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덫-노영국과 주변 인물들
청춘의 덫은 처음엔
그냥 전형적인 통속 멜로에 복수극과 신데렐라 스토리를
적당히 버무려서 흥미를 유발시키는 드라마 정도로 봤다.
다시 보게 되었을 땐 좀 다른 관점으로 보았는데
여주인공이
남자가 진저리치는 구질구질한 환경에 자신을 몰아넣을만큼
남자에 대한 이해와 통찰이 부족하며
소시민적인 삶에 아무런 불만이 없는
자신의 가치관을 상대에게 의심 없이 들이대어
결국엔
남자로 하여금 자신을
벗어던지고 싶어지는 헌 옷 정도로 스스로 전락시킨 것에 대해서
안타까움을 느꼈다.
물론 심은하씨는 아름다왔고
연기도 훌륭했으나
심히 졸리는 캐릭터였기에 복수의 화신으로 변하자 훨씬 보기가 수월해졌다.
하긴...
복수의 화신이 되었을 경우를 생각해서
이전엔 필요 이상으로 졸리는 여자일 필요성이 있었겠지만,
물론 이후에 다시 졸리는 여인으로 돌아가지만 말이다.
내가 청춘의 덫을 다시 본 건
이후로 몇년이 흐른...
21세기 중반 쯤이다.
당시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하면서
난 일을 그만두고 이른바 백수가 되어서
집에 들어앉아는데,
(참고로 난 멋진 캐리어 우먼이었음에도 막상 백수가 되고나니
훨씬 적성에 맞더구만...ㅋㅋ)
이미 인터넷이 보편화되서 웬만한 드라마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던 시절이었다.
초반은 역시 왕짜증난다.
여전히 심은하역엔 공감을 할 수가 없다.
하지만
그새 나이를 더 먹은 관계로
그녀를 이해하긴 했다.
그런 타입의 여자,
가진 건 모성애밖에 없는 여자에게
아이가 어떠한 것인지,
사랑하는 남자가 어떤 존재인지
이해는 갔다.
하지만
어떻든 자기 무덤 자기가 팠다는 생각은 버릴수가 없다.
아이를 멋대로 낳은 건
같은 여자의 입장에서도 화가 났고,
난 정신 세계가 여성적이지 않기에
심은하 역을 이해는 했지만 공감하기 힘들었고,
오히려 이종원역에 더 공감가는 건
여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 봤을 때보단
훨씬 재미 있게 봤는데,
그 이유는
심은하과 이종원의 짜증나는 관계보다
더 흥미로운 다른 인물들에게 관심이 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우선,
유효정의 어머니역 말인데,
내가 꽤 좋아하는 중견배우가 맡았지만,
그 여자가 참 재미 있다.
신분 상승을 위해 몸바쳐 살았던 모양인데,
실제로 신분 상승에 성공하기도 했음에도
여전히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있는 게 재밌었다.
마치 99개 가진 인간이
1개 가진 인간의 것을 빼앗으려고 기를 쓰는 것처럼
정실부인자리를 탐내다가
남편이 홀라당 죽어버리자
분에 못이겨 펄펄 뛰는
마치 불꽃에서 조민수역을 보는 듯 했다.
난 그런 캐릭터가 왜 그리 좋은건지..ㅋ
극이 재미 있어지는 건,
아이가 죽고,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는 바람에
나락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이종원역이 좌불안석하며 상황이 역전되어
울고불고 매달리는 쪽이 바뀌기 시작할 무렵이다.
그리고
그때까지 심하게 졸리던 윤희가
갑자기 싱싱해지기 시작한다.
물론
'부숴버리겠쓰~!!'
라는 대사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내겐 전율적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윤희에게서
구원의 여인상을 발견하고 접근하는 노영국이라는 인물이
전면에 떠오르면서
극은 흥미를 더한다.
그리고, 노영국 캐릭터가 눈에 들어온다.
처음 볼 때만 해도
그는 그저
그런 종류의 드라마에 으례 등장해서
상처받고 버림받은 가련한 여주인공을 구원해주는
백마탄 기사 정도에 지나지 않았고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인물이다.
게다가 전광렬...!!!
그런데
의외로 전광렬이 그 역에 차츰 동화되기 시작하면서
노영국 캐릭터도 힘을 받기 시작한다.
요즘엔 그래도 작가들이 캐릭터에
성격이란 것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하는 듯 하지만,
그 당시만 해도 대다수의 드라마에서
주인공들은 도무지가 성격이 없었다.
아니 한 가지 성격이 주어지면
그걸로 첨부터 마지막까지 일관한다.
예를 들어 내가 선정한
졸리는 드라마의 최고봉인 여름 향기라는 드라마를 보면
거기 나오는 남녀 주인공은
순정만화 주인공 같은 표정으로 시종 마지막까지 끌고 가는데
친구를 대할 때나
애인을 대할 때나
일을 할 때나
그저 여주인공은 곧 눈물이 한 방울 떨어지기 직전의 슬픈 표정으로
일관하는데
과연 저 여인은 화장실에서 볼 일 볼때도
청순 가련하고 슬픈 표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허공을 바라보지 않을까
의심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그건 남자주인공도 다를 바가 없었다.
가뜩이나 더운 여름에
그렇게 단조로운 두 남녀의 인형 같은 모습은 그야말로
졸릴 수밖에 없었다.
아다시피 사람이란 절대로
그럴 수가 없다.
부모를 대할 때
친구를 대할 때
그리고 연인을 대할 때
게다가 일을 할 때나 혼자 있을 때
각각 다른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일면을 드러내는 게 정상이다.
그리고 그 다양성을 모두 종합해서 평균을 낸 것이
바로 나라는 인간의 성격이 되고 개성이 될 것이다.
물론 드라마 캐릭터에게 그러한 것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일진 모르나.
가끔 그런 캐릭터가 나타나면
흔히 말하듯 그 드라마는 성공하게 되는 것이다.
청춘의 덫의 노영국이란 인물도 나름대로 상당히 입체적이다.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청순가련한 여자를 만나서 홀라당 빠지게 되는 건 비슷하지만,
적어도 그가 그 여자를 왜 사랑하는지 이유가 주어진다.
그는 우선 매우 위악적인 인물이다.
그는 자신의 방탕과 무책임을 냉소적으로 내세우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그가 매우 정이 많고 여리고 섬세한 인물이라는 것이
시시때때로 묻어난다.
그리고 그것이 가장 두드러질 때가
그가 자신의 정모나 노망난 할머니를 대할 때이다.
그는 매우 자상하고 섬세하며 깊은 배려와 애정을 품고 그들을 대한다.
그리고 그의 그런 면은
후에 여주인공에게 보다 명확하고 집중적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반면에
그는 자신의 생모를 사랑하지 않을 뿐 아니라
거의 혐오하고 증오하기까지 하는데
그가 방탕의 상대로 삼았던 여인들은
실은 바로 생모 같은 타입이라는 걸 알 수가 있다.
그의 생모는 돈과 신분상승을 목적으로
가정이 있는 남자를 빼앗은 여인이다.
그리고도 눈꼽만치도 거기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지 못할 뿐 아니라
남편은 물론 자식조차도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메마르고도 속되며 욕심과 허영 투성이 영혼의 소유자이며,
남편이 죽어버리는 바람에 더이상 욕심을 부리지 못하게 된 것이
미치고 팔짝 뛰게 분한 여자이다
(아..난 그런 캐릭터가 너무 좋아.ㅋㅋ)
그렇듯
남자의 돈과 배경에 쉽게 넘어가는 허영심 많은 속물 여성들이
그가 소위 방탕과 희롱의 대상으로 삼는 대상들임을 알 수가 있다.
하긴 그것도 부잣집 도련님의 특권일지 모르지만.
그가 선택한 서윤희는 그가 생모가 아님에도 진심으로 애정을 쏟는
그의 정모와 같은 타입이다.
한 자리에 놓여지면 그 자리를 마지막까지 지키면서도
불평이 없고
변함이 없고 인내심 강하며 잔잔하고
그러면서 애정과 믿음에 깊이가 있는
그에게 있어선 구원의 여인상인 것이다.
한 남자에겐 일고의 가치도 없었던 그녀의 장점들이,
그러나
다른 남자에겐 바로 그녀를 위해서라면
아니 그녀를 얻기 위해서라면 못할 일이 없게 만드니
참...
그래서 인연은 따로 있는건지?
흔히 볼 수 있듯
청순가련한데다가 버림받아 상처 입은 영혼의 여주인공에게
무턱 다가가서 사랑을 쏟는 다른 그런 종류의 드라마에 나오는
백마탄 기사와는 그런 점에서 조금 달랐다.
즉 그의 그런 선택에 타당성이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내가 늘 주장하는 논리적으로도 말이 된다고나 할까?
즉, 이종원의 선택도,
노영국의 선택도 논리적으로 말이 된다는 것이다.
특히 더 흥미로운 점은 노영국의 방탕은
생모가 저지른 짓에 대한 죄책감의 색다른 형태의 보복이자
스스로에 대한 가학이며
동시에
지나치게 순수한 감성에 대한 스스로의 부정 행위에 불과했음이
후에 그가 사랑을 성취한 후의
태도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노영국 캐릭터의 입체성은 상당히 매력적이다.
하여튼,
그렇게 따지지 않더라도
청춘의 덫은
여러 캐릭터들이 생명력을 지니고 각각 자기 분야에서
맹활약을 펼치는
굉장히 재밌는 드라마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난 새삼 심은하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녀의 연기가 얼마나 물이 올랐는지
찬탄을 하면서 보았다.
그런 여배우를 다시 볼 수 없다는 건
참 유감스러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