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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훈/마왕

마왕 19부-당신이 사라질까봐...

모놀로그 2011. 7. 6. 00:44

'당신이 내 눈앞에서 사라질까봐 겁이 나서...
잠이 오지 않아요..'

해인의 이 대사는,

너무나 적나라하고 단순하게 정곡을 찌르고 있다.

 

그리고 마왕을 통틀어 가장 가슴 아픈 대사이다.

 

오승하라는 인간의 실존과, 해인과의 관계의 실체가

저 한 마디에 실려 있다.

그래서

이 말을 듣는 순간 승하의 얼굴이

격심한 통증으로 일그러진다.

 

그들은 아마 둘 다 알고 있는 모양이다.

오승하에겐 리얼리티가 없으니 이제 그 소임을 다하면

곧 재가 되어 사라질 것이며,

동시에 해인과의 관계의 실체는

어떤 의미에선 '망자와의 사랑'이었던 것이다.

 

마치 사랑하는 동안에는

잠시 삶이 허락되는

그러나 근원적으로는 다른 세상에 속해 있는

묘한 존재였음을

해인의 대사로 인해 난 확인받는다.

 

 

그 망자에게,

해인은 이제 죽음의 그늘을 완전히 벗어던지고

일상인이 되어달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 망자도 이미

지옥에서 벗어나

편안하고 따스한 세상으로 돌아오고 싶어진지

오래라는 걸 해인이 알고 있는지 모르겠다.

알고 있으면서 하는 말이라면

솔직히 잔인하다.

 

그는 파우스트처럼 영혼을 팔아버렸기에

그건 계약 위반이라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해인이 붙잡고 애걸하는 대상은,

그렇게 삶과 죽음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있지만

조만간 자기가 속한 세계로 귀환해야할 존재 아닌 존재인 것이다.

 

난 승하와 해인을 보면서,

사랑이라는 것은 인간이 무언가를 포기해야한다면

제일 먼저 버리게 되는, 버릴 수밖에 없는,  슬프고 아픈 생의 업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왜냐면 실은 놓아버리는 것일 뿐, 버리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삶의 기반이다.

 

일찌기,

포청천의 '천하제일장'에서 주인공은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은 살 가치가 없다'

고 말한다.

 

이것은 꼭 포청천에만 나오는 건 아닌,

만고불변의 진리이다.

 

하지만,

사랑과 인연은 좀 다른 것 같다.

 

승하는 해인을 사랑하지만

인연을 맺을 생각은 없기 때문이다.

아니 그럴 수가 없기 때문이다.

 

다모에선

사랑을 '인연'으로 표현한다.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는 사랑은,

실은 실존하지 않는 사랑이다.

그냥 사랑이라는 이름의

그림자일 뿐이다.

 

그리고 승하의 '사랑'이 바로 그러하다.

그래서 그는 그 '사랑'에

자기 자신을 바칠 수가 없다.

 

그는 그 누구와도 현실적인 인연을 맺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해인도 그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일찌기 드라마 사상,

가장 독특하고 가슴 아픈 사랑이

마왕에서의 승하와 해인의 사랑이 아닌가 싶다.

 

돌이켜보면,

오승하가 극 초반 도서관을 찾아 해인에게
세상사에 밝고 능숙하고 원숙한 남자인 척 접근할 때마다
언제나
그것이 그에겐 얼마나 힘든 일인지,
고통스럽고
쓸쓸한 일인가를 보여주는
장면이 따라다닌다.

첫대면,

자신 있는 미소와 함께 그녀에게 악수를 청하던 승하는,
세련되고 도회적인 이 시대 최고의 엘리트 변호사다운
모습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가 지었던 미소는 간데 없고,
그의 껍질도 녹아버린 듯 사라지고,

오갈 데 없는 사람처럼
쏟아지는 비를 바라보고 하염없이 서 있는 걸로
그의 앞선 모습이
가식임을 보여준다.

그 다음엔
'인격과 전이'라는
제목만 들어도 별로 읽고 싶지 않은 책 제목으로
그녀를 유인한 후에
수선화에 대한 천진하고도 씁쓸한 멘트를 수수께끼처럼 남기고
돌아선 그는

빛속을 무표정하고 우수에 차서 걷는 것으로
또한번
그녀 앞에서의 당당하고 세련된 껍질이 거짓임을 느끼게 한다.

이렇듯 어딘지 모르게 초현실적인 한장 한장의 그림 같이

실체감이 없으면서,
이중적인 모습으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던
승하는 차츰
그녀에게 마음이 쏠리면서
적어도 그녀 앞에선
살아 있는 사람 같은 느낌을 주기 시작한다.

해인과 함께 있을 때의 그는
초현실적인 그림 속의
수천개의 이미지를 가진
고독한 군상이 아니라,
그냥 젊고 매력있는 남자이다.

그녀에게 남자다운 욕망을 느끼면서는
더욱 그녀 앞에선 실체가 뚜렷해진다.

 

사랑이라는 것이

절대로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로 이어지는 인연의 다리임을 알게 해준다.

그리고 인간의 삶에서 사랑은

그토록 현실적이다.

그래서 승하도 자기도 모르게 삶 속을 드나든다.

그러나

그녀가 막상 정태성으로서의 오승하와

교감을 하고자 했을 때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오승하는 다시 숨어버렸다.

단단한 껍질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하긴, 그 껍질은 이미 별로 믿을 만한 요새도 아니지만,

 

그래서 오승하 변호사라는,

분명히 자기 앞에 있는데도 어쩐지 관념적이어서

접근하기 힘들던 인물이 정태성임을 알게 된 해인은 이제 불안해진다.

왜냐면 실체를 알고 난 후의 오승하, 아닌 정태성은

해인에겐
만지면 바스라질 것만 같은 존재가 되버렸기 때문이다.

그가 그동안 왜 자기에게 그런 느낌들을 주었는지
확실하게 알고 난 이후이기에 더욱 그렇다.

냉동된 인간을 빛 속에 놔두면 어떻게 될까?

영화에서 흔히 보듯이
순식간에
형체가 허물어지며
급기야는 냉동되지 않았다면
그렇게 되었을 본래의 모습,
인간의 형체를 잃은 모습으로 돌아가고
이어서 곧바로 먼지가 되어
허공 속으로 스러진다.

정태성이 그러하다.

그녀도 알고 있다.
그가 이미 12년 전에 죽었음을.

그럼에도
지금까지 육신이 버티고 있는 것이
바로 그의 원한과 분노와 복수심임을..

그래서 그 원한과 분노와 복수심을 버리는 순간
그는 재가 되서 날아갈 것임을...

그녀는 뻔히 알고 있다.
그가 머지않아 자신의 눈앞에서 재가 되서 사라질 것이라는 것을.

그래서 그녀는 떼를 쓰고 있다.

 

'당신이 내 앞에서 사라질까봐 너무 무서워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이건 사랑의 고백이다.

 

원한을 버리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그대로 먼지가 되서 날아가버릴 것을

알면서도 떼를 쓰고 있다.

 

재가 되서 날아가지 말고
지금 그 모습 그대로
내 옆에 있어 달라고.

분노도, 원통함도, 복수심도 버리고
그 모습도 잃지 않고,
실체도 보존한채로
자기 곁에 있어달라고 억지를 부린다.

 

원한을 버리는 대신에

서해인을 사랑하는 정태성이 되면

살아갈 수 있지 않느냐고 우기는 것이다.

 

원한을 지니면 어둠 속에서 홀로 불행하지만,

사랑을 가지고 빛으로 나오면

자기가 옆에 있어줄테니

행복해질 수 있다고 우긴다.

 

과연 해인이 자기가 승하에게 요구하는 게

가능한 일이라고 진심으로 믿고 있는건지

의아하긴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어떻게든

세상에 붙들어두려는 어거지이기에

가슴 아프다.


승하는 이 세상에 이미 오래 전부터 속해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어떻든 모습은 보여왔다.

그러나
그 모습마저
재가 되어 훨훨 날아갈 날이 머지 않았음을
느낄 때의 두려움이
저 대사에서 절절하게 뿜어져나온다.

나도 승하에게 말한다.

 



'당신이 내 눈앞에서 사라질까봐 겁이 나서 잠을 잘 수가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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