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서양골동양과자점앤티크 -옥상씬- 본문
앤티크의 옥상씬은
일종의 프롤로그와 같다.
그 짧은 장면엔
너무나 많은 것이 함축적으로 내포되어 있고
이후의 여러사건과 맥이 닿아 있으며,
그것은 주로 진혁의 의식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막상 우리는 그저 선우가 게이라는 것과
진혁이 게이라는 성정체성에
혐오감을 느끼는 인물인듯하다는 것
외에
뚜렷하게 알 수 있는 것은 없다.
앤티크는 마치 마왕처럼 퍼즐놀이를 하듯
마지막 순간에야
모든 장면의 의미가 제자리를 찾아가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옥상씬은
난간의 모서리에 위태롭게 놓여져 있는
케이크를 클로즈업하는 걸로 시작된다.
바람이 약간 불기만해도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이
어정쩡하게 놓여진 그 케이크는
어쩐지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우리는 나중에야 그것이
진혁이 자기 여친에게 졸업 선물로 주었던 것임을..
그러나 그 선물과 함께 진혁이 첫사랑 여친에게 무참히 채임으로써
그 케이크마저 버림받은 몰골로
그토록 스산하게
화려한 데코레이션이 무색할 만큼
난간에 버려져 있었던 것도 알게 된다.
그때 우린 모른다.
진혁이 실은 케이크를 아주 싫어한다는 것을..
왜 진혁은 자기는 좋아하지도 않는 케이크를
굳이 여친에게 졸업선물이랍시고 했을까?
'니가 나에게 맞춰주려고 애쓴거 알아..'
헤어지자며 던진 그녀의 한 마디에
담겨있다.
자기 자신은 싫어하면서도
여친이 좋아했던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그는 굳이 케이크를 선물하려다
채이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진 진혁도 영문을 모르는 것 같다.
그는 뭐가 뭔지
뭐가 잘못된건지
그러나 분명 뭐가 잘못되었음을 처음으로 인식하기 시작하고
불안할 뿐이다.
또 하나
이 옥상씬이 프롤로그로써 매우 중요한 의미들을 담고 있는 것은
바로 그 장면이
진혁과 선우에겐
인생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어버리는 순간이 되기 때문이다.
진혁은 후에 말한다.
처음으로 자기에게 뭔가 문제가 있음을 알려준
순진한 첫사랑에게 채인걸로 시작해서
내내 뭔가 그의 인생이 제대로 풀리지 않음으로써
평범하게,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살아가고자 안간힘을 쓰던
그에게
처음으로 좌절감을 안겨준 순간이라고..
반대로 선우로 말하자면,
스스로의 성정체성을
더이상 숨겨두지 못하고
진혁에게 고백했다가
더없이 모욕적으로 거부당한 그 순간이
오히려 그를 자유롭게 만들었다.
즉,
진혁이 한 시대를 마감하면서 앞으로 맞이하게 될
갖가지 고통이 그 순간에 시작되었다면
선우는 오히려
그 순간부터
그를 압박하던 것들로부터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첫장면..케이크에 이어
그리고 선우라는 인물이 진혁의 의식 속에 자리잡게 되는
그 대목에서 진혁은 가볍게 웃는다. 당연히 앞이 잘 안보여서 그랬겠지만 그는 악독하거나 잔인한 인물은 아니다.
주춤거리며 자신 없는 발걸음으로
어딘가를 향하는 교복차림의 남자애를 보여줌으로써
그곳이 학교의 옥상임을 알 수 있다.
주춤거리는 남자애의 발걸음과는 대조적으로
단호하게 반대편에서 걸어나오는 여자아이의 다리와
교차하는 순간,
화면은 잠시 정지한다.
첫 여자가 진혁을 떠나는 순간이다.
순간이기도하다.
즉 여자라는 것으로 상징되는
정상적인 남자로서의 미래는
좌절되고
오히려 게이인 선우가 그의 인생에 나타난다.
그러나
바로 그 선우라는 관문을 거쳐야만
혹은,
후에 그가 말한대로
그의 도움이 있어야만
그는 그가 바라는 정상적인 인생을 살아갈 수가 있다.
그러니 옥상씬은
정상적이라고 믿었고,
아니 그렇게 믿으려 애써왔던 그의 가식의 한 귀퉁이가
허물어지는 순간이며,
동시에
선우라는 인물이 그의 인생에 나타나서
그의 나머지 가식까지 모두 벗겨주는 역할을 하게되는
중요한 에필로그가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당시의 진혁은 물론 그런건 알 길이 없다.
그는 그저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막연히 감지하고
착잡하고 불안하다.
그건 단순히 여친에게 차이는 바람에 급좌절하는 것과는
차원이 조금 다르다.
그는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장벽과 처음으로
마주하는 것이다.
그는 불안하고 막막한 것이다.
그리고 하필 그런 순간에 선우의 사랑고백을 받게 된다.
진혁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소심하고 얌전하게 생긴 선우는
눈치도 잼병같다.
방금 진혁에게서 돌아선 듯한 여자애의
칼날같은 분위기와
비록 뒷모습밖엔 볼 수가 없지만
멍하니 서 있는,
아연한 표정의 진혁에게서 풍겨오는
분위기만으로
뭔가 이상하다는 걸 그는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어쩌면
자기 자신이 너무 급박해서
이런거 저런거 따질 겨를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지금 너무나 하기 힘든,
딴에는 일생일대의 큰 일을 하려는 참이다.
남몰래 짝사랑해온 진혁에게
자기의 사랑을 고백하고,
자기가 다름아닌 게이라는 사실까지 밝혀야하기 때문이다.
비록 그 댓가로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해도
이제 졸업하면
만날 길 없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백이라도 해야겠다는 절박함이
그를 몰아세운다.
그가 불렀을 때
가볍게 한숨을 날리고
표정을 가다듬으며 돌아선 진혁은
담담하게 선우를 바라본다.
마치 인간이 아니라
무슨 물건을 보듯
그가 자기에게 하고 싶은 얘기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지만
그렇다고
거부하기도 뭣해서
그냥
기분이 엉망이긴 하지만 꾹 참고 상대해주는 표정이다.
선우는 그렇게 운이 나빴다.
하필
여친에게 막 걷어차인 진혁에게
눈치없는 말들을 마구 해댄다.
나, 너 좋아해..
넌 여자애들에게 인기도 많고 이런 쪽도 아니라는 걸..
그래도 내 진심을 알리고 싶었어...
여자애들에게 인기도 많고
자기도 그런 줄 알았는데
방금 여친에게 특별한 이유도 없이 채인 것이다.
그리고
대신에 나름 그동안 안쓰럽게 보고 동급생들의
음담패설에서 감싸오던 선우가
정말 그들의 말처럼
예사로운 아이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것도
씁쓸한데
그러나
그에게 더욱 충격적인 건
사실
그의 성정체성은 아니다.
그가 호머이고,
하필 여자에게 채인 순간에
호머에게 사랑의 고백을 받는 재수없는 사건이 발생했다한들
그렇게까지 할 건 아니었다.
그는 슬슬 어르듯
다 이해한다는 듯
별일 아니라는 듯
그러나
그 뒤에 잔인한 조소를 깔고
빈정대고 있다.
선우는 어리둥절하다.
놀라지도 않고
험오감도 안보이고
기분나빠하지도 않는다.
정말 눈치없다.
폭풍전야의 무시무시함이
진혁의 다 이해한다는 듯한 미소 속에 숨겨져 있는 걸
전혀 모른다.
아니,
그의 그런 고백이 진혁에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그의 트라우마를 건드린 발언이며,
방금 그 트라우마로 인해 여친에게 차인 분풀이까지
모조리 뒤집어써야한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드디어
케이크 세례를 받는다.
더없이 모욕적이고 잔인한 말과 함께...
그게 힘겹게 고백한 댓가였다.
선우는 그 순간에 땅으로 꺼지든지 하늘로 날아가든지
하여튼
자기 존재를 한시 바삐
진혁 앞에서 지워버리고 싶었을 것이다.
지우개로 지울 수만 있다면
빡빡 지웠을 것이다.
그는 케이크를 얼굴에 뒤집어 쓴채로
도망친다.
그는 진혁 앞에서
비참한 몰골로 넘어지기까지 한다.
그는 허둥지둥 달아났고
진혁은 그의 그런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그렇게 허둥지둥 달아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진혁의 마음은 결코 가볍지 않았고,
선우는 진혁을 잊었지만
그래서 다시 만났을 때 알아보지도 못하지만,
오히려 진혁의 의식 밑바닥엔
그 당시의 선우의 모습이 강하고 새겨져서
그를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말한다.
선우에게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라고.
그렇다.
그는 선우에게 그렇게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케이크를 뒤집어씌운 건
선우가 아니라
자신을 그렇게 만든,
자신에게 케이크 고문을 했던
그 누군가였고
그 누군가가 망쳐버린 자신의 청춘, 자신의 미래였을 뿐이다.
그리고
엉뚱하게 그 분풀이를 당해야했던 선우에게
진혁은 늘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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