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놀로그
천일의 앤과 엘리자베스 여왕 본문
헨리 8세와 앤 블린을 중심으로
그의 복잡한 결혼 생활과, 그 이면의 정치적인 요소들을 다룬 작품들이
천일의 앤 말고도 '튜더스'라던가
뭐 그런 작품이 있는 걸로 안다.
튜더스는 내가 보고 싶어서 다운을 받아놓긴 했으나
결국 보지도 않고 삭제해버렸다.
굉장히 선정적인 느낌을 주고
더더우기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매우 현대적인 이미지의
왕과 여자들의 용모가 싫어서였다.
영화 천일의 앤도 작품으로 볼 때
실패작이다.
하지만 적어도 분위기는 살아 있다.
한 장면 장면의 구도나 색상에선 고전적인 느낌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로미오와 줄리엣'이
디 카프리오라는 지극히 현대적인 용모의 배우에 의해서
포스트모던하게 재창조된 것이
내게 그다지 어필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난 어쨌거나 역사물은
당대의 느낌이 살아 있는 작품이 좋다.
그건 영상의 색채감이나 비교적 고증에 철저한
의상과, 그것들과 조화를 이루는
배우들의 용모들로 재현된다.
하지만
천일의 앤은
그러한 느낌을 비교적 담고 있음에도 영화적으로는 실패작이라는 느낌을 준다.
리처드 버튼이라는 명배우와,
공들인 색채감과 영상미에
음악에 흐르는 비극적 서정성이
물씬 함에도 뭔가 부족하다.
그건 역시 여배우와, 전체적인 연출의 부족 탓이 아닐까??
장면들은 아름다운데 통일성이 없다.
뭔지 모르게 중요한 것에서 자꾸만 비껴나는 듯한
산만함이 보인다.
앤 블린 역의 배우는
그녀는 이름은 잘 기억이 안나지만
매우 현대적으로 생겼고
거의 야성적이기까지 하다.
고전적인 느낌을 전혀 주지 않는다.
게다가 시종일관 비슷한 분위기로 일관해서 지루하다.
무엇보다 영화는 이렇다 할
중심이 없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긴 한 것 같은데 그것에 액센트를 주지 못하여
이야기가 중구난방이다.
사랑도, 정치적 파워 게임도 로마와의 줄다리기도
무엇하나 제대로 그려내지 못한다.
헨리8세의 파격성은 경박하게 보이고 왕답지 않는 천박함으로 가려진다.
앤 블린의 당당한 자존심은
허영심으로 보이고
왕과 그의 권력에 콧대 높게 반발하던 여자가 너무나 쉽게
권력에 무너지며
그것을 즐기게 되는 과정이 생략되어 있기에
설득력이 떨어진다.
뭔가 모르게 부산하고 정신 사납다.
비교적 감성을 자극하는 것이
주인공들이 아니라
오히려 캐서린 왕비였을 정도이다.
그녀는
시각적으로 가장 강렬하고 영화에서 동떨어진 느낌을 준다.
배우가 연기하는 인물이라기보단 실제로 낡은 역사 속에서 튀어나온 인물처럼
굉장히 리얼리티가 있었다.
그 리얼리티가 오히려 겉도는 느낌을 주어
역으로 생생한 것이다.
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의 정략적인 이유로
어린 나이에 이국으로 시집왔지만
남편은 일찌감치 죽어버렸다.
이후로 그 동생으로 왕위를 이은 헨리의 아내가 되는데,
그 또한 정치적 이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엉뚱하게 남편의 동생과 결혼한다는게
말이 되나??
뭐 여기저기 검색해보긴 했다.
하지만 별로 기억에 남지 않아서
새로 찾아보기도 귀찮다.
어떻든 헨리와의 사이에
그 유명한 메리를 두고
아들은 모조리 사산했다니
거참...헨리에게 아들복이 없었던 건 확실하다.
불행히도 남편의 동생과 결혼하였다는 것이
후에 이혼의 빌미가 되니
같은 여자로 볼 때 헨리는 참으로 치사한 인간이다.
오랜 시간 같이 살았고
아이도 많이 가졌던 아내에게
단지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이유로
너무나 치사한 오명을 씌워 내쫓으려하니 말이다.
그녀는 이혼을 거부하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론 이혼당하는 것 같다.
영국민들은
이국의 여인인 캐서린 왕비를 오히려 추종하고
앤 블린에겐 창녀라고 외쳤다니
것도 신기한 일이다.
남편의 사랑을 잃고 시들어가는
그럼에도 그 남편을 사랑하는 여자..
그녀의 뒤에는
당대 최고의 강대국이었던 스페인과,
그 스페인이 지배하는 로마 카톨릭이라는
권력이 있음에도
그녀는 초라하다.
그리고 병들어 죽어가고 잊혀진다..
다시 본 천일의 앤에서 제일 내 눈길을 끈 인물이었다.
왕가엔 저렇듯 이름없이 스러져간 여인의 눈물어린 불행한 생애가
얼마나 많았을까???
그건 조선조도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그저 왕족으로 태어나지 않는 것만 감사해야하는건가??
천일의 앤에서
숨겨진 주인공은 실은
엘리자베스이다.
그녀의 환영받지 못한 출생과, 그녀에 대한 앤의 지극한 긍지이다.
말하자면,
앤 블린은 그녀가 사랑한 왕이 그토록 원했던 왕자를
낳지 못하여 죽음을 택할 지언정
이혼이나 결혼 무효에는 승복하지 않는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딸을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영국 최고의 왕이 될 것임을
주장하며 목숨으로 딸의 미래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니
천일의 앤의 실제 핵심은
수많은 희생을 치루고 얻어낸
앤의 왕비 자리 쟁취가 아니라
그로 인해 태어난 엘리자베스 공주의 정통성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따지면 앤의 목숨을 건 투쟁이
의미 없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영국으로 봐선 위대한 미래의 싹을
탄생시키고 지켜낸 그녀의 의지였다.
그리고 영화에서 말하고자 한 것도 그것인 것 같다.
타협을 하지 않고 죽음을 택하면서
그녀가 수호한 자신의 딸인 엘리자베스 공주의
영국 왕실에서의 정통성이다.
만에 하나 엘리자베스 공주가
역사적으로 흐지부지 되었다면
헨리 8세의 엽기적 결혼 생활도
앤 블린의 존재도 희미했을 것이다.
헨리 8세는
자기가 치룬 희생에 대한 댓가로
겨우 딸 하나를 얻었을 뿐이고,
그로 인한 분노가
앤에 대한 사랑을 식게 하였다.
게다가 앤은 고분고분한 여자가 아니었다고도 한다.
이혼이 불가능한 당시의 상황에서
막강한 배경을 뒤에 이고 있던 정통성을 지닌 왕비를 기어이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걸로 봐서
과연 만만한 여자가 아니긴 하다.
영화에서도 굉장히 거만하고 격렬한 성정의 여자로 그려지고 있다.
그런 점에 왕이 매력을 느꼈을지 모르나
사랑이 식고 나면 바로 그런 점에 더더욱 염증을 느끼게 했으리라.
왕이란 존재는,
절대로 진심으로 사랑에 빠질 수가 없는 좀 특별한 종족이기도 하다.
어쩌면 앤은 다른 여자들처럼
그걸을 간과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로 치면 숙종과 장희빈의 관계가 그러하다.
장옥정과 숙종은 젊은 날에 열렬하게 연애를 했었다.
그건 이례적이다.
왕이 눈에 드는 여자를 총애하여 후궁으로 삼는 것과,
젊은 시절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는 건 좀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랑이 장옥정의 몰락을 가져오는 것이다.
여자는 그 사랑의 기억에 매달린다.
그러나 왕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다.
애초부터 의식 구조가 달리 생겨먹은 것이다.
그래서 숙종이나 헨리 8세나
과거 자신을 사랑했던 기억을 가슴에 새긴 채로 격렬하게 반발하며 대드는 여자보다는
결국엔 조신하게 순종하는 여자에게 돌아가는 것이다.
헨리의 경우엔 제인 시모어가 그러했고,
숙종의 경우엔 인현왕후나, 최숙빈이 그러했으리라.
사실,
그 순종이 격렬한 반발의 다른 얼굴일수도 있다.
어디까지나 순종의 껍질을 쓰고 정반대되는 쪽에서 은근하게 대쉬한다고 할까?
스스로 둘도 없는 존재라는 착각에 길들여진데다가
어디까지나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왕이라는 존재에게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미약한 것인지 미처 몰랐던 여자들이 패배한 이유일 것이다.
이제 그의 시선은 이미 앤 블린에게 닿지 않는다.
그것은
그에게 아들을 낳아줄 제인 시모어에게로 쏠린다.
그리고 한때 그토록 사랑했던 여자,앤을 죽이기 위해 갖가지 더러운 오명을 뒤집어 씌운다.
참으로 사랑이라는 것이 권력과 닿아 있을 때 그 말로의 추잡함의 극치이다.
영화에서 재밌는 장면은,
앤을 없애버리기 위해 간통이라는 죄를 씌우고
막상 그럴 가능성에 괴로와하는 헨리의 모습이다.
살짝 아이러니하고 재밌었다.
왕의 그런 심리를 간파하고 비웃는 앤의 모습도 인상적이다.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앤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는 마음은 버리지 못하는 여인의 가련함..
일찌기 여자가 짊어지고 나온 숙명이랄까...??
여인은 남자를 사모하라고 신은 명하셨다.
그리하여 여자들은 긍극적으로 사랑한다.
죽음을 앞둔 앤도 다를 바 없다.
그녀가 헤아리는 것은
자기가 사랑했던 나날들이다.
영국의 국왕 헨리 8세의 비로서의 앤 블린이 아니라,
남자 헨리를 사랑한 여자 앤의 일생을 돌아본다.
마지막으로 감옥의 앤을 찾는 헨리와의 장면도 꽤 멋있다..
헨리라는 남자에게 앤은, 역시 격렬한 애증을 품게하고
강렬한 흔적을 남겼으리라는 생각도 든다.
자기가 죽이려고 맘 먹은 아내에게
자기를 사랑했었다는 말을 듣고자하는 남자로서의 헨리의 모습이 야릇한 심리의 갈피에서 방황하는
남자와 왕으로서의 자존심에 매달리는 가련함이 느껴지는 반면
그에 화답하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왕이시여...'
라고 고백함에 있어 여전히 당당함과 오만함을 유지하는 앤이라는 여자는
참 멋진 여자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의 권력을 손안에 쥐고, 자신의 생사여탈까지 쥐고 있는
그러나 초조한 왕과,
이제 곧 죽을 몸이면서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고도
절절한 사랑을 전달하는 앤은
그 이면에 여전히 정치적인 알력이 있다 한들
오히려 헨리보다 더 우위에 있는 것이다.
앤은 그렇게 죽었다...
영화의 엔딩은 엄마의 가르침대로 장차 여왕이 될 몸으로
걸음걸이 연습을 하는 어린 엘리자베스의 모습이다.
그래서 역시 이 영화는
엘리자베스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진
앤 블린의 이야기이다.
즉 이후 영국 최고의 여왕이 될 공주가 숨겨진 내막인 것이다.
헨리 8세는 이후
제인 시모어를 왕비로 맞았으며
그녀는 마침내 아들을 낳았다.
여기까지 보면
승리자는 제인 시모어 같다.
그녀는 그토록 원했던 아들을 왕에게 주었고
역대 그 어떤 왕비보다 헨리 8세의 사랑을 받았다고 하니 말이다.
하지만 제인에 대한 헨리의 사랑은
내가 보기엔 그녀완 정반대되는 앤 블린에 대한 반작용같다.
마치 장희빈에게 대인 숙종이
새삼 인형왕후를 대접했듯이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지극히 자극적인 것에서 벗어나면
마음의 평화를 건드리지 않는 것을 좋아하는 법이니까.
그러나..
역사의 흐름을 놓고 봤을 때
진정한 승리자는
오히려 제인 시모어가 아니라
앤 블린이다.
제인의 아들은 홀라당 죽어버리고
실제로 영국 최고의 여왕으로
이름을 떨치고 영국을 최강국으로 만든 것이
다름 아닌
앤 블린의 딸이었던 엘리자베스이니 말이다.
이러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날 잠시 숙연하게 한다.
그리고
앤 블린이
제인 시모어보다 더 길게 회자되는 이유도
자기 자신이 아니라
그녀가 목숨으로 지켜냈던 자신의 딸이
헨리 8세의 편집적인 아들에 대한 집착을 물리치고
영국 최고의 여왕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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