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헌/그의작품들

먼길 (3) ─돌아온 사람, 떠나는 사람 ─

모놀로그 2010. 6. 6. 15:22

 

선주와 다투면서까지 기어이 산 털신을 들고
노인을 마지막으로 한번만 보고 가려고
들른 선주의 집은 텅 비어 있다.

빈집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우식의 모습은
이전의 그가 아니다.

명랑하고 건강해보이긴 하지만
뭔가 빠진 듯 피상적인 인간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는데

이제는
온몸에서 외로움과 서글픔 그리고 쓸쓸함이 배어나온다.
그리고 그것이 그에게 인간미를 부여한다.

그 집에 머물 명분이 없어진 우식은
노인이나 한번 더 보고 가려고 찾아 다니다가
일찌감치 세상 떠난 마누라 무덤 옆에서
병든 몸으로 여전히 술을 마시는 광경을 발견한다.







아버지처럼 자기를 대해주고
자신 또한 아버지라 불렀던
노인에게
차마 자기가 가짜였다는 말을 못하고
따라서 떠난다는 인사도 할 수 없는 우식..



노인은 선주 얘길 들려준다.
처음으로 듣는 선주 얘기..


노인의 병이 깊기에  딸을 맡기고 안심하고 죽음을 맞을 생각에
더더욱 간절히 사윗감에게 의지하고
애정을 보인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우식은 침울해진다.


자긴 사윗감도 아들도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절감했을 것이다.
선주에겐 이미 옛애인이 돌아오지 않았는가...





술에 취해 쓰러진 노인의 모습을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는 우식..
답답하고 안타깝지만 자기 처지에선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남의 속도 모르고 우식의 등에 업혀 집으로 가는 동안
우식 아닌 기현의 이름을 되풀이해서 부르는 노인..

자기 이름이 아닌
이미 연극은 끝났건만
남의 이름으로 불리면서도
일일히 "예, 아버님.."이라고 대답해주는 우식은 목이 메이고
그 음성엔 점차 울음이 배어난다.







노인을 방에 누인 후에
더이상 그 집에 있을 명분이 없어진 탓으로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돌려 서울로 향하며
억지로 모든 것을 잊고자 자신을 추스리려드는데..