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the end)
그 시간들은 돌연히 끝나버렸다.
돌연히..
아니
그럴리는 없다.
우린 너무 어렸고,
그래서
뭐가 중요한지
뭐가 문제인지 알 수가 없었을 뿐이고,
그는
발에 땅을 디디고 서 있지 못했으며,
난
나만의 세계에 갇혀서
홀로 서성대고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시간은 흘렀고,
그는 군대에 가버렸다.
군대에 간 이후로
그는
종종 전화를 걸거나
휴가를 나오면
날 찾았다.
대체
왜 그가 새삼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는 내겐 한 마디 말도 없이
훌쩍 떠나버렸으니까.
물론
그가 군대에 간 것이 우리가 헤어진 이유는 아니지만.
그리고
그가 복학한 건
내가 졸업 준비에 한참 바쁠 때였다.
그의 시선은 집요하게 나를 쫒았지만
난 무시해버렸고,
이윽고는
졸업했다.
그리고
난 지긋지긋햇던
대학 시절과 굿바이를 했다.
잠깐 반짝였던 1학년 1학기를 제외하곤
난 대학 생활에 진저리를 내고 있었다.
난 친구들도 멀리했고,
아무와도 어울리지 않았으며,
새삼 옛친구들과 다시 연락해서 만나고 다녔다.
그리고
남은 시간은 모조리
연습에만 바쳤다.
학교엔 거의 가지 않았다.
아침에 잠깐 들렀다가
그대로 나와 버리기가 일쑤였다.
난 늘 엄청난 과제곡들에 묻혀서
그것을 마스터하기에 바빴고,
그러면서 세월을 흘렀으며,
빨리 졸업해서
대학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만 했다.
잠시 대학원 진학도 생각 안해본 건 아니지만,
난 음대가 싫었다.
음악을 좋아해서 음대에 갔지만
난 체질적으로 음대 인간들과는 맞질 않았다.
난 음대 교수들도 싫었다.
너무나 정치적인 그 세계가 싫어서
난 대학원을 포기했다.
작년 가을인가?
난 그의 음악회에 다녀왔다.
간간히 귓가에 들려오는 그의 소식을 무심하게
흘려듣고 있던 차에
어느날 그의 노래를 듣고
난 그에게 문자를 보냈던 것이다.
그는 곧바로 내게 전화를 했고,
우린 긴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갑자기 세월을 뛰어넘어
우린
손에 손을 잡고 밤새워 걷던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았다.
난 스스럼없이
정말 대학 동창처럼 그를 대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가 어땠는진 모르겠다.
그는 나로선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나같은 이름없는 존재는 아니니까.
바로 다음날
그는
나와 내 친구를 자신의 음악회에 초청했다.
난 그 음악회에서
대학 시절의 동창 중에서 성공하여
젊은 나이에 교수가 된 친구들도 볼 수가 있었고,
당시의 교수들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대개가 작곡과 출신들이다.
그 음악회는
젊은 작곡과 교수들이 만든 신작 가곡을 역시 젊은 성악가들이 부르는
음악회였던 것이다.
난 오랜 만에 그의 노래를 들었고
그를 보았다.
그는 별로 변하지 않았다.
사진을 보면
한땐 살이 많이 쪄서
성악가다운 면모가 보였는데
어쩐 일인지 다시 본 그는
대학 시절처럼 말라 있었다.
여전히 아름다운 그 음성은
그래서
내가 들은 노래에 비해선
역시 약하다는 느낌이었다.
왜 살이 도로 빠졌을까..
그는 성공했고,
매우 바쁜 나날들을 보내고 있으며
내가 기억하던 그 시절의
바람처럼 허망하고
곧 사라질 듯
부서질듯
어디론가 훌쩍 날아갈 듯한
존재가 아니다.
이젠
관록이 붙었고,
교수이며
성악가이고
음악가로서 맹활약을 하고 있다.
한국에 돌아온 진 얼마 안되는 것 같다.
난 그의 오페라 무대를
잠깐 보았다.
그가 부르는
'남몰래 흘리는 눈물'
은 그야말로
나로 하여금 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다.
그 어떤 성악가가 부르는 노래보다
그의 '남몰래.'는
그야말로 내 심금을 울리고 폐부를 찌르는
극적이고 드라마틱하며 절절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기억 속의 그는
성공한 음악가도 아니요,
유렵에서 맹활약하는 오페라 가수인 그도 아니다.
하늘을 등에 지고
아무렇게나 입은 옷차림에
손가락 사이에서 타들어가는 담배연기가 피워오르는 가운데
우뚝 서서 날 내려다보며
웃던 검은 눈이다.
손을 잡고
밤새워 걷던 그이다.
카페에 마주 앉아 꿈을 얘기하던 그이다.
웃으면서
같이 돌아다니고,
술을 마시고,
밤길을 걸으며
다투던 그이다.
그런 모습은
두번 다시 볼 수 없다.
세월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성공한 음악가인 그는
나완 무관하다.
난 그저
그를 위해 기뻐할 뿐,
내가 기억하고
내가 사랑한,
그리고
날 사랑했던 그는
이 세상에 없다.
그는 존재한다.
내 추억 속에서..
그리고
난 그 추억마저
잊었지만
어느날
우연히 들은 그의 노래가
나로 하여금
그 시간들도 돌아가게 한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난 잠시
긴 여행을 한 것이다.
그런 시간을 내게 주었던
청춘이여 안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