쳥명은 이렇게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첫날밤이었기를...

넌 나를 반가이 맞아주고

난 그리웠다 너를 품어주고... ,

 

만월의 손 안에서 떨고 있는 칼끝에 몸을 던지며

그 대가로 그녀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안는 것으로 그는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

 

이 순간이 서러워서 난 이후로 다신 고청명을, 그리고 '호텔델루나'를 보지 못하였다.

하지만,문득 25세, 다시는 오지 않을 아름다운 시절의 이도현, 

그리고 그가 연기한 고쳥명의 모습 중에서 내가가장 아끼는 모습들 몇 장만이라도

내 블로그에 남겨 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치 25세의 주지훈의 신군을 단 한컷도 남김없이

이 블로그에 올리면서

주배우에게 제발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20대, 

20대만이 줄 수 있는 청춘의 향기가 넘치는 모습을, 

제발 많은 작품을 통해 남겨두라고 애걸했듯이,

그럼에도 그는 20대에 겨우  3작품을 남겼을 뿐이고

그런 자신을 뒤늦게 후회했다.

지금의 주지훈에게 20대의 그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난 그것이 못내 아쉽다.

다행히 이도현은 20대에 많은 작품을 남겼다.

비록 작품의 중심인물은 아니지만,

고청명은 호텔델루나를 있게 한,

장만월의 천년의 사랑, 천년의 원념, 천년을 죽지 못하고 떠도는 불쌍한 여인으로 만든 사내이다.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이 정도만 쓰고싶다.

사실  이  정도  쓰는   것 조차 내겐 벅차다.

난 '고청명' 이야기와 그의 캡쳐만큼은

절대로 하지도 쓰지도 않겠다고 결심했었으니까.

 

참고로 그런 결심을 하게 만든 것은,

나를 목놓아 울게 만들었던 가장 큰 원인은

마지막 캡쳐가 말해준다.

 

 

 

 

 

 '18어게인' 의  모습들이다.

26세쯤의 모습일 것이다. 

 

아름답기로는 고청명을 능가하지만,

고청명의  무사답고 남자스러운 느낌보단

미소년의 아름다움과 젊음이 넘친다.

긴시간 좋아했던 배우들이 나이들어 가는 것을 지켜봤다.

희한하게도 내가 나이드는 것만큼이나 안타깝고 애석했다.그들을 통해서 세월이 사정없이 흐르는 것을 무력하게 지켜보는 느낌이었으니까.

 

남자의 매력은 30대가 최고이다.

그러나 여자도 남자도 20대는 특별하다.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청춘의 향기와

아직 때 묻지 않은 청량함이 있는 아주 특별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이도현은 신인상 두번에,

최우수연기상까지

어린 나이에 너무 많은 상을 받았다. 

난 오랜 시간 배우들의 흥망성쇠를 지켜보면서

연기력이 무르익기 전에  

너무 많은 상을 받는 것은 그렇게 좋은 결과를 낳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상이라는 것이 받는 당시엔 좋을지 몰라도, 

배우의 커리어나 미래와는 무관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난 배우 이도현의 미래를 지켜볼 것이다. 

그는 젊지만 노력하는 연기자이고 많은 재능을 지녔고,

나이에 비해 뛰어난 연기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반듯한 이미지가 너무 강하고, 그런 역을 많이 해서 연기의 폭을 넓혀야 할 것이다. 

그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 또한 즐거운 일이지만

큰 배우가 되기보단 좋은 연기자가 되길 바라본다.

또한 흥행배우가 되기를 기원한다. 

우리나라 시스템상  티켓 파워가 없는 배우에겐

절대로 좋은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조연배우로 맹활약하는 것이 차라리 나을 만큼.

 

배우  이도현은 나의 가장 괴로운 시절에 '고청명'이라는

잊을 수 없는 인물을 선물해 준 배우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