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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록- 궁궐 일상의 리얼리티 본문
조선 오백년,
그 어떤 왕조보다 우리에겐 가까운 것이 조선조이다.
오백년이라는 기나긴 세월만큼
사건도 많고 이야깃거리도 많았다.
당연히 그 시대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소재로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가 숱하게 만들어졌다.
하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모두 허구이다.
실록에 나온 단 한 귀절을 가지고
장장 50부가 넘는 드라마를 만들었다는 대장금처럼
한웅쿰의 소재를 가지고 만들어낸 작가의 상상력의 산물인 것이다.
구중 궁궐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 누가 속속들이 알 수가 있으랴!
당사자가 직접 기록하지 않는 한
진실은 그 누구도 알 수가 없는 것이
또한 궁중사인 것이다.
당사자가 직접 기록했다해도
그 당사자가 사건의 중심인물인 한 또한 그것이 진실일 수 없는 것이
궁중사이기도 하다.
그렇게 복잡한 이유는 아마도
궁중이라는 공간이 지니는 힘일 것이다.
그 안에 있는 한,
그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첨예한 정치성,
그러나 인간인 한 필연적으로 지니고 있을 감성,
이 두 가지가 얼키고 설키기 때문이다.
물론, 궁궐 안에선 아무래도 감성보단 정치성이 조금 더 힘이 셀지도 모르겠다.
인간은 설사 궐에 살고 있지 않아도 정치적이다.
그건 인간 속성의 본질일 것이다.
동시에 인간은 누구나 감성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정치성과 감성을 적절하게 조화시키며 그럭저럭 살 수가 있지만
궁궐이라는 공간에선 그렇게 간단치가 않을 것이다.
부부싸움을 해도 사랑싸움을 해도
질투를 해도
정치성과 감성이 극단적으로 작용하기에
아차하면 목숨이 왔다갔다하는 공간이 바로 궁궐이다.
난 한중록이라는 책이 세상에 존재함을 매우 감사히 여기는데,
바로 그러한 정치성과 감성이 어우러지는
복잡한 궁궐사를,
다름 아닌 일국의 세자빈이 직접 서술한 매우 중요한 사료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어느 나라의 왕가에 세자의 부인이 직접 쓴 기록이 전해져올까?
이건 보통 사건이 아닌 것이다.
사건의 진위에 관해선 자신의 이해가 얼켜있기에 백프로 정직할 수 없을 지라도
그것을 배제한다쳐도
그 시대, 그 시절, 그 장소에
다름 아닌 왕가의 일원이요,
그것도 일국의 왕세자의 부인이 쓴
당대의 생생한 왕족들의 생활이다.
대단하지 않은가??
세자빈이 쓴 기록이라는 점에서 가치가 있는 이유는 또 있다.
세자빈이란, 타고난 왕족은 아니라는 점이다.
궁에서 태어나 궁에서 자라나지 않았다.
궁이란 공간에서 삶을 시작하고 그 삶을 진행한 인간들이 가진
저 기형성과 편벽함,
그리고 그 기형성과 편벽함을 미처 의식하지도 못하는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사유가 애초에 차단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래서 혜빈이 묘사하는 궁 안의 모습은
어떤 의미에선 제3자적인 면이 없지 않다.
비록 자기가 소속된 집단이고
앞으로도 영원히 자기가 소속될 집단이지만,
그러나 십세에 궁안에 들어가
28세에 임오화변을 당하기까지의 혜빈은
아직은 궐 안의 가치관에 속속들이 길들여진 인물은 아니다.
시집 문화에 점차로 동화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기였던 것이다.
물론, 기록을 할 무렵엔 전형적인 왕가의 여인네가 되어 있었겠지만
그래도 회고록에서는
처음 그 시선을 되찾고 있는 듯 하다.
낯선 궁 안에 들어온 어린 소녀의 눈에 비친
세자나 영조,그리고 중궁전과 대비전,
그밖의 시누이들에 해당되는 옹주들,
나인이나 내관들에 대한 묘사가
너무나도 생생하면서 신선하다.
우리는 밖에서가 아니라
바로 궁궐 안에서 혜빈의 시선을 통하여
그 시대의 궁 안의 풍경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이 얼마나 진기한 체험인가!!
한중록을 통해서
난 수백년 전, 궁궐 안에서 살고 있던
인물들을 만난다.
소설이나 사극과는 다르다.
한 가지 사건을 두고
그 사건을 위해 존재하는 것 같은 인물들이 아니다.
한중록 안의 인물들은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다.
그들이 입밖에 내는 말은
작가가 상상해서 쓴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의 입에서 나온 말들이다.
그것이 한중록이 가진 가장 큰 가치이다.
적어도 내겐 그러하다.
한중록에서 주목할 만한 점이 몇 가지 있는데
그 첫째가 그 당시 궐 안에 살고 있던 인물들이요
둘째가 그 당시의 사건들의 배경이 되는 창경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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