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지애와 바람과함께 사라지다
바람과함께사라지다에서
레트 버틀러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할 수 없는'
인간들에게 경멸과 연민을 느낀다고 한다.
즉,
어떤 인간들은 자기에게 맞는 환경에서만 살 수 있으며,
그런 환경이 사라질 때,
그 인간의 인생도 사라진다는 것이다.
남은 생은,
그 인간에겐 지옥이다.
그는 단순히 그렇게 말하지만,
그러나 그렇듯 변화한 현실에 적응할 수 없는 인간의 생은
어떨까..
얼마나 지옥같을까..
단순히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경멸해치우기엔 한 인간의 고통이 너무 처절하다.
물에서 강제로 끌어올려져
땅에 내동댕이처진 물고기처럼
고통에 몸부림치며 죽어가야하는 것이다.
스칼렛은 남부 귀족문화의 정점에서
교육받아온대로 겉으로는
귀부인다운 행동을 하지만,
막상 그것이 무너지자 오히려
내재되어 있던
반남부적 기질,
작품 안에선 아일랜드 기질이라고 표현하지만,
그 기질을 발휘하여
대성공을 거둔다.
어찌 생각하면 스칼렛에겐 고상하고 위선적인 남부귀족문화가
그녀가 적응하기 힘든 현실이었다.
그녀는 새로운 변화에 재빨리 변신하여 적응한 게 아니라
그녀에게 잘 맞는 환경을 만난 것이다.
애슐리는
레트가 경멸과 연민을 느끼는,
그 변화한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는 전형적인 남부의 신사이다.
그는 남부의 귀족문화의 대표주자이다.
목화가 가져다주는 엄청난 부 속에서
한가롭고 자기의 취향에 맞는 생활을 영위하며
살아가는 것 외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것이다.
레트나 스칼렛은 당시의 남부에선 가장 지탄받아야할 인물들로
꼽히며 이른바 남부 귀족 사회에선 추방당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경멸하는 셈이다.
하지만 누가 옳고 그른 것은 없다.
누가 누굴 경멸하거나 연민을 품을 일도 아니다.
분명 세상엔
변화에 재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이 있다.
물론,
그런 인간들은 낙오된다.
특히 현세처럼 눈부시게 시계바늘이 돌아가서
도저히 그것을 따라잡을 수 없는 인간들은
미국 남부 시대와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순식간에
바람과 함께 사라져야한다.
그들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저만치 뒤처져서 주저앉아버린다.
나머지 생은?
글쎄...
이 무서운 세상은 그런 낙오자에겐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다.
아마도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빛의 속도로 궤도를 도는 변화를 따라잡기 위해
맨발로 뛰는 인간들이 있을 것이며,
그들은 흔히들 말하는
성공한 인생이 될 것이다.
스칼렛도 당시 남부 귀족사회가 붕괴한 이후에,
그러나
새롭게 부를 일궈내어
그 바닥에서 성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변화에 순응한다는 건
경제적인 걸 의미한다.
그 인간의 정신과는 무관하다.
물질의 세계에 속하는 일이다.
하지만 인간의 삶을 정신과 물질로 갈라놓을만큼
한가한 시대가 아니다.
물질에서 뒤지면 정신도 망가지는 게
인간의 삶이고,
그런 괴리감을 극복할 수 있다면
그 인간은 아예 그런 경주를 도외시할 수 있는
굉장한 정신력의 소유자일 것이니
승부에서 열외자이다.
어릴 때
난 바람과함께사라지다를 읽으며
그런 마가렛 미첼의 마인드가 난감했다.
아닌게 아니라
레트나 스칼렛은 결국은
자신들의 정신적 고향인 바로 그 '남부의 정신'으로
회귀하고자 한다.
그들이 추구했던 새로운 것에 적응하여
그 안에서 최고의 부를 일구고
아직도 지난 시대에 속해 있는 인간들을 비웃던 사고는
그들에게 부 외엔 가져다준 것이 없다.
그래서
온갖 정신적 고통을 겪은 후엔
오히려 그들이 헌신짝처럼 내버린 그 남부 정신에 향수를 품는다.
그리고 그들이 경멸했던
그 사람들을 그리워한다.
그들에게 돌아가고 싶어한다.
그렇다면
대체 마가렛 미첼은 뭘 말하고 싶었던걸까..
그토록 긴 소설 내내 그녀가 비웃던 인간들의 손을 들어준건가?
그녀는
사라진 남부에서 벗어나지 못한 인간들은 마치 패배자처럼
보이게 했고,
그 파괴를 딛고 일어선 스칼렛에겐 냉소적인 시선을 던졌다.
그 두 세계 사이엔 레트가 있다.
그러나,
결국 그 레트마저
고향을 그리워하듯 지난 시대를 찾아 나서는 것이다.
그건 척박한 고향이 싫다고 등지고 떠나 화려한 도시에서
물질적 성공을 일구고 그것이 곧 인생의 성공이라는 공식 하에
최첨단을 걸으며 그것을 향유하다가
지친 인간들이
갑자기 버리고 온 고향에 향수를 느끼고 귀향하는 것만 같다.
난 일찌기 소설 대망에서,
앞으로 나아갈수도, 뒤로 물러설수도 없어진 무사가.
그러나 충분히 그 사이에서 타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할복으로 생을 끝내는 것을 아쉬워한 적이 있지만,
도대체가 자신이 적응할 수 없는 세계에 놓여졌을 때
어떤 선택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난 지금도 알지 못한다.
천년지애를 보면서,
거기에서도 난 바로 그런 과제를 본다.
역사적으로 멸망한 나라의 공주가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로 왔다.
그녀는
그 세계에선 공주이지만
현세에선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아름답지만 힘없는 여자가
험난한 이 세상이라는 정글에 뛰어들었을 때
가장 손쉽게 떨어질 수 있는 곳이
어둠의 세력들의 손이며,
그들에 의해서
만인 앞에 자신을 드러내며 눈요기감이 되는 것이다.
만일 정글에서 왕이라고 칭송받는 사자가
어느날 시내 한복판에 나타난다면..??
이미 동물원에서 길들여져
나른하게 앉아만 있는 지루한 사자가 아닌,
생생한 야생의 피냄새를 풍기는 사자가
나타난다면
인간들은 재빨리 그것을 포획하여
높은 곳에 올려두고
그것으로 돈벌이를 하려고 할 것이다.
그건 마치 공주라고 스스로 칭하는 여인이
나타나자
당장 그녀를 나이트클럽의 유리 상자안에 가두고
상술로 이용해먹으려는 것과 같다.
하지만,
사자가 아무리 인간들의 얄팍한 상술에 의해
눈요기감이 되도
그는 사자이듯,
그래서
정글을 떠나 비록
이 세상에서 눈요기감으로 전락했을망정
고양이가 될 수 없듯이,
공주도
물질이 지배하는 이 복잡한 현대사회에
맨몸으로 내던져졌을망정
단 한 순간도 공주가 아닌 적은 없다.
그런데,
그들은
대체
이 변화한 환경에 어떻게 적응할 것인가~!!
그건 불가능하다.
공주가 공주라는 의식을 벗어던지고
씩씩하게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야 가능한데,
그건 불가능한 일이며,
그럴 필요가 있냔 말이다.
그래서 결국 그녀는 돌아갈 수밖에 없다.
사자도 정글로 돌려보내야한다.
물고기도 놓아줘서
다시 물 속으로 돌아가게 해줘야한다.
변화한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낙오자가 되고,
정신이 피폐해지고,
이윽고는
파멸해가는 인간들을
난 너무나 많이 보았다.
씁쓸하지만,
난 그들을 이해했다.
물론
그건 바람직하지 못한 자세이다.
우리가 흔히 갈채를 보내는 인간은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뭔가를,
즉 사회적 지위와, 부를 일궈내는 인간이니까.
하지만
그 낙오자들을
그렇다고
간단하게 경멸해치우기엔
그 낙오자들이 너무나 불쌍하지 않은가~!!
천년지애를 보면서
왜 내가 이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그녀에겐 돌아갈 곳이 있엇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변화한 환경에 순응하지 못한 낙오자들에겐
돌아갈 곳조차 없으니까.
아니
그들을 낙오자라고 부르는 것도
미안한 일이다.
난 그들의 피폐한 영혼과,
피곤한 육신을 이해하니까.
천년지애는
괜찮은 드라마이다..가 아니라
그럴 뻔 했다.
그러나
몇 가지 문제에 의해서 그만 좌초하고 만다.
첫째로
20부는 너무 길다.
중간에 쓰잘데기 없이
두 남녀가 괜한 신경전을 벌이고
남자쪽에서 어깃장을 놓는 지루한 시간이 너무 길다.
16부 정도면 딱 좋았을 것 같다.
그리고
성유리는 비록,
연기는 정말 제로지만
이미지로만 본다면
그 역에 어울린다.
당시만 해도 뉴페이스였을테니
심히 괴로운 그 대사와
표정 연기만 아니라면
그런대로
신비스럽고 탈속적인 이미지를 주는 것엔
성공했다.
그래서 눈감아 준다.
연기 잘하는, 그러나 눈에 익은 배우가 했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온
백제의 공주라는 이미지엔 걸맞지 않았을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바로 김남진역이다.
사실,
그 배역은
굉장히 매력적이다.
아마
정말 근사한 배우가 했다면,
연기력도 어느 정도 되주면서
근사한 외모를 가진 배우가 했다면
대단했을 것 같다.
그는 그런 삼각관계에서 서브 남주가 흔히 그러듯
메인 남녀의 사랑이나 방해하고 다니며 개폼이나 잡는
단순한 왕자님이 아니다.
그는 의외로 주인공보다 더 사려깊고 매력적이며,
훨씬 비극적이고, 더 나아가
실제로 모든 사건을 해결하는 핵심인물이다.
그가 그 드라마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굉장히 커서
그 역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호감도 주지 못한
김남진이란 배우로 인해
그만 극이 이상해지고 만다.
소지섭역은
만일 상대가 근사하고 연기만 잘해줬다면
완전히 묻힐 뻔했다.
그나마 소지섭이니까
그렇게 별 의미 없는 인물 역을 잘 해낸 것 같다.
난 도입부에서
그가 기절한 공주의 목걸이부터 훔치는 장면이 무척 거슬린다.
그건
아주 형편없는
그야말로 밑바닥의 인성을 가진 양아치가 아니곤
할 수 없는 짓이다.
술에 취한 여자를 강간하는 것과 뭐가 다른가~!
왜 소지섭 역을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런 그가
갑자기 실제론 상당히 심지 깊고 괜찮은 청년이 된다.
뿐이랴
승질 드럽고, 자존심밖엔 가진 게 없는 인간이다.
그런데 실제로 승질 드럽고 자존심 강한 인간이라면,
저런 양아치같은 짓,
기절한 여자의 목에 걸린 진귀한 목걸이를
야비한 미소를 지으며 슬쩍하는 짓은 절대로 안할 것이다.
소지섭 역은
아리라는 백제의 장군 역도 그렇지만,
강인철 역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다.
아리는 애매하고,
강인철은 산만하다.
소지섭이라는 연기 잘하는 배우가 했기에
그런대로 그 자리를 유지했다.
만일
다른 배우가 하고,
더 근사한 배우가 후지와라역을 했다면
아마
완전히 밀렸을 것이다.
그래서
이 드라마의 가장 큰 에러는,
소지섭 캐릭터의 매력도 약함과
캐릭터의 매력도가 엄청난 후지와라 역이
배우로 인해 감소한 것이다.
두 남자가 잘해줬다면
어설픈 공주 역은 그런대로 묻혔을 것이다.
그런데
소지섭 캐릭터가 불분명하고,
김남진 캐릭터는 배우로 인해 그 위력을 떨치지 못하자
여배우가 연기 못하는 것이
너무 두드러진다.
그러면서 동시에 여배우의 신선함이 극을 살린다.
다시 말해서
여배우의 서툼이,
공주가 현세의 바람을 정면으로 맞으며 당하는 갖가지 곤욕을
치룰 때의 난감함과 잘 어울려서
도리어 그럴 듯 해진 것이다.
그래서
엉뚱하게도 천년지애는,
두 남자 배우가 아니라,
여배우의 서투름이 이끌어가는 것이다.
하지만,
드라마의 중심 아이템은 신선하고 아름답다.
사실 17부 정도까지 억지로 보다가 때려치웟는데,
나머지 3부야 안봐도 비디오,
갑자기 두 남녀가 다시 사이가 좋아지고,
괜히 서로 오해하면서 노려보다가 돌아서서 눈물이나 짜는
상황이 급종료되면서
이제 그녀가 우찌우찌해서
되돌아갈 게 뻔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이 드라마는
스토리가 아니라
캐릭터와 배우들의 매력으로 끌고가야하는데,
실제로 자기 역을 충실히 해낸 배우는
앞서 말한 이선균이란 배우와.
이기영씨 정도일 것이다.
물론,
임채무씨도 좋았다.
눈부시게 변하는 이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꾸만 뒤쳐지고 있는 나 자신으로 인해
느끼는 좌절감이
어쩌면
이 드라마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보지 않고,
공주가
어떻게 처신하는지를
주목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잊혀졌지만 늘 가슴에 남아 있던
바람과함꼐 사라지다까지
끄집어내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