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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훈/마왕

마왕 20부-오승하와 유기농형의 통화

모놀로그 2011. 9. 26. 12:09

마왕을 1회부터 20부까지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면

오승하의 복수극이

강동현의 죽음을 끝으로 막을 내렸음이 확실함에도

여전히 이상할 정도로 정적이라는 걸

느낄 수가 있을 것이다.

복수극 특유의 마지막 에너지의 분출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박하사탕을 힘없이 놓아버린 오승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비극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걸

막고 있다.

그는 시종일관 너무나 고고한 침묵에 휩싸여 있다.

 

 

우리는 마음 편하게 그를 동정하고

아파하기가 매우 불편하다.

그는 나약해진 모습을 수없이 보여주면서도

막상 다가가려는 우리를 밀어낸다.

 

 

 

그런 와중에

유기농형과의 통화 장면이 불쑥 끼어든다.

 

거기서 난 예기치 못한 충격파에 휘청한다.

 

그 장면에서

오승하와의 거리감을 유지한 채로

커뮤니케이션을 주고받게 되는데,

이번엔 내가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

두려워서 발을 빼는 형국이다.

한 마디로 차마 눈뜨고 보기 힘든 장면인 것이다.

 

그토록 고고한 척 하던 오승하의

내면이 갑자기 너무나 적나라하게 들여다보이기 때문에

당황스럽다.

 

 

그 전에

그는 해인의 집을 방문하여

오르골을 전달한다.

 

그것은,

해인의 편지에 대한 화답 같다.

 

'그럴 수 있을까요? 그래도 되는 건가요?'

라던 쓸쓸한 자문에 대한 자답이기도 하다.

 

 

승희도 해인도 하다못해 사무장처럼

자기를 위해 아파하는 사람들은 모조리 피한

오승하가

마지막으로 찾는 사람이

바로 유기농형이다.

 

뭐 단순히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도 있지만

내겐 그렇게 생각되지가 않는다.

 

 

어떤 의미에선

그와 통화를 하는 건

해인의 편지와 연결된다.

 

그에겐 그야말로

뼛속까지 고통스러운 일일 수 있다.

 

왜냐면 유기농형은 극중 인물 중

가장 오승하와 가까우면서도

동시에 오승하를 전혀 모르는 유일한 인물이기에

무심하게 오승하의 가장 약한 곳을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과연,

그는 해인의 편지에 쓰여있는 글을

보다 생생하게 오승하에게 전달한다.

 

하지만

유기농형을 굳이 찾은 오승하의 심정을

알 것도 같다.

 

그는 오승하를 모르기에

섣부른 위로나 충고, 의미 없는 설교를 하지 않을

사람이다.

 

유기농형에겐 인생이 너무나 단순하고 명쾌하다.

또한 파괴적 삶을 살았던

오승하가 유일하게 건강한 생활인으로 만들어낸 인물이기도 하다.

그가 만들어낸 실패작인 김영철과 대비된다.

 

터질듯한 생활력과 분주하고 일상적인 활기가

나에게 더 절절하게 전해지고,

나를 거쳐서 승하에게 가는 것 같다.

아니 그렇게 걸러져서 그에게 가길 바라는 내 마음인가?

 

유기농형에겐 승하와의 통화는

밤길을 힘차게 달리는 트럭의 넓은 차창 앞에

끝없이 펼쳐진 그의 생활의 일부일 뿐이다.

 

유기농형에게

그 길은 아마 절대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신념을 주고 있을 것이다.

 

이제 아무런 신념도 없어진 승하에게

그런 유기농형의 단순하고 명쾌한 세계는

상처가 되었을까?

위로가 되었을까?

 

어쩌면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없게 된 승하는

유기농형과의 통화를 통해

잠시 정서적 안정을 누리지 않았을까?

 

겉으론 여전히 태연한 척 하고 있지만

이제 그도 정말 두려워진 건 아닐까?

 

하지만,

만일 그렇다면 승하는 잠시 자신의 사무실을 떠들썩하게

채웠던 유기농형의 목소리가 사라진 후에

그 바람에 더욱 더 괴괴하게 가라앉는 주변의 서늘한 침묵 속에서

모든 것이

두 배의 무게로 덮쳐오는 걸 느꼈을 것이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고,

그것들을 감당하기 위한 준비를 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표정이 어떠한지,

눈가에 스며든 돌이킬 수 없는 외로움이

얼마나 처연한지

그 순간에 전혀 알지 못했을 것이다.

 

 

 

어둠이 깊어가는 텅빈 사무실에

꼿꼿한 자세로 앉아서

기다리는 자신의 어깨가

 

일찌기 16세 소년의 뒷모습처럼

너무나 힘들어보인다는 걸

그는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그런 그를 지켜보는 내가

더욱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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