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궁 12부- 신군과 율군 본문
채경은 그날도 신군이 펜싱을 마치고 올 시간을 겨냥해서
그를 마중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그 즈음의 채경은 작정하고 신군에게 다가가기 위해
나름 필사적이다.
그 덕분에 그날밤,
복도에서 마주친 신군과 율군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하지만,
과연 채경이 그들의 대화 이면의 불꽃튀는 대결을 이해했을까 싶다.
왜냐면
그들이 그런 대화를 나누는 이유가, 긍극적으론
자기 자신이라는 걸 채경이 전혀, 네버, 꿈에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난 저 장면을 매우 좋아한다.
궁이 자랑하는 독특한 미장센이 두드러진다.
또한 겨우 19세에 불과하지만
황족이라는 이유로 정치적으로는 노성한 두 왕자가,
채경이라는 아이를 의식의 중심에 두고
치열하게 맞서고 있다.
난 솔직히 이때 이들의 우회적인 대화의 묘미보단,
이 장면 자체가 더 매혹적이다.
조명이며, 카메라의 위치,
적절한 클로즈업이
그들이 입으로 주고받는 말보단,
눈으로 주고받는 또다른 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들의 대화는 표면적으론
황태자와 서열 2위의 왕자가
보다 바람직한 황실의 앞날에 대해서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는 듯이 보인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주고받는 시선은 불꽃이 튀긴다.
왜??
신군은 황제 자리에 별로 뜻이 없고,
그렇다고 율군이 자기 엄마처럼 절실하게 황제 자리가 탐이 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저 순간 염두에 두고 있는 건
실제로 황제 자리가 아니다.
너의 엄마는 널 황제자리에 올려놓으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고,
나의 엄마 또한 그러하다.
그런데 막상 우린 어떤가
난 황제에 별 뜻이 없는데,
넌 어떠니?
니가 완전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주변을 맴도는 이유는 뭐니?
넌 황제 자리가 탐이 나는거니
아니면..다른 것을 원하는거니?
난 원한다면 기꺼이 황태자 자리며, 황제 자리를
내어줄 용의가 있다.
그토록 원하다면 가져가라.
난 미련 없으니..
하지만 그 전에 난 알아야겠다.
니 엄마는 그렇다치고
넌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니?
니가 황제 자리 주변을 맴돌면서
자꾸 넘보는 이유는
궁밖으로 내쳐져서 보내야했던 세월에 대한 보상을 원하기 때문이니?
아니면..혹시..???
그러자
율군은 대답한다.
궁밖으로 내쳐졌던 것은 물론 나에겐 견디기 힘든 상실의 세월이었지.
하지만 다시 돌아와서
비로소 내가 상실한 것이 무엇인가를 직접 몸으로 느끼기 전까진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었어.
내가 만일 황제 자리를 원한다면
그건 욕망이 아니라,
당연히 내가 가져야할 것들을 되찾는 것일뿐이야.
넌 내것들을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가져가선 그것들을 함부로 대하고 있어.
그것이 내겐 참기 어려워.
그래서 그것들을 소중하게 여겨줄 수 있는
내가 가져야겠다.
너같은 이기적이고 차갑고 건방진 놈이
조금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고 있는 그것들을
난 얼마든지 아껴줄 수 있으니까.
그것들의 가치를 내가 되찾아줄까 해
신군은 과연 놀란다.
그건 낙마 사건때
'그 녀석만은 안되...
안된다고..'
라고 혼잣말을 했던 것과 맥락을 함께 하는 것 같다.
결국 율에게 황태자 자리를 돌려줄 마음을 가지고 있는
신군으로선,
그가 황태자 내지 황제가 되면 어떤 행동을 할 것인가에 대해서
알고 싶었을 것인데,
물론, 그것은 채경이라는 존재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데
율군이 자기가 돌려받을 것의 목록을
작성한다면, 그 안에 채경이라는 존재가 들어 있음을
확인한 셈이다.
아니 율군은 그걸 신군에게 뚜렷하게 밝히고 있다.
채경이를 좋아하고 있으며,
그녀를 돌려받기 위해서라도
난 황제가 되야겠다는 생각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걸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과연 신군은 어떻게 해야 좋을까?
황태자자리에서 물러나고,
채경을 자유롭게 놓아주려는
결심을 이행해도 되는 것일까?
율군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신군의 얼굴은
굳어가고 있다.
그들의 대화를 엿들은 채경은
투덜댄다.
채경에겐 그저 황제 자리를 놓고 두 왕자가 신경전을 벌이는 걸로 보인다.
신군이 별 뜻이 없는 건 알고 있는데,
뜻밖에도 율군이 무심하지 않다는 것이 채경에겐 실망스럽다.
가뜩이나 궁 안의 기색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이
궁녀들의 속삭임으로 느껴지는데,
율군이 실제로 황제 자리에 뜻이 있다는 것이
그녀에겐 어쩐지 배신감이 느껴지는 것 같다.
율군과 신군에겐 채경의 그런 순진함이
오히려 걸림돌이다.
궁이란 곳이 그렇게
그저 노력만하면 그 결과가 주어지는 학교처럼
만만하고 단순한 곳이 아닌 것을
채경에게 이해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더우기
그런 채경이 태풍의 눈처럼 황제 쟁탈전의 핵심에 놓여져 있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어떻든 이 장면은,
궁에서 가장 멋진 장면 중 하나이며,
이때의 신군은 또다른 매력을 물씬 풍기고 있으며,
나긋나릇한 목소리로 자신의 단호한 의지를 밝히는
율군 또한 전율적이다.
'주지훈 > 궁' 카테고리의 다른 글
궁 12부- 궁과 신군 (6) (0) | 2011.02.11 |
---|---|
궁 12부- 궁과 신군 (5) (0) | 2011.02.11 |
궁 12부- 궁의 어느날 밤 (0) | 2011.02.11 |
궁 12부- 궁과 신군 (4) (0) | 2011.02.11 |
궁 12부- 채경의 마음VS신군의 마음 (0) | 2011.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