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본문
어셔가의 몰락이라는 에드가 앨런 포우의 소설이 있다.
그의 소설들이 대개 그렇지만,
추리 소설의 성격을 지니고 있지만,
그보단 천재의 이상 성격이 반영된,
아니
그보단 천재적인 두뇌가 집요하게 노려보는
어떤 병적이면서도 비현실적이고 피폐한 세계를
가장 극명하게 표현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포우의 작품은
어렸을 때 자주 접했기에
사실 지금은 기억나는 게 별로 없다.
하지만 천재들이 가끔 보여주는 편집적인 세계를
가장 잘 느끼게 해준
어셔가의 몰락이란 작품은
어린 시절의 내겐
굉장한 충격을 주었고,
난 거의 공포마저 느꼈으며
그 강렬함이
지금까지 트라우마처럼 날 지배한다.
오래 전에 읽은 소설이라
잘 기억이 안나면서도
한편으론
어떤 그림처럼 뇌리 한 구석에 뚜렷하게 박혀 있다.
마치
어셔란 인물을 실제로 내 눈으로 보기라도 한 것처럼..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난 제일 먼저
어셔를 떠올렸던 것이다.
그 이유가 뭘까..
난 직접 눈으로 보기 전부터
그를 알고 있었다.
그는 날 볼 수 없었지만
난 그를 볼 수 있었으니까.
사진이나 움직이는 화면을 통해서 보는 거라지만
어떻든
난 그를 보고
그의 음성을 듣고
그렇게
부분적으로나마
그의 실체를 느끼고 있었다.
그게 그와 우리의 차이점이다.
그는 우리를 볼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우린 그를 볼 수 있다.
그는 처음엔
이미지로 내게 다가왔다.
그를 처음 봤을 때,
아니
그라는 사람의 존재를 처음 알고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물론 사진이었지만
난 잠시 그 사진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때의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건..
뭐랄까..
놀라움이었다.
어떤 놀라움이냐면,
오래 전에 헤어진 사람,
아니
생의 어느 순간에
헤어진 사람과 재회한 기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생이란,
지금 현세만을 말하는 건 아니다.
무수하게 되풀이된
영겁의 세월 속에서
내가 받았다가 빼앗겼다가
다시 받는 것을 되풀이하는 동안에
그는
그 생의 한 가운데에서
내게 되돌아온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낯이 익었고,
기억에 남아 잇고,
그래서
충격을 주었다.
난 마치 자석에 이끌리듯
그에게 다가갔다.
난 그의 음성도 들었다.
그의 음성도
귀에 설지 않았다.
많이 들어본 듯한 음성에
기분좋게 귀에 울리는 말투,
그 모든게
날 편안하게 하면서
그에게 돌아가고 싶게 만들었다.
그게 시작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난 실제로 그를 내 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본 그는,
전혀 달랐던 것이다.
그는
어셔가의 몰락이란 소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그는
귀족적이었다.
새까만 머리가
너무나 섬세한 귓불과 목선을,
그리고 목덜미를 따라
물결치고 잇었다.
그의 얼굴은
하얗다 못해
창백했는데,
아마 그래서
어셔가의 몰락을 떠올렸을까?
아니다.
꼭 그것만은 아니다.
그는
만지면 부서질 것만 같은,
바로 눈앞에 잇는데도
실체감이 없는,
도무지
살아 있는 사람이란 느낌이 들지 않는
아득함을 주었다.
분명 내 앞에 앉아서
다른 사람들처럼
말하고, 웃고, 뭔가를 먹고,
그렇게
인간이 흔히 하는 행동을 하고 있는데
그것조차
그가 하니까
뭔지 이상했다.
그는 비현설적이었고,
너무나 가냘프고
너무나 섬세하고
무엇보다
건강하게 보이지 않았다.
남자라는 느낌도 없었다.
그대로
유리상자 안에 넣으면
이쁜 인형은 되겠지만,
남자라는 느낌도,
살아 숨쉬는
이 시대의 그렇고 그런 인간들 중 하나라는 느낌도
주지 않았다.
난 그가 너무 신기했다.
세상에 어떻게 저런 인간이 존재하지?
실제로
그의 생활은
너무나 이상했다.
그는 거의 식사를 하지 않는다고 햇다.
대신에
약을 많이 먹는 것 같았다.
그것도 진통제같은 것을..
그는 외로움에 지쳐서 시들어버린 가녀린 꽃같았다.
혼자서
허공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운 작업을 되풀이하며
죽어가는
아름다운 조각 같았다.
난 그가 무서웠고,
그러면서
서러울 정도로 아름다운
그 비현실적인 모습이
섬뜩했다.
그 모든 느낌은
내게
어셔가의 몰락이라는 소설을 연상시킨 것이다.
물론,
그라는 사람이
바로 어셔라는 인물이 내게 남긴
느낌과 비슷하기도 했지만,
그토록
그는
어느 순간에
풀썩 스러지면서
그 자리에서
금빛 모래가 되어
바람 속으로
덧없이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던 것이다.
난 왜 그런 느낌을 받았는지 모르겠다.
언제나 그렇듯이
내 느낌은
너무나 주관적이고, 찰나적이고,
그래서
들어맞지 않는다.
왜냐면
결국
그도 그냥 평범한 사람이니까.
소설 속에 나오는
몰락한 귀족이 아닌,
그냥 평범한 이 시대의 남자니까.
하지만,
내가 내 눈으로 본 그 사람은,
남자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그냥
뭔지 모를
이상한 존재였다.
난 뒷좌석에 앉아서
가끔 내 앞에 앉아
뒷모습밖엔 볼 수 없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긴 시간을 달리는 차안에서
거의 한번도
움직이지 않고
단정하게 앉아 잇었다.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뒤척이고
누웠다 앉았다
창을 열었다
닫았다
졸다가 깨다가
온갖 주접을 떠는
참을성 없고
진득하지 못한 나와는 다르게
그는
몇 시간을
단정하게 앉아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볼 수 있는 건
바로 그 잘생긴 머리통을 감싼
검은 머리와,
그 검은 머리가
구렛나루처럼
흐르는 듯 아름다운 선을 따라
옆으로 흘러내린 모습이다.
난 그것도 신기했다.
저런 뒷모습을 가진 인간이 세상에 어딨담?
그 차안엔
그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대개 비슷하다.
이상한 점도 없고,
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는
많은 사람들과
비슷하다.
그래서
그들은 인간 같고,
남자 같고,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
그들은
그냥 무심하게 있는 듯 없는 듯
자리를 메우고 잇으면 된다.
그런데
그는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다른 사람과 같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키가 작았고,
굉장히 갸날파서
더욱 더
어셔가의 몰락을 떠올리게 햇다.
하얗다 못해 창백한 얼굴에,
까만 눈,
얇은 입술,
세련된 옷맵시에,
명품 구두,
그런 옷차림은
차라리
날 안심시킨다.
왜냐면
그건
그가 인간이라는 증거니까.
게다가 최고급품들이라는 점에서
또한
그가
돈많은 인간이고,
최고가 아니면
몸에 걸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인간이라는 점에서
날 안심시키긴 한다.
그렇다.
저렇게 이상하게 생겼지만
그래도
인간임에 틀림없다.
어셔가의 몰락에 나오는 인물처럼
병적이지만,
그래도
어떻든
현실적인 인간임에 틀림없다.
난 그렇게
나에게 타일렀다.
난 그를
차안에서 그리고
휴게실에서 본 게 전부이다.
이후론
난 혼자 돌아다니며
일행과는 어울리지 않아서
그 모임에서 간 여행에서
떨어져 나왔던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그에게 받은 그 비현실적인 느낌을
오랫동안 간직했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여리고
연약하고
감성적이고
수줍고,
그러면서
인형같은 느낌을 주는
이상한 남자.
그릇된
그 첫느낌을
난 오랫동안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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