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마왕 17부- 정태성의 눈물과 소주잔 본문
승하는 일찌기 사무장에게
'술 한 잔 하실래요?"
라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날은 어머니의 기일이었고,
그가 사무장과 술 한잔을 나누었던 순간에
그의 심판은 시작되었다.
그는 어머니 영전에 술 한 잔 올리는 대신에,
권변의 죽음을 바쳤고, 권변의 빈소에서 절을 올리고 박하 사탕을 올려놓았을 때,
그건 권변의 빈소에 절을 한 것이 아니라
어머니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다.
그날, 사무장과 술 한 잔을 한 줄 알았는데,
승하는 마시지 않았음을 우린 알게 된다.
그러니까, 어머니의 기일이자, 그의 심판이 시작되었던 그날밤,
승하는 막상 술을 마시지 않았던 것이다.
승하가 두번째로 사무장에게
'술 한잔' 을 제안한다.
사무장은 술을 마실 줄 모르는 줄 알았다고 하지만,
그는 그렇지 않았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가방을 내던지고 제일 먼저
냉장고에서 맥주부터 꺼내 마시는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그는 갈증을 느끼는 것처럼
맥주를 마시곤 했다.
종일, 오승하의 옷을 입고, 자신을 억누르며 연기를 해야했으니
목도 말랐으리라.
하지만 우리에게도 그가 술을 마시는 모습은 잘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불을 켜지 않았다.
냉장고가 열리면 잠깐 주변이 밝아졌다가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냉장고에 비춰진 이지러진 얼굴을 희끄무레하게 볼 수가 있었다.
그는 우리와 함께 냉장고에 비추어진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곤 했었다.
어둠 속에서 물끄러미 거울도 아닌, 냉장고에 반사된 자기 얼굴을
들여다보는 오승하는 그 메마른 눈빛과 삭막하고 지친 표정으로
그가 얼마나 하루하루 각박하게 살고 있는지,
그래서 집에 오자마자 맥주 한 캔을 허겁지겁 들이마시는 시간이
그에겐 잠시나마 숨을 쉴 수 있는 때라는 걸 알 수가 있었다.
그러던 승하가
다시금 사무장에게
'술 한 잔'을 제안하는 것이다.
아..놀랍게도 승하는 어느 선술집에 앉아서 소주를 마시고 있다.
어두운 자기 소굴이 아니라,
사람들 속에 섞여 있다.
사무장은 신기한 듯 그를 바라본다.
우리도 신기하게 오승하를 바라본다.
오수와의 정면 대결의 후유증은 드디어 선술집까지
승하를 진출케한 것이다.
그 대결로 인해 오수가 점점 더 고통의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다면
승하는 혼란과 원망 사이에 소주잔을 놓고 있다.
절대로 버릴 수 없는 아집에 에워싸여 살아온 세월과,
그 안에서의 자신의 모습, 그리고 생활들..
그러면서 그가 상실한 것들..
그것과 자신의 원망의 거리를 재며
그는 착잡하고 허전하며 울적해보인다.
사무장에겐 그런 승하가 신기해보인다.
언제나 반듯하고, 절제되어 있으며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냉철했던,
그래서 도무지가 인간 같지 않았던 승하의 나약한 모습이
놀랍기도하고, 반갑기도 한 얼굴이다.
그러니까..너도 결국 인간이었구나?
라는 듯.
아닌게 아니라
승하는
'난 인간답지 않나요?"
라고 씁쓸하게 되묻는다.
거울을 보셈
하고 말해주고 싶다.
오승하, 당신은 인간이 당연히 아니지.
아니 아니었지.
그러던 당신이 점점 인간이 되어가고 있지.
요괴인간이라는 만화가 있다.
거기에 이런 말이 나온다.
'나도 인간이 되고 싶다~~으'
승하에게서 인간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냉철하고 빈틈을 보이지 않던 남자가
갑자기 흐트러지며 빈구석을 보이면
미치게 사랑스러우면서 가슴이 저리는 법이다.
누구에겐, 악역답지 않게 웬 청승?
할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누차 말했듯 오승하라는 캐릭터를 이해하지 못하기에 나오는 소리고,
지금 승하는 냉동 상태에 있던 심장이 조금씩 해동되는 중이다.
해동되면서 흘러내려 그의 발밑에 고이는 건
그의 눈물이다.
그가 마시는 건 소주가 아니라, 눈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처럼 독기에 차서 마시고 있지 않다.
인생엔 이면도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소년처럼 그는 당혹스럽다.
하지만 그건 아주 바람직한 현상이다.
아직도 한 가닥 떨치지 못하는 망설임에 못을 박듯이
사무장은 부드럽게 그를 어루만진다.
강오수를 얘기하며
정태성을 생각하고 있다.
둘 다 너무 어린 나이에,
너무 험한 일을 당한 소년들에게 그가 보내는 동정과 위로는
승하를 무장해제시키고 있다.
그는 술잔을 만지작거린다.
자기가 집요하게 추구해왔던 고집스런 이데올로기가
실은 오류 투성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그는 혼란스럽다.
왜냐면,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버리면
그의 손은 텅 비기 때문인다.
오승하로서 존재할 이유조차 사라지기 때문이다.
힘겹게 완성한 설계도가
애당초 잘못되었다면
그는 대체 어떻게 하야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가 건너뛴 사춘기 소년 시절에 한번쯤 거쳤어야할
그런 시련을 이제라도 받아들인다면
그게 그에겐 구원의 실마리가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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