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궁 4부-동궁전의 변화 본문
동궁전의 어느날..파빌리온...
시꺼먼 옷차림의 경호원들이 그득하다.
그들은 시시덕거리고 있다.
그게 근엄하게 서 있는 것보다 더 황막한 느낌이다.
19 살 짜리 황태자가 거처하는 동궁전은
그 화려함이 돋보이지 않는다.
완전히 남자들만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는 온전히 남자들에게 둘러싸여 살고 있다.
이윽고 황태자가 모습을 나타냈다.
흐트러진 자세의 경호원들이 긴장한다.
그들에게 못마땅한 시선을 던지며 황태자는
꼿꼿한 자세로 동궁전을 걸어나간다.
그가 던지는 그 못마땅한 시선은
그들의 흐트러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자기 거처에 득시글거리는
경호원들이 염증이 나서가 아닐까 싶다.
가뜩이나 삭막한 그의 세계는
시꺼먼 경호원들로 인해 더더욱 강조된다.
학교에서나 궁에서나 그는 그놈의 경호원들에게 둘러싸여 있어야한다.
그들은 그의 숨막히는 일상을 상징하는 것 같다.
그 황태자가 갑자기 혼인을 했다.
스스로 아무런 기대도 감상도 흥미도 느끼지 못하는
그저 국민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의식에 불과한 행사였다.
황태자는 위엄과 기품,그리고 절도가 몸에 배인
동작으로 한치의 어긋남도 없이
의식을 치룬다.
그의 무표정하고 담담한 얼굴에선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가 없다.
몸에 배인 황태자스러움과
그것에 염증을 느끼는 이율배반이
그로 하여금 황태자비가 될 아이가 행여 실수라도 할까
그래서 자기의 체면을 손상케할까 염려하면서도
동시에 뭔가 실수를 저질러서
숨막히는 분위기를 깨뜨려주길 바라는 걸로 표현된다.
느닷없이 분수에 맞지도 않게
황실의 인척이 되는 바람에
벌벌 떨고 있는 자신의 부친을 안쓰럽고 애처럽게 바라보고 있던
자신에게 던지는 황태자의 비쭉대는 미소를
그녀는 본 것이다.
그녀는 재빨리 그에게 항변의 시선을 던진다.
그러자 그도 받아친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이렇듯 아무도 알 수 없는 방법으로
그들만의 바람직하지 않은 소통을 주고받으며 국혼은 진행되었다.
황태자는 국혼만 치르면 만사가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지만
천만에~!
그것은 시작이다.
갖가지 변화가 정신 없이 그의 생활을 뒤흔든다.
동궁전에 안주인이 생겼다.
그러자 시꺼먼 사내들이
동궁전에서 사라졌다.
동궁전에 황태자비가 들어왔는데
어디 감히 남정네들이
어른댈 것인가~!
내관 두어명 외엔
아무도 동궁전에 얼씬거릴 수가 없다.
여자 한 명이 맞은 편 방에 거처하게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살고 있던 집의 공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물론 그 여자는 그에겐 여자도 아니요
아내도 아니며
그저 황태자비라는 공식적인 자리에
들어온 낯선 여자애일 뿐이었고
그래서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실제로 매사에 무시하지만
그건 그저 그의 생각일 뿐이다.
시꺼먼 사내들이 물러간 대신에
황태자비 시중을 드는 궁녀와 상궁이 상주하게 되었다.
이렇게 여자들이 한떼거리 몰려와서
동궁전을 채우니
이전의 황막한 느낌은 사라졌다.
동궁전의 화려함도 갑자기 빛을 낸다.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듯
그동안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았던
갖가지 아름다움이 드러난다.
황태자는 미처 그 모든 것을 체감하진 못한다.
그러나
동시에 이제
자기 만의 공가에 자기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 있다는 것,
그 누군가가 여자라는 것.
게다가 명목상으로라도 아내라는 사실..
효린에게 전화가 오면 그는 자기도 모르게
채경의 눈치를 본다.
전화하는 동안에도
그리고 전화를 끊고 파빌리온을 가로 질러
자기 거실로 들어가는 동안에도 내내
황태자비의 거처에 신경을 쓴다.
인상적인 것은 그가 자기 거처에 들어가기 전에
무심코 그런 것인지 모르지만
어떻든 채경의 방을 돌아보며 주춤했다는 사실이다.
이것이 그에게 일어난 첫번째 변화였다.
그 누군가가 아무리 관심 없는 존재일지라도
완전히 무시한다는 건 불가능하다는 것 말이다.
아내건 친구건 아무 상관 없는 누군가이건
자신의 공간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게다가 상대가 자신과 반대의 성일 경우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이다.
주변에 여성의 향기가 감돈다.
한 인간의 무게는
그 인간이 가진 우주만큼 무겁다.
한 인간 안에는
하나의 우주가 들어 앉아 있기 때문이다.
그건 황태자로선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그게 시작인 것이다.
관계의 시작....소통의 실마리..
그에겐 같이 문후를 올리고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이 등하교를 하고
같은 공간에서 자주 부딪히고
말다툼이건 깐죽거리는 비웃음이건
대화 상대가 생긴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자신을 황태자로 대해주는 예의바르고 정숙하고 품위 있는
여자애가 아니라
자기가 아무리 폼을 잡아도 단숨에
19살짜리 소년으로 끌어내리는 재주를 가진
단순하고 무지한 여자애인 것이다.
자기의 모든 무기가 전혀 통하지 않는 이상한 존재...
이렇게 이신의 생활은
공기에 감도는 존재의 향기와 무게로 그 변화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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