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먼길 (1) ─명랑 고아 정우식의 거래 인생─ 본문

이병헌/그의작품들

먼길 (1) ─명랑 고아 정우식의 거래 인생─

모놀로그 2010. 6. 6. 15:20

 



먼길은 설특집극이었다.
따라서 가족이 그 주제를 이루고 있으며
여러가지 면에서
그런 종류의 드라마가 가는 길을 착실하게 뒤따르고 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내가 먼길에서 주목한 것은
가족이라는 큰 주제며
그 형식이라기보단
정우식이란 인물이다.

작가가 의도했건 안했건
내겐 그가 의미심장하게 보이고
의문을 가지게 했다는 점에서
이런 종류의 흔해빠지고 구태의연한 특집극에도 불구하고
매우 흥미롭게 본 단막극이라 할 수 있다.






정우식은 고아원 출신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엄마가 고아원에 버리고 도망쳤다고 한다.
그의 말에 의하면 중3때 고아원을 나왔다고 하니
어쩌면 학력도 그 정도일지도 모른다.
직업은 배달원..

그는 태풍처럼
자기도 가족이 있다고
벅벅 우기면서
보태주는 것도 없는 주제에
일마다 끼어드는 허풍 고아도 아니요

황준호처럼
열등감에 쩔어서 고아라는 낙인을 심장에 달고 사는 것도 아니며

장홍표처럼 성난 황소마냥 손댈 수 없이 이리저리 치받고 다니는
불량 고아도 아니고

그렇다고
김준호처럼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과묵하고 까다로운 성미도 아니다.

그는 좋게 말하면 건전하고 밝게 살아가는 철저한 생활인이요,
얼핏 보기엔 낙천적이고 하루하루 만족해하며 사는
바람직한 청년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도무지가 감정이라곤 없어 보이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고아라면 어딘지 드리워져 있어야할 그늘진 구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고아라고 해서
모두  이마에 도장을 찍고 망가져서 살라는 법은 없다.

하지만
내게는 우식의 지나칠 정도의 현실적이고 무신경해보이는 삶의 방식이
망가짐의 또다른 형태로 보이며, 따라서 바람직해보이기보단
차라리 비정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가 아무리 자기가 자란 고아원에
떄마다 선물을 사서 그것도 개개인에게 일일히 이름을 적어서
보내줄 정도의 깊은 배려를 할 정도로
정많고 따뜻한 일면이 있다 해도
그건 평소 그가 사회와 맺고 있는 현실적 삶과는 아무런
연결 고리가 없다.
물론 그의 참모습은 고아원에 보내는 그 마음일 것이다.

확실히 그는 인정많고
섬세하게 배려할 줄도 알고
마음도 넓으며
세상에 대해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난 컴플렉스가 없는 사람이나
감성이 극도로 매말랐거나 혹은 깊숙히 숨어버려서
희노애락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은 정상이 아니라고 본다.

정우식이 고아라면 당연히
그의 내면엔 뭔가 결핍과 애증과 원망과 그리움이 도사리고 있어야
정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정우식에겐 그런 것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열심히 일하고
항상 바쁘게 살며 늘 웃고 있는 데다가
식사할 때는 고아원에서 배운 감사기도문을
잊지 않고 되뇌이며

고아원 시절의 얘기를 농담삼아 할 만큼
속이 좋은건지 태생이 무신경한 건지 아니면
극도로 정서가 잠겨 있는 건지 알 수 없는 인물이다.

그래서 난 정우식에게 주목했다.


어떤 글에서 난 사람 냄새가 나는 정우식이라는
표현을 읽었다.

그러나 위에 열거한 이유들로 해서
난 오히려  이 드라마에서 가장 인간미가 부족한 인물은
정우식이라는 생각을 했다.

고아라는 이유로 비딱하게 세상을 보는 대신에
겉보기에 밝고 생활력 강하고 견강하게 사는 듯 하지만
실은 그는 생활이나 사고체계는 거래로 이루어진다.

내가 그의 그런 생활 방식에서
고아라는 이유로 세상을 원망하며
밑바닥을 기어다니는 타락 고아보다
더한 비정함을 느끼게 된 이유이다.

극중 전반부에서 그는 항상 웃고 있는데
그것이 밝은 모습으로 보일수도 있지만
항상 울고 있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이
그다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의 처지로 비추어볼 때 말이다.


거래를 해보고 조건이 맞지 않으면
가차 없이 돌아서는 단순하고도 냉정한 생활 방식이
평소 그가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아니
그는 그런 식으로 사회와 관련을 맺는 것 이상은
무의식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듯이 보이며
그것은 역시 그의 내부 깊숙히에 가라 앉아 있는 아픔을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지만 그런 식의 삶의 방식으로
철저하게 자기 방어를 하며 더이상의 상처를 거부하는 게 아닐까?









내가 가장 인상적인 장면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설날 방구석에서 혼자 딩구는 그의 모습이다.

무지하게 바쁘게 움직이는 부지런한 청년 정우식,
막상 설날이 되니
고아인 그는 할 일이 없다.

찾아갈 사람도 없거니와 찾아주는 사람도 없다.
그럴 때
자기 처지를 비관하거나 쓸쓸한 나머지
술을 퍼마시고
신세 한탄을 한다면 차라리 인간적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평소 활동적으로 살아온 만큼
견디기 힘들 정도로 무료할 뿐 아니라
실은 굉장히 고독하고 서러워야 마땅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선 그런 것을 찾아볼 수가 없다.

만화책을 뒤적이고 사탕을 씹으면서
무표정하게 방바닥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그의 모습은
그가 어떻게 살아왔으며
그의 정신 세계가 얼마나 황폐하고 건조한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고독을 느끼지도 못하고
외로움이나 서러움도 느끼지 못한다.

아니..아마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것을 외면하고 있을 것이다.

텅빈 방구석에서 청승을 떠는 대신에 그는
역으로 뛰쳐 나간다.

자기가 평소 몰고 다니는 배달용 봉고차로
귀성객을 상대로 한
불법 영업을 하려는 것이다.

돈도 벌고 여행도 하면서 혼자 지내는 지루한 시간을
때우려는 발상이지만

근본적으로 그는 역시 귀성객을 상대로 거래를 하고 있다.
선주와의 관계도 거래로 시작된다.

마치 거래를 할 때만 삶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듯 하다.


선주와의 첫 대면은 그 이전에 우체국에서 시작된다.
선주는 우체국 직원..
고아원에 보내는 선물 문제로 선주와 티격태격한다.








애인이 찾아와서 기다리고 있는 바람에
마음이 급한 선주 앞에
입이 딱 벌어지게 많은 선물 보따리를 풀어놓고
주소가 같은 선물을 하나하나 수취인에게 직접
보내달라는 우식의 주문에 황당해하는 선주..

그러나 애인이 우체국에서 나감과 동시에
우식이 선물 보따리를 안고 우체국으로 들어서는 것은
이제
선주의 작은 세계 속에서
애인은 퇴장하고
우식이란 인물이 새롭게 등장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마음은 급한데
수많은 선물을 일일히 처리하는 것이
귀찮은 마음에 한 박스에 담아 보내라는 선주에게
우식은
배급이 아니라 선물이라고 대꾸한다.

근본적으론
정많고 섬세한 우식의 일면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혹은 고아원 시절
선물이랍시고 한 박스에 무더기로 쑤셔넣은 물품을
배급받듯이 하나씩 받아가야했던 기억이 있는지도 모른다.

어쩄거나  선주는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애인에게만 맘이 가 있어서
그 손님이 짜증날 뿐이다.

그 애인으로 말하자면
선주가 우체국에서 일하는 동안 스키장으로 놀러가서
며칠씩 연락이 없는 상태였다가 겨우 나타났으니
선주 맘이 급할 만도 하다.

설에 같이 집에 내려가기로 약속한 애인을
기차표까지 사놓고 눈빠지게 기다렸는데
막상 그 넘은
뺀질거리며 뒤늦게 나타나서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선주를 벙찌게 만든다.
그럴 것이 집에선 아버지가 눈이 짓무를 정도로
사윗감을 기다리고 있으니...





두 사람의 싱갱이 장면과 매정하게 돌아서는 뺀질이 남자,
그리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아 울어버리는 선주,
그 모든 광경을 우연히 우식은 목격하는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씨익~웃고 만다.
(그는 매사가 그런 식이다.)

그래도 울고 앉아 있는 여자가 보기에 그랬던지
말을 걸어본다.







얼핏 인정 있어 보일수도 있지만
주책스럽기도 하다.
방금 실연당해서 울고 있는 여자에게
한다는 소리가

"저 차 잡아줘요?"

남의 애정 문제에 그런 식으로 개입하는 사람이 어딨단 말인가?
척 보기만 해도 상황이 짐작갈텐데
마치 빚쟁이가 도망치는 것을 잡아주겠다는 듯한 말투는
무신경하고 건조한 우식의 정신 세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울면서 우체국으로 뛰어 들어가는 선주를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멀거니 돌아보는 표정에서
역시 그의 정서는 극도로 함몰되어 있음을
느낄 수가 있다.








설날의 청량리 역..

많은 사람들이 오가고
날씨는 춥다.

귀성객 나르기 영업이
거래 조건이 맞지 않아 허탕을 친 우식과
애인이 끝내 나타나지 않아서
기차를 그냥 떠나 보내고
길바닥에 주저 앉아 넋을 잃고 있는 선주..

그들은 그렇게 다시 만난다.
더없이 초라한 행색으로..







하려고 맘만 먹었다면 할 수도 있었던 귀성객 나르기를
인원이 맘에 차지 않아서 그냥 가달라고 애걸하던 손님을
굳이 거절하다가  얻어터지고
우두커니 앉아 있던 우식이
선주를 알아보고 반가와하는
모습에서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 도사린 외로움이
전해진다.

여전히 명랑한 모습이지만
처음으로 그에게서 인간적인 냄새가 조금 풍겼다.


귀성객나르기 불법 영업이 실패로 돌아갔을 뿐 아니라
얻어터지기까지 한 몰골을 하고도
우연히 만난 우체국 여직원을 보고 반가와하는
우식의 정신 세계가 난 더 신기하다.

나같으면 전혀 웃을 기분도 아니고
별로 아는 체 할 만한 상대도 아니니만큼
그냥 넘어갈 것 같은데..

우울함이 뭔지 좌절감이 뭔지 도통 모르는
단순 건전 씩씩 고아지만
그래도 역시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긴 했었나보다.

영업이 꼭 절실했다기보다
쓸쓸하고 지루한 명절을 보내는 방법으로
역에 나왔던 것이 아닐까?

그러다가 우연히
아는 얼굴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그는 기쁜 얼굴이 된다.


앞일이 암담한 선주는
우식의 아는 체에 반응이 없다.
선물보따리 얘길 듣고서야 상대가 누군지 알아차리긴 한 모양이지만
그것 뿐이다.

머쓱해진  우식은 그래도
줄기차게 말을 걸어보는데..
여전히 무신경하게 보이기도 하고

역시 외로운 맘에 그렇게라도
사람과 말을 나눠보고 싶은걸로도 보인다.
설이란
찾아갈 곳이나 찾아주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겐
정말 쓸쓸한 날이니까.

우식에겐 그나마 아는 얼굴을 만났다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반가운 일인 것이다.


내내 반응 없던 선주가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리자 한순간
당황하는 우식..
괜히 아는 체 했다가 우는 여자 그냥 놔두고 가버릴 수도 없고
난감하기 이를데 없다.






선주가 기차를 놓치고 울고 있는 것으로 오해한 우식은
그의 말에 따르자면
여자가 우는 것에 잠시 마음이 약해져서
단 한 명의 승객을 태우고
떠나기로 결심하는데..




거래엔 철저한 우식은 차비는 물론
선금으로 챙기는 것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실연당한 아픔과 실망하실 아버지
두 가지의 무거움 짐을 짊어지고 세상이 끝나버린 듯한
얼굴을 한 여자와의
재미 없는 긴 여행이 시작되는데...

우식 말마따나 여자가 우는 것에 잠시 마음이 약해진 것을
내내 후회하면서 갔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따분한 여행길이었다.

그러나 점심 때가 되자 선주는
애인과 귀향길에 먹기 위해 정성스레 쌌던 김밥을
우식에게 권하는데...




그 김밥을 받아드는 우식의 표정에 처음으로
어떤 종류의 감정이 어른거린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이쁜 여자가 직접 만든
김밥을 먹어본 적이 있었을까?

김밥뿐 아니라 젓가락까지 내미는 선주의 세심한 배려가
낯설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하고
난감하기도 한 우식이다.

왜냐면 여자가 손수 정성스레 싼 김밥은
그의 거래 내역에 없는 것이니까.........

어줍잖게 김밥을 받아들면서
선주를 바라보는 눈빛엔 신기함과 수줍음, 그리고 쑥스러움 등등
그에겐 익숙치 않은 감정들이 복잡하게 오락가락한다.





휴계소에서 함께 점심을 먹던 중
선주는 애인 대역을 그에게 부탁하고
새로운 거래가 다시 두 사람 사이에 성립되는데..


비로소 선주가 애인과 함께 고향에 가기로 약속했었고
고향에선 아버지가 눈빠지게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된 우식은
선주가 그토록 우울해하는 이유를 겨우 이해한 듯 하다.


물론 거래 대금은 선금으로 받아냈다.
양복까지 얻어 입는다.

배달원 정우식은 사라지고
제법 폼나는 선주의 애인 스포츠 매장 사장이라는 김기현이란 인물로
변장한 것이다.

새삼 서러워져서 눈으로 뒤덮인 산을 바라보며
선주가 한바탕 눈물 바람을 하는 동안
우식은 눈으로 장난을 치고 있다.

그러더니
울면 바보라는 둥
망태 할아버지가 잡아간다는 둥
하는 썰렁한 농담을 하고는 혼자 킥킥댄다.

그는 선주가 자길 버린 뺀질한 남자 떄문에
눈물콧물 짜는 것에
전혀 개의치 않는다.

난 그 광경에서 우식의 무신경함의 극치를 보는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미 너무나 큰 상처를 어린 나이에 받았던 우식에게
실연 따위는 대수롭지 않을 거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그런 그가
선주가 자기 아버지랑 전화 통화를 하는 것을 듣는 동안
잠시 표정이 어수선해진다.




가족이란 것,
아버지란 존재는 그에겐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아예 기억과 마음 속에서 지워버린 이름들이기에
갑자기 바로 곁에서 들려오는
부녀 간의 다정한 대화는
그에게 파장을 일으키는데..

여기서 다시 한번
그의 무신경해 보이기만 하던 얼굴에
한가닥 쓸쓸함이 살짝 스쳐간다.

어차피 심심하고 지루하고 할 일도 없고 찾아줄 사람도 찾아갈 사람도 없는
쓸쓸한 명절에 돈도 벌고 연극도 해보고
괜찮은 일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우식..


"내 이름은 정우식이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